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물의 도시 베네치아.
아덴은 익숙한 풍경을 내려다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드디어 아델라와 유성이가 만나기로 한 날이로군.’
지금처럼 평화로운 시대에는 보기 힘든 7급 보스의 등장. 그런 거대한 레이드는 현역 헌터들에게도 구경을 할 기회조차 흔치 않았다.
‘……혹시나 레이드에 참여한 덕분에 특성이나 편린을 개화할 수도 있고 말이야.’
하지만 아델라는 물론 유명 길드장인 주힘찬을 통해 신유성까지 레이드에 합류시키자. 이야기가 다르게 흘러갔다.
각국의 헌터들이 레이드를 돕고 싶다며 지원 신청을 한 것이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잘된 일이지.’
아덴은 흐뭇한 표정으로 지원서 명단을 바라보았다.
[신청 국가-일본]
[멘토-쇼이치]
[멘티-잇신]
타국의 보기 힘든 일본 헌터의 지원서. 심지어 쇼이치와 잇신은 아덴조차 알고 있는 유명한 헌터였다.
‘……심안검객 쇼이치. 백귀야행의 잇신이었지.’
쇼이치에게 심안이라는 이명이 붙은 것은 기묘한 능력 덕분이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언제나 전투에서 상대가 공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예측하고 반응하는 것이다.
덕분에 심안검객은 미래를 읽는다는 소문까지 생긴 상황. 일본의 현역 헌터 중에선 손꼽히는 인재였다.
[신청 국가-미국]
[멘토-Ultra!]
[멘티-콜트]
그리고 미국에서 지원한 울트라는 펄럭이는 망토와 슈츠 같은 과한 기믹과 잦은 방송 출연으로. 헌터가 아닌, 방송인으로 폄하 당하지만 괴력의 상징 같은 헌터였다.
‘괴력으로만 따지면 유원학 다음가는 헌터로 꼽아도 될 정도지.’
그가 멘티로 데려온 건 라스트 카우보이. 콜트.
‘분명. 속사가 특징이라고 했지.’
하지만 비교적 국가대항전에서의 활약이 덜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정보는 기억나지 않았다.
[신청 국가-중국]
[멘토-메이린]
[멘티-웨이린]
그리고 중국의 지원서를 본 아덴은 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또 익숙한 이름이군.”
메이린은 자신의 동료인 강유찬의 오른팔과 같은 인물이었다. 한국의 협회장인 강유찬을 따라 부회장으로 가장 유력한 인물.
하지만 그렇게 바쁜 그녀도 친척인 웨이린을 위해서 멘토를 자처한 모양이었다.
‘그만큼. 현역 헌터들이 다음 세대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거겠지.’
바쁜 스케줄 덕분에 전투에서 큰 활약을 보여줄 기회는 적었지만. 메이린의 ‘실타래’를 본 헌터들은 누구도 그녀의 전투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종이를 다음 페이지로 넘긴 순간. 아덴은 기억을 더듬었다.
‘……음? 주힘찬? 아, 강유찬과 같이 있던…….’
[신청 국가-한국]
[멘토-주힘찬]
[멘티-신유성]
메이린에 비하면 옅었던 존재감.
주힘찬이 6급 헌터이라는 것도 아덴은 오늘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멘토가 아닌 그 밑에 있는 멘티의 이름이 빛나고 있었다.
“하하! 우리 유성이는 이름만 봐도 든든하단 말이지!”
마녀의 제자인 로렐라이마저 꺾으며 지금까지 보여준 신유성의 전적은 무패(無敗).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아덴은 신유성이 6급 헌터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유성이는 아직 한계를 보여준 적이 없으니 말이지.’
그리고 마지막 종이를 확인한 아덴은 표정이 짐짓 굳었다.
[신청 국가-이탈리아]
[멘토-엘리자]
[멘티-아델라]
27세의 나이에 6급 헌터가 된 섬광의 레이피어. 엘리자.
‘그리고…….’
자신의 손녀. 아델라 오르텐시아.
아덴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종이를 내려놓았다. 손녀인 아델라가 원하는 일이라면 자신의 모든 능력을 사용해 모두 지원해주고 있지만.
사실 아덴이 원하는 건 거창한 게 아니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손녀가 행복했던 그 시절처럼 따뜻하게 웃을 수 있는 것.
그 지옥 같은 추위에서 혼자 떠돌던 아델라의 모습을 떠올리면 아덴은 미어지는 듯 했다.
‘……가족을 지키지 못한 내겐. 과분한 바람일지도 모르겠지.’
어쩌면 자신이 편안해지기 위한 위안거리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아덴은 아델라의 행복한 미소를 보고 싶었다.
그건 전설의 헌터가 아닌, 가족을 잃은 평범한 노인으로서의 소원.
“지금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아덴은 씁쓸하게 웃었다.
* * *
카스텔라나 동굴 근방의 한 호텔.
이탈리아의 헌터 협회가 레이드까지 전세를 둔 덕분에 로비로 모여 있는 인원은 몇 되지 않았다.
“……여기 모인 학생들이 국가를 책임질 선택받은 루키라 이건가. 재미있군.”
선택받은 루키.
소파에 몸을 댄 콜트는 작은 테이블에 다리를 얹은 채로 말을 했다.
학생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그 순간. 마천루 아카데미에서 온 웨이린이 입을 열었다.
“저기, 콜트라고 했나?”
앙증맞은 만두머리와 긴 머리.
상당한 미모의 웨이린은 기분 좋게 싱긋 웃더니 청아한 목소리로 거친 말을 뱉었다.
“그…… 병신 같은 모자 좀 벗으면 안 될까? 미안. 괜히 시비를 걸고 싶은 건 아닌데. 나까지 답답해서 말이야.”
그야말로 촌철살인.
웨이린은 웃는 얼굴로 다시 콜트의 마음을 찢어버렸다.
“혹시 그 모자. 멋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촌스러운 건 둘째 치고 낡아보여서…… 이 옮을 거 같은데…….”
웨이린이 웃으며 뱉어대는 신랄한 비판에 콜트는 슬쩍- 모자를 내려놓았다.
“고마워! 다행이다……. 조금만 늦으면 그냥 눈을 감으려고 했는데. 좀 낫네.”
항상 날카로운 웨이린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예민했다. 그 이유는 파티장인 류진을 못 봤기 때문.
‘아, 또 잘생김 부족 증상이…….’
웨이린은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더니 무관심한 눈으로 주위를 스윽- 훑어보았다.
‘저 카우보이는 당연히 탈락이고. 일본 애는 좀 봐줄 만한데……. 그래도 역시 류진에 비하면…….’
웨이린은 한숨을 쉬며 포켓에서 류진의 사진을 켰다.
조각처럼 새겨진 잔 근육의 몸은 당장이라도 안기고 싶었고.
남자다운 이목구비는 사뭇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거기다 파티원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성격.
‘보고 싶다. 류진~ 지금은 어디쯤 있으려나.’
웨이린은 당장이라도 포켓으로 류진에게 통화를 걸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제 차단 좀 풀어주지.’
그건 그녀가 류진에게 차단을 당했기 때문. 세븐넘버답게 실력을 인정받아 류진의 파티원이 되었지만 중국 팀에게 파티는 동료의 개념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서로의 이해관계를 위해 모였을 뿐.
류진은 웨이린과 한설아를 동료로 여기지 않았다.
‘뭐 아무렴 좋나~’
푸욱-
소파에 몸을 기대더니 주변에게 관심을 꺼버린 웨이린. 그때 문이 열리며 새로운 루키들이 들어왔다.
새하얀 은발. 붉은 눈.
동화 같은 미모를 자랑하는 가온의 ‘전’ 1위. 아델라 오르텐시아.
그리고.
국가대항전의 폭풍의 눈이자 가온의 ‘현’ 1위. 신유성. 루키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실력을 가진 둘의 등장에 학생들의 시선이 모였다.
‘아, 아델라!’
일단 아델라에게 완패 당한 콜트는 자신도 모르게 아델라의 무표정한 시선을 피했다. 완벽한 힘 차이가 본능에 새겨진 모양이었다.
‘신유성…….’
겉으론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숨이 막히도록 답답해지는 가슴. 잇신은 신유성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스미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외롭고 힘들 때……. 곁을 지켜주시고, 용기를 불어넣어주신 건 키리시마 씨가 아닌 걸요?]
움찔.
몸을 떨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피하는 잇신.
[그래도 키라시마 씨에겐 고마워요. 덕분에……. 유성 씨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거기다 클린 히트가 한 번 더 적중하자 잇신은 자신의 심장에 손을 얹더니 가쁘게 숨을 쉬었다.
“당신 뭐죠? 똥이라도 마렵나요? 엄청 안색이 나빠 보이는…….”
그 모습을 고깝게 보는 웨이린.
하지만 신유성이 웨이린을 지나치자. 이번에는 웨이린은 얼굴에서 짜증이 날아가고 멍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초 미남…….”
각자 이유는 다르지만 신유성과 아델라는 등장만으로 참가자들에게 충격을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