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깊어가는 밤.
억수처럼 쏟아지는 비.
스미레는 처음 듣는 신유성의 과거에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흐우…….”
무언가를 말하려던 스미레의 입이 멈추어버렸다. 스미레는 이제야 자신에게 신하윤이 손을 뻗는 이유도. 신하윤을 바라보던 신유성의 눈빛도. 그리고 비가 오는 날.
신유성이 떠올리던 표정도 모두 이해 할 수 있었다.
푸욱.
스미레는 몸을 움츠린 채로 베개 뒤에 숨어 신유성을 바라봤다.
스미레에게 신유성은 믿음직한 파티장이자 언제나 의지가 되는 강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던 건 언제나 흔들림이 없는 신유성의 굳은 의지 때문.
신유성은 사소한 바람에도 흔들리는 자신과 달랐다고 믿었고 그래서 스미레는 늘 동경했다.
‘하지만…….’
신유성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스미레는 알 수 있었다. 신유성은 슬픔에도 울지 않고, 외로워도 내색하지 않으며, 어쩔 수 없이 강해져야 했던 사람이었다.
‘그 사건’의 두려움으로 방에 틀어박혔던 자신의 반년의 시간과 버림 받았음에도 12년을 노력한 신유성의 시간.
차이가 있다면 방에 틀어박혔던 자신과 다르게 정면으로 버텨냈을 뿐.
‘……기분이 이상해.’
스미레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아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래도 괜찮아. 나에겐 스승님이 있었고.”
하지만 스미레의 마음도 모른 채, 신유성은 담담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이젠 너희가 있으니까.”
상처로 생긴 굳은살처럼 스미레는 어쩌면 5살에 겪었던 슬픔과 힘든 수련으로 신유성의 마음이 닳아버린 걸지도 몰랐다고 생각했다.
이젠 아파도 아픈 줄 모르게 되어버린 것이다. 자신과 다르게 신유성은 강하니까. 분명 그럴 것이다.
하지만 스미레는 알고 있었다.
[전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한다고 정말 괜찮은 게 아니라는 걸. 상처는 치료하지 않는 이상 곪아 간다. 작은 상처 따위 아프지 않도록 강해지더라도 상처는 누적되고 쌓여간다.
와사비라도 집어먹은 듯 찌잉- 하고 울려오는 코끝.
“역시……. 유성 씨는 강하시네요.”
스미레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용기를 낸 스미레는 신유성과 눈을 맞췄다.
“……무척. 외로우셨을 거 같아요.”
그리곤 우는지, 웃는 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 누구보다 자신을 믿어 줬어야할 가족에게 버림받다니. 자신이라면 절대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이정도의 감상. 겪어보지 않았기에 스미레는 신유성의 슬픔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유추할 뿐이었다.
“……그래?”
신유성도 스미레의 공감에는 부정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으로 퇴색되었지만 자신이 느낀 감정 속에 분명 슬픔은 있었으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네.”
신유성이 평소와 같은 옅은 미소로 답하자. 스미레는 아까보다 한층 밝아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신유성이 웃으면 이유도 없이 기분이 좋아지고. 고민이 깊어 보이면 같이 생각이 많아지다니.
스미레는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난, ……유성 씨를 엄청 좋아하는 거구나.’
불이 꺼지고.
창가의 빗소리만이 유일하게 흐르는 적막한 순간. 스미레는 신유성의 옆에 누웠다. 신유성이 자신의 침대에서 잠을 잔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건 마치 부부 같으니까.
‘아…….’
또 다시 뜨거워지는 얼굴.
신유성이 옆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자 스미레는 쉽사리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스윽-
스미레는 잠꼬대를 빙자해 신유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불을 껐음에도 창가에서 비친 달빛에. 신유성의 얼굴이 보였다.
하얀 피부.
오똑한 코.
쿵쿵- 쿵쿵-
스미레의 가슴은 마음대로 뛰며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가까운 거리.
체온이 느껴지는 이불 안.
그저 자고 있는 신유성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스미레는 자신이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기분. 자고 있는 신유성의 모습은 그만큼 무방비했다.
‘유성 씨…….’
스미레는 이불 너머로 느껴지는 신유성의 온기가 기분 좋았다.
‘만약……. 내가 유성 씨의 가족이 될 수 있다면…….’
스미레는 언제나 신유성의 편이 되어줄 자신이 있었다. 만약 신오가문의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이 가족이 되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스미레는 신유성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예 신유성의 몸에 자신을 맞대고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유성 씨.”
집중하지 않는다면 들리지도 않을 작은 목소리로 스미레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좋아해요……. 엄청……. 엄청 좋아해요.”
스미레는 같은 파티원이나 동료가 아니라. 신유성에게 애정의 대상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에겐 과분한 꿈.
“저. ……그러니까. 유성 씨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할게요.”
작게 속삭이며 잠이 든 신유성의 몸을 부드럽게 껴안는 스미레. 그 때문인지 편린은 주인의 강한 열망에 반응하듯. 손등에서 보랏빛의 마나를 은은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동화율이 올라갔습니다.]
[현재 동화율 67%]
신유성을 향한 마음.
그리고 열망이 스미레를 강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 * *
신성그룹의 본가에서 하는 저녁식사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권력자들 중에서도 선택 받은 일부만이 초대 받을 수 있었다.
대규모의 인원이 모이는 연회보다도 훨씬 고위급의 인사들을 모아 은밀하게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 김석한은 웃으며 말했다.
“이거 참, 창피한 일이구만! 이렇게 누추한 곳에 귀한 분들을 모시게 되다니!”
신성그룹의 회장인 김석한이기에 할 수 있는 농담. 대형 길드의 길드장부터 유명 헌터와 정치권의 인사까지 쟁쟁한 사람들을 모아놨음에도 김석한의 권력을 능가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하하! 누추하다니 재밌는 농담이십니다! 회장님!”
“맞습니다. 본가의 소문이야. 익히 들었지만 정말…… 살아생전 이런 궁궐은 처음 봅니다!”
김석한의 비위에 맞춰 웃고 있는 사람들. 김은아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환멸이 들었다.
‘……뭐. 우리한테 잘 보이려고 아양 떠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명단을 본 순간부터 김은아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가문은 F급 특성을 가진 후계자를 원하지 않았거든.]
김은아는 카페에서 신유성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잊지 않았다. 지금 김은아가 원하는 건 복수의 단맛.
“신강윤인가. 그 남자 어디 있어?”
“신오가문의? 그쪽이야 워낙 거물이니 얼굴을 외워뒀지. 잠시만 기다려. 어디보자……. 아 저기 있네! 아버지랑 대화 중이신 거 같은데? 밤의 파도 길드장도 같이 계시네.”
김은아는 김준혁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건, 아버지인 김성한과 두 남자였다.
“아~ 그래?”
악마 같은 표정으로 아버지인 김성한에게 다가가는 김은아. 김성한과 신강윤. 그리고 밤의 파도에 길드장인 테리안은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김은아는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으로 테이블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엿 들었다.
“저희 이번 토벌 건은 저희 밤의 파도에게 맡겨만 주시면……. 얼마든 단가를 맞춰 드릴 수 있습니다!”
밤의 파도의 길드장인 테리안은 휘황찬란한 금발의 남자였다. 그리고 옆에는 신유성의 아버지인 신강윤이 있었다. 마흔을 넘은 중년의 나이에도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였다. 김은아가 느낀 신강윤의 첫 인상은 마치 잘 갈려진 날카로운 칼 같았다.
“뭐야. 유성이랑 하나도 안 닮았네. 뱀처럼 생겨가지고.”
물론 신유성에게 못된 짓을 했으니 날아가는 건 신랄한 비판뿐. 신강윤은 김은아의 시선을 눈치 챘지만 애써 무시했다.
이번 메트로 지하철 토벌 계약은 신오가문의 가주인 자신이 직접 올 정도로 큰 건. 다른 곳에 한눈팔 시간은 없었다.
“김성한 부회장님.”
신강윤이 김성한을 불렀다.
김성한이 안경의 매무새를 만지며 시선을 돌리자. 신강윤은 깔보듯이 테리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희는 토벌 단가를 낮추진 못합니다. 질 떨어지는 헌터들을 앞세워. 가격으로 승부를 보는 장사치와는 다르기 때문이죠.”
“자, 장사치라니!”
“저희들은 백이면 백 토벌을 성공하며 실적을 증명해왔습니다. 그래서 저들처럼 가치를 떨어트리며 구걸을 하지 않죠.”
“당신! 무슨 말을!”
“길드장이 되었다고 나와 같은 급이라고 생각하나본데. 언성을 높이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신강윤은 테리안을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전 세계에서 몇 없는 7급 헌터의 눈빛은 대형 길드장인 테리안조차 압도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돼, 됐습니다! 어차피 선택은 부회장님의 몫이니…….”
이미 테리안은 기선제압에서 밀린 상황. 아무리 토벌 단가를 낮춘다 한들 김성한은 테리안에게 일을 맡기고 싶진 않았다.
‘역시 이번 일은…….’
그렇게 신오가문에게 표가 기우는 순간. 누군가 끼어들었다.
“아빠. 여기로 하자.”
갑자기 끼어든 김은아는 밤의 파도 길드를 택했다. 어안이 벙벙한 테리안의 얼굴. 아버지인 김성한도 놀라서 김은아에게 물었다.
“으, 은아야?”
후계라면 질색을 하던 김은아가 갑자기 사업에 관심을 보이다니. 놀란 김성한에게 김은아는 테리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길드마크가 예쁜 거 같아. 파도모양이잖아. 바다도 생각나고.”
어이없는 김은아의 이유에 신강윤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 무슨…….”
신오가문의 가주. 신강윤.
자타공인 신성그룹의 귀염둥이. 김은아.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봤다.
기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