제172화
카스텔라나 호텔의 스카이라운지.
테이블에 앉은 헌터들은 모두 6급 이상으로 협회에서 블랙카드가 발급된 최정예였다.
하지만 국가급 재앙인 ‘사도닉스’ 레이드의 진짜 주역은 따로 있었다.
“……저와 대주교님은 이탈리아를 위해 모여주신 여러분의 이름을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대리인 아벤티노.
신부복을 입고 안경을 쓴 아벤티노는 누가 봐도 평범한 신부였다.
그러나 아벤티노는 협회에서 공인된 7급 현역 헌터. 교황의 허락이 떨어져야 움직일 수 있는 ‘청의 사도’ 중 제1의 사도가 된 교회 최고의 전력이었다.
즉 일선에서 물러난 아덴을 제외한다면 이탈리아의 정점들 중 하나.
“그러니 만약…… 형제자매님들이 곤경에 빠지신다면. 청의 사도는 지금의 빚을 위해 기꺼이 움직일 것입니다.”
그의 맹세는 천금보다도 귀한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파트너인 로쟈는 아벤티노가 맹세 하는 모습을 고깝게 보고 있었다.
“아벤티노~ 빚을 갚는 건 일이 끝났을 때 이야기니까. 여기선 접어두자?”
헌터들을 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꺾는 로쟈. 미형의 얼굴에도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크게 뜬 눈은 어딘가 오싹했다.
“당신들 손. 발. 몸. ……꼬리. 5개의 화신들 중에 뭘 맡을지는 생각했어? 가장 강한 머리의 화신은 우리가 맡겠다. 불만은 없지?”
로쟈는 소수정예인 녹음의 숲 길드의 마스터이자 7급 괴수인 세계를 삼키는 바다뱀을 길드 단독으로 공략해낸 영웅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사도닉스의 ‘머리’를 맡겠다고 선언하는 건, 7급인 아벤티노와 로쟈의 실력이 자신보다 아래라고 말을 하는 셈이었다.
메이린은 로쟈의 기세에도 밀리지 않고 도도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머리를 아벤티노 님과 로쟈 님이 맡는 건 상관없습니다.”
머리. 팔. 몸. 다리. 꼬리.
욕심이 많은 사도닉스는 자신의 힘을 5개의 화신으로 나누어 다른 드래곤보다 5배나 많은 유희를 즐겼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꼽히는 건 불의 화신. 이그니스.
통칭 ‘머리’로 불리는 화신이었다.
스윽.
메이린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좌중들을 훑고서 시선을 로쟈에게 고정했다.
“어차피 저희들이 맡고 싶은 화신은 건 몸. 그러니 협회에서 길만 뚫어주신다면 제 사이드 킥과 함께 공략을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하지만 심안검객 쇼이치는 그런 메이린을 막아섰다.
“그건 안 되겠는데? 레이드에서 몸을 맡고 싶은 건 여기 모인 모두가 같으니까. 안 그래?”
쇼이치 피식 웃으며 말을 하자.
울트라는 크하하하- 하고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의 말이 맞네! 사도닉스의 화신을 신체 부위로 분류한 건 드랍 되는 아티팩트 때문! 머리에서 나오는 속성석을 제외하면. 가장 귀한 건 결국 드래곤 하트!”
울트라가 운을 띄우자. 엘리자는 손바닥에 꽃잎 모양의 붉은색 마나를 피워냈다.
“사도닉스의 드래곤 하트는 그 중에서도 최상품. 전 세계의 헌터가 탐내고 있습니다. 양보하기엔 달콤한 꽃이죠.”
후- 하고 손바닥의 꽃잎을 불어버리는 엘리자. 붉은색의 마나는 하늘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주힘찬은 혈기를 참기 힘든지 눈을 빛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기다 드래곤 본이나 드래곤 스케일도 노릴 수 있죠! 사도닉스의 부산물로 만든 헌터용품이라니 생각만 해도…….”
6급 헌터인 주힘찬에게도 사도닉스의 부산물은 값을 매길 수 있는 상품이 아니었다.
헌터들이 욕심을 내는 것도 당연한 이치. 로쟈는 이대로는 끝이 없다며 나름의 기준을 말했다.
“즉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몸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노린다는 거지? 하지만 크루페오스는 사도닉스의 신체 중에서 2번째로 강한 화신. 우리 다음으로 강한 전력이 투입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로쟈의 말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렇게 되면 크루페오스를 상대에게 내어준다는 건, 패배를 시인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헌터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그게 자신들의 전투력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팽팽한 긴장감이 회의실에 감돌았다.
“……이거 참, 강한 순서대로라. 이야기가 어렵게 됐군.”
울트라가 팔짱을 낀 채 머리를 긁적이자. 주힘찬은 당당하게 말했다.
“여기 모인 헌터들은 모두 6급입니다! 강함의 순서를 정하는 건 의미가 없습…….”
그러나 메이린은 주힘찬의 말을 지켜보지 않았다.
“아뇨. 같은 6급이라도 강함의 순서는 있습니다. 당장 울트라 님만 해도 6급이 된지 5년이 지난 헌터입니다. 이제 갓 6급이 된 힘찬 씨와는 경험과 전투력이 다르죠.”
“하하! 이거 민망하구만!”
기분이 좋아 보이는 울트라.
메이린은 울트라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며 주힘찬을 후보에서 걷어낼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경력은 물론. 맡게 된 지부만 보더라도 협회에서는 제가 힘찬 씨보다 명백한 상급자입니다. 제강함을 의심하는 건 협회의 시스템을 의심하는 것 아닐까요?”
메이린이 마지막 쐐기까지 박으려 하자. 이번에는 엘리자가 입을 열었다.
“……경력이 곧 전투력이라는 건가요? 그 말은 인정할 수 없군요.”
엘리자는 이탈리아에서 7급의 경지에 가장 가깝다고 거론되는 6급 헌터. 메이린이 강조하는 경력에 밀려줄 생각이 없었다.
사아아.
주변으로 퍼지는 푸른색의 입자.
엘리자는 포켓에서 아름다운 레이피어를 꺼내더니 손가락에 마나를 담아 칼날을 훑었다.
“원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대련을 치룰 수도 있습니다. 패배를 하는 쪽이 깔끔히 포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군요.”
담담한 목소리와 다르게 엘리자가 강한 태도로 나오자. 메이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드를 앞두고 파티의 전력을 낭비하고 싶진 않습니다.”
헌트들의 욕심과 국가 간의 자존심. 레이드가 시작하기도 전에 조금씩 일어나는 분열을 보며 로쟈는 섬뜩하게 웃었다.
“팔자 좋네. 곧 카스텔라나 동굴은 지옥이 된다. 우리가 공략에 실패하면 피해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 근데 그깟 욕심으로 일을 망칠 생각이면 당장 모두 사라져. 말리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급수가 높아도 소속이 다른 헌터들에게 위압적인 말을 뱉는 건 무례한 행동. 하지만 이전에도 7급 레이드를 성공시킨 로쟈를 인정하지 않는 헌터는 이곳에는 없었다.
주힘찬은 기다려온 순간이라는 듯 씨익- 하고 자신만만하게 웃더니 로쟈에게 말했다.
“저도 강한 사람이 어려운 화신을 맡아야 한다는 로쟈 선배님의 의견에는 동감입니다!”
그 다음 주힘찬은 콕 짚어 메이린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메이린 씨가 간과한 사실이 있습니다! 멘토와 멘티로 나눈다한들 기본적으로 이번 공략은 파티입니다. 멘토 개인의 전투력으로 순서를 정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신유성 학생이 강한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신 공략의 주역은 6급 헌터입니다.”
메이린이 조곤조곤 말을 끝내자. 주힘찬의 입가에는 승리의 확신이 감돌았다.
“그렇습니다. 6급 헌터……. 급수는 협회에서 정한 기준으로 헌터의 전투력을 나눈 등급이죠.”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상황.
메이린은 설마 하는 눈으로 주힘찬을 바라보았다.
‘협회장님이? 하지만 그런 일이 있으시다면 나에게 언급을 해주지 않으셨을 리가…….’
팟-
주힘찬의 간단한 손동작에 떠오르는 푸른색 홀로그램. 그건 협회에서 만들어준 신유성의 새로운 프로필이었다.
[ID : 신유성]
[소속 : 가온 아카데미]
[ 공인 6급 헌터 ]
“그, 그건…….”
홀로그램을 확인한 메이린의 얼굴은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신유성이 6급으로 승급된 사실을 지금까지 비서인 메이린이 몰랐다는 건 협회장인 강유찬이 일부러 숨겨왔다는 뜻이었다.
‘……설마 이 순간을 위해.’
아무리 신유성을 아끼더라도 오른팔인 자신에게조차 이런 사실을 숨겨왔다니. 주힘찬은 당황한 메이린에게 쐐기를 박아 넣었다.
“한국 헌터 협회의 소속이신 메이린 님이 심사기준을 의심하진 않으시겠죠? 즉, 저희 파티는 공인받은 6급만 두 명입니다. 2번째로 강한 사도닉스의 화신. 크루페오스를 배정받을 자격이 누구보다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외통수.
이게 강유찬의 뜻인 이상 차기 회장을 노리는 메이린은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징조는 많았다.
‘……신유성이 6급 보스를 잡았을 리는 없고. 탑에서 클리어했다던 시간의 방 때문인가.’
시간의 방은 6급 헌터라도 진실에 닿지 못하면 클리어 할 수 없는 히든 스테이지. 분명 클리어 난이도가 6급 보스를 웃돌았다.
‘지금까지 지켜본 전투적인 센스도. 한계가 없다는 걸 감안하면 분명 6급에 모자람이 없어. 협회장님도 그 부분을 보셨겠지.’
결국 포기를 한 메이린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에 6급 헌터가 둘.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요.”
로쟈는 그제야 메이린을 제외한 헌터들에게 물었다.
“나머지는 어때?”
절대 양보할 수 없었던 경쟁.
그러나 신유성이 6급 헌터가 됐다는 걸 본 이상. 반박을 하려는 헌터는 없었다.
“우리 콜트는 아직 4급 헌터. 상대 파트너가 6급이라면 이건 어쩔 수 없군…… 양보 할 수밖에.”
팔짱을 낀 채 끄덕이는 울트라.
“학생을 6급으로 승급시켜준. 한국 헌터 협회의 심증이 의심되지만 좋아……. 여기선 한 발 물러나주지.”
심안검객 쇼이치도 주힘찬의 파티를 인정했다. 반면 더 이상 말이 없는 엘리자. 결국 로쟈는 신유성과 주힘찬의 손을 들어주었다.
“좋아. 그럼 몸의 화신. 크루페오스는 한국 쪽이 맡는 걸로.”
멘티의 힘으로 선배인 메이린을 꺾어버린 주힘찬.
‘역시……. 신유성 학생인가.’
신유성이 협회장을 배경으로 두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 메이린이 이렇게 순순히 넘어가는 건 주힘찬도 의외였다.
‘뭐! 잘된 일이지! 난 공략에만 전념할 수 있으니까!’
자신이 최고의 멘토는 아니었지만 최고의 멘티를 고른 건 확실한 상황. 주힘찬은 후배를 이끌어 줘야할 멘토였지만 오히려 신유성을 통해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 * * *
로비에 아델라와 신유성이 도착하자마자. 콜트는 재빠르게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 그럼 난 이만……. 약속이 있어서.”
아무래도 아델라에게 당한 쓰디쓴 패배가 떠오른 모양. 반면 웨이린은 신유성을 보며 눈을 빛냈다.
“너, 한국 파티장 맞지? 이리와, 내 옆에 앉자! 엄청 팬이었거든.”
웨이린은 화악- 신유성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옆자리로 데려왔다.
‘화면으로 봤을 땐 이정돈진 몰랐는데……. 진짜 잘생겼네. 류진이랑은 좀 다른 느낌이긴 한데. 이런 것도 괜찮을 지도?’
웨이린은 신유성을 보며 싱글싱글 웃더니- 계속 치근덕거리며 친근함을 표시했다.
“너~ 우리 경기 본적 있어? 우리도 국가대항전에서 이름 좀 날렸는데~ 흐응~ 한 번은 만나겠네?”
“본 적 있어. 검신님의 제자인 류진이 속한 곳이잖아.”
한국에는 신유성이, 이탈리아에는 아델라가 있다면 중국에는 검신의 제자인 류진이 있다.
‘경쟁전에서 유럽연합을 견제하려면 꼭 필요한 팀이지.’
신유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관심을 보이자. 웨이린은 헤- 하고 웃더니 신유성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자연스럽게 허벅지로 손을 올렸다.
“그래? 그럼~ 나중에 따로 시간 좀 가질래? 경쟁전에서 동아시아 팀끼리 나눌 이야기가 좀~ 있는 거 같은데?”
웨이린은 정작 같은 동아시아 국가인 일본 팀의 잇신에겐 관심을 주지 않았었다. 누가 봐도 흑심이 가득한 웨이린의 태도.
“응~?”
웨이린이 신유성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앙탈을 부리자. 잇신은 무엇이 괴로운지 어금니를 꾸욱- 물고 있었다.
[그래도 키라시마 씨에겐 고마워요. 덕분에……. 유성 씨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다 문뜩 머릿속에 비춰지는 스미레의 얼굴. 잇신은 오히려 자신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유성!”
하지만 분노는 잠시.
어느새 냉정을 되찾은 잇신은 신유성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잠깐 그래. 먼저 나랑 이야기 좀 하지.”
“좋아. 잇신. 일본팀과도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니까.”
신유성은 그런 잇신의 태도에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군. 동아시아 쪽 파티는 전부 유럽 연합을 견제하고 있었던 건가.’
어딘가 흐뭇한 표정.
신유성은 혼자서 오해를 했지만 잇신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 따라 나와라. 마침 바람도 쐬고 싶으니까 말이다.”
“좋아. 그럼 일본 팀부터 천천히 이야기 해보자.”
신유성과 잇신이 테라스로 나가자. 웨이린은 짜증 섞인 얼굴로 인상을 썼다.
‘……저 더벅머리는 왜 끼어들고 난리야.’
하지만 투정도 잠시.
웨이린은 금방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여기 있는 동안 심심하진 않겠네.’
후훗- 하고 웃으며 자신의 숙소로 올라가는 웨이린. 아델라는 인기 투성이인 신유성을 보며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나도 할 이야기. ……많은데.’
하지만 모두가 떠난 자리에서 멍한 얼굴로 남게 된 아델라. 모두에게 주목받던 아델라가 이런 취급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