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67화 (167/434)

제167화

한국 재계의 중심인 신성그룹 일가가 소유한 대저택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은 섬 하나를 통째로 저택으로 만든 본가였다.

바다 위에 떠있는 이름 모를 섬.

테러를 방지해 위치를 밝힐 수 없기 때문에 저택은 전용 포탈로만 출입 할 수 있었다.

덕분에 1년 만에 본가로 돌아온 김은아는 호화로운 복도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빠아! 이게 뭐야!”

김은아가 가리킨 곳에는 어려진 김은아의 사진이 잔뜩 걸려 있었다.

“너 어려졌을 때 사진이네?”

“나도 알아! 아니…… 누가 사진을 저렇게 큰 액자에 넣어서 걸어!?”

“할아버님일걸? 네가 어려졌을 때 정말 엄청 좋아하시더라. 본인도 10년은 젊어지신 것 같다고…….”

“죽은 사람 같잖아! 당장 내려!”

정말 말 그대로 ‘억’ 소리 나는 미술품을 내리고 걸어둔 게, 자신의 사진이라니.

“그래도 정말 귀엽지 않니? 후, 기억난다. 저때는 나한테 업히는 걸 제일 좋아했는데.”

“……됐고 그래서 엄마랑 할아버지는?”

김준혁의 말을 일축한 김은아는 당장 본론을 물었다. 그런 김은아의 태도가 익숙한지 자연스럽게 받아주는 김준혁.

“손님들이랑 같이 계셔. 곧 식사니까. 너도 가야지?”

“그래. 갈 거야. 마침 궁금했던 얼굴들이 있거든.”

‘궁금했던 얼굴’은 평소부터 연회라면 질색을 한 김은아가 굳이 먼저 식사에 참가하겠다고 가족들에게 선언한 이유.

[참가인]

[신강윤- 신오가문]

[유민서- 유진 컴퍼니]

[신미향- …….]

“어디~ 그럼 얼마나 잘난 낯짝인지 보자고.”

김은아는 평범한 학생이 아닌, 신성그룹의 후계자로서 파티장을 버린 신오가문 일가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     *      *

잘 꾸며진 스미레의 기숙사는 공기부터 달랐다. 디퓨저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 잘 정돈된 가구와 식기들. 방금 전에는 보이지 않던 사소한 부분들이 신유성은 식사를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내 방이 스미레와 같은 기숙사라는 게 믿기지가 않네.’

달그락.

수저를 놓은 신유성이 스미레를 바라보았다.

“맛있었어. 스미레.”

평소처럼 평범한 인사에도 묘한 분위기. 스미레는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감사합니다!”

대체 왜 긴장을 한 걸까.

사실 스미레가 오늘처럼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운 건 도리어 신유성 자신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모르는 게 정말 많았던 거 같아요.]

신유성은 같은 파티원임에도 스미레에 대해서 몰랐던 사실이 너무 많았다. 신유성에게 스미레는 같이 고난을 함께하고, 계속 곁에 있고 싶은 파티원.  서로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게 기쁜 건, 신유성도 마찬가지였다.

“네 말이 맞아 스미레.”

파티원의 교감이란 상대에 대한 이해와 신뢰에서 오는 것, 신유성은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난 그저 파티의 실력을 올리는데 급급했어.’

파티원에 대해 알지 못하고 교감이 없다면 그건 동료가 아니었다.

‘기술적인 부분에만 집중하는 건, 파티원을 도구 취급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

또 한 번 스스로를 반성하는 신유성. 긴장한 스미레는 신유성을 바라보며 무해한 웃음을 지었지만 신유성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우린 서로에 대해 너무 몰랐던 거 같아.”

신유성도 스미레가 자신의 과거에 관심이 있다는 건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은 건 그저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그러나 자신의 과거를 터놓는 스미레를 보며 신유성은 생각을 고쳤다.

‘누나가 스미레에게 동아리의 일로 접근한 걸 보면…….’

신오가문이 얽힌 이상, 이미 신유성의 과거는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파티원인 스미레도 왜 자신에게 신하윤이 마수를 뻗치는지 알 권리가 있었다.

‘……역시 그 이야기들을 다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오늘만은 신유성도 기꺼이 밤의 수련을 포기했다. 스미레는 신유성에게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파티원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그럼 씻고 올게. 스미레. 남은 시간에는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자.”

공원에서 비를 맞았으니 샤워를 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 하지만 스미레는 기침을 하더니 동그랗게 열린 입으로 말을 더듬었다.

“에큭, 네헤?!”

얼이 나간 스미레는 욕실에 들어가는 신유성을 멍하니 바라봤다.

*     *      *

스미레는 자신의 기숙사에 신유성이 오고, 늦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만으로 너무 기뻤다.

하지만 상황은 생각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우린 서로에 대해 너무 몰랐던 거 같아.]

자신이 했던 말에 무언가를 깨달은 걸까. 한참이나 고민에 빠져 있던 신유성은 스미레를 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씻고 올게. 스미레. 남은 시간에는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자.]

“아, 으흐으…….”

욕실에선 샤워기의 물줄기 소리가 바깥에선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따라 점점 붉어지는 스미레의 얼굴.

- 역시 이렇게 되고 말았는가.

라플라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말을 내뱉자. 스미레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라, 라플라스 님…….”

라플라스는 울상이 된 스미레를 대신해 괜히 자신이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 당연한 수순이었지.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뭣하다만. 아이야. 나는 정말로 매력이 있다.

- 날 토벌하러 온 헌터들마저도 나의 미모에 매혹되어 고생을 치렀을 정도지.

- 하물며 나의 몸? 후훗, 됐다. 더 이상 말을 말자꾸나.

힘을 되찾으며 얻은 기억이지만.

재앙의 마녀인 라플라스의 미모는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그녀는 사악한 ‘마녀’. 심지어 비혼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왕자와 북부의 대공에 이르기까지 구혼자가 줄을 이었다.

그 미모에 매혹되어 버린 ‘가장 어두운 땅의 주인’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아크리치와 사역마를 라플라스에게 선물했을 정도.

- 그런데 아이야. 너는 나를 닮았다. 보통 닮은 게 아니라. 아주 빼다 박았지.

- 그런 너를 보고. 마음이 동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느냐?

이게 바로 신유성의 반응에 라플라스가 자랑스러워한 이유였다.

“그, 흐흐, 그래도 라플라스 님! 저는……. 아직…….”

스미레는 애꿎은 감자샐러드를 스푼으로 으적거렸다.

망상을 떨쳐내려 애써도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신유성의 목소리.

[그럼 씻고 올게. 스미레. 남은 시간에는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자.]

망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신유성을 닮은 딸과 자신을 닮은 남자 아이. 신유성과 모든 가족이 단란하게 앉아 스미레가 만든 밥을 먹는 따뜻한 장면.

몸을 말린 신유성이 편한 옷을 입고 걸어 나오자 스미레는 자신도 모르게 푹- 고개를 숙였다.

“저, 저저! 유……, 유성 씨?”

그리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저도옷- 씻을…… 까요?”

말을 하는 도중에 딸꾹- 삑사리를 내는 스미레. 신유성은 포켓에서 꺼낸 바나나우유에 콕- 하고 빨대를 꽂더니 흔쾌히 말했다.

“응. 방에서 기다릴게.”

바싹바싹- 말라오는 입.

소리가 들릴 정도로 쿵쾅거리는 심장. 욕실에 들어온 순간에도 스미레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단둘이 남은 기숙사.

신유성이 돌아갈 수 없도록 억수처럼 내리는 비. 샤워를 마친 신유성과 샤워를 하고 있는 자신.

샤아아아-

뜨거운 물에 몸을 씻었기 때문일까. 스미레의 얼굴은 계속 화끈거렸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엎질러진 물. 샤워를 마친 스미레는 가운을 두른 채 거울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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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자랑스러운 나의 아이로다. 가거라 아이야. 네가 가진 힘을 제대로 보여 주거라!

계속해서 자신을 부추기는 라플라스의 목소리. 사실 라플라스의 말이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자존감이 낮은 스미레라도 자신의 몸이 어떤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자 스미레의 마음에 용기가 차올랐다.

‘……나, 나는 해낼 수 있어!’

결국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물며 다짐하는 스미레. 지금 스미레의 머릿속에선 신유성과 보냈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평소라면 입지 않을 용기가 필요한 잠옷까지 걸치며 스미레는 전투를 나가듯 단단히 무장했다.

스윽. 저벅.

오늘따라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욕실과 침대의 거리.

꿀꺽.

긴장한 조명등의 불빛을 따라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 앞에 멈춰선 스미레는 양손으로 두터운 이불을 들어올렸다.

“……시, 실례하겠습니다.”

신유성의 온기 때문일까 이미 따뜻한 이불에 스미레는 포근함을 느꼈다.

톡.

긴장한 스미레의 손끝이 신유성의 몸에 닿았다. 자신과는 다르게 단단한 신유성의 몸.

“아……. 죄, 죄송해요. 무척 좁아서…….”

스미레는 긴장감에 숨이 막혀왔다.

자신의 기숙사에서 신유성과 이런 상황이 되리라곤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긴장한 스미레와 달리 신유성은 어딘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역시 이야기는……. 5살부터가 좋겠지?”

오늘 밤.

서로를 알아가자는 신유성의 말은 스미레와 다른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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