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폭풍 같았던 영국과 한국의 경기는 오히려 두 스승의 해묵은 감정을 해소해주었다.
“멋진 제자를 두었는걸.”
아리스가 웃으며 말을 하자. 유원학은 담담하게 답했다.
“네 제자도. 제법 강하더군. 젊은 시절의 널 보는 듯 했다.”
하지만 제자들을 향한 둘의 칭찬은 거기서 끝. 아리스와 유원학은 더 이상의 말을 꺼내는 대신 그저 서로를 바라만 보았다.
유원학은 아리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최근 연달아 발생한 납치 사건. 그건 당연히 그 녀석 짓이겠지?
마치, 모두 알고 있다는 유원학의 이야기. 아리스는 서재에 꽂힌 책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몰라. 그 아이가 열어버린 차원은 나조차 추적 할 수 없으니까.”
“네가 추적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니. 그 이야기는 더욱 확신을 하게 만들어주는군.”
유원학의 말에 아리스는 대답이 없어졌다.
“그 녀석의 일은 네가 처리하고 싶어 하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까지 계속 숨길 생각인가. 아리스?”
팔짱을 낀 유원학이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아리스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일반인은 따라 잡을 수도 없는 깊은 고뇌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고심의 끝에 내린 결론은.
“어쩔 수 없네…….”
아리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간도 넉넉하니. 그 아이 이야기를 해줄게.”
* * *
악명 높은 빌런 단체 리벨리온의 수장은 헌터 협회가 정한 자신의 아명을 들었을 때, 그만 웃고 말았다.
The Nameless(이름 없는 자).
이름이 없다니.
그건 그들의 생각일 뿐. 리벨리온의 수장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의 이름은. 3017.’
정확히는 EP-TEST-No.3017.
절대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지옥 같았던 곳에서 주어진 거라곤, 하얀 실험복과 3017이라는 실험체 번호가 전부였으니까.
3017.
그 숫자를 되새기며 네임리스가 눈을 감았다. 그러자 깊은 곳에 새겨졌던 기억이 선명히 되살아났다.
[그거 알아? 이 세상은 사실 엄청 넓대!]
생기가 넘치는 눈.
처음에는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실험실에 있는 대부분은 반복되는 투약과 실험으로 피폐해져 있었고, 덕분에 어딘가 죽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끝도 없이 넓어서. 계속~ 계속~ 걸어도 멈추지 않는대.]
자신과 같은 벤덤 시티에서 태어난 실험체인 주제에 호기심 가득한 눈을 빛내며 마치 보기라도 한 듯, 바깥 세상에 대해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2996 너도 여기서 나가본 적 없잖아.]
[책에서 봤어!]
[한국어?]
[아니, 이제 루시가 다른 책도 봐도 된다고 했어. 언제 사회화 훈련을 받을지 모른대! 다 받으면 여길 나가는 거겠지? 흐히, 신난다.]
[꿈도 꾸지 마. 여기서 나가는 건 죽은 사람뿐이야.]
그때를 생각해보면 2996에게 너무나도 차갑게 굴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귀찮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실은 부러웠을 뿐이었다.
이런 지옥 같은 곳에서도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그녀의 용기가.
[3017아. 바깥세상은 화창한 날이 되면 꽃이 핀대.]
[꽃이 뭔데?]
[아름답고. 냄새도 좋은 거! 그런 것들이 잔뜩 있는 곳에 파묻혀 있으면 엄청~ 기분 좋겠지?]
그리고 그때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실은 좋았다.
[오늘은 달 이야기를 해줄까?]
[달은 계속 모양을 바꾼대!]
[어떤 날은 굶은 것처럼 반쪽만하고, 어떤 날은 잔뜩 먹은 것처럼 동글동글 뚱뚱해지고! 신기하지?]
2996이 들려주는 바깥세상의 이야기가.
[……하아, 흑. 그리고 꼭. 난 바다에 가고 싶어.]
실험실에서 유일하게 밝게 빛나던 2996이 화사함이.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아마, 그래서 더 슬펐겠지.
[……3017. 너야?]
[응. 어떻게 알았어?]
[네 발소리는…… 엄청 상냥하거든. 조곤조곤 속삭이는 거 같아.]
[2996. 아직도…… 아직도 바깥 세상에 가고 싶어?]
[……응. 가고 싶어. 무척.]
빛을 잃고.
2996의 본질을 잃고.
천천히 퇴색되어 가는 게.
나는 너무나도 슬펐다.
[……어디로?]
[으응~ 글쎄…… 집 하나도 짓기 힘든. 좁은 섬은 어떨까? 꽃이 잔뜩 핀…….]
[그런 곳에 가더라도. 이제 넌 볼 수도 없잖아…….]
[흐히…… 3017. 네가 설명해주면 되잖아.]
[네가 해줬던 것처럼?]
[응응.]
[그건, 너무 귀찮잖아.]
[……해줄 거지?]
[응.]
[흐흐, 고마워. 근데, 오늘 무척 졸리다…….]
그게 2996의 마지막 모습.
[EP-TEST-No. 2996.]
[퇴출 및 폐기 처리]
2996은 새 하얀 실험실에서 자신의 빛을 천천히 잃었고. 37번의 실험 끝에 스러졌다.
[안타깝게 됐군. 마지막 실험을 못 버티다니. 반면 축하한다. 3017! 너는 내가, 아니 이 벤텀이 낳은 최고의 걸작이구나!]
파올라 그레코.
벤텀을 담당한 천재 과학자 겸 헌터. 네임리스의 특성은 그 과학자의 말에 폭주했다.
차원 계약(Dimensional contract)
즈어어억!!
네임리스는 자신과 파장이 맡는 차원과 접촉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폭주한 네임리스의 감정과 가장 파장이 맞는 차원의 이름은.
이터널 디멘션(Eternal Dimension)
그 안에서 최하급으로 치부되는 존재조차도 탑의 40층은 넘어서야 볼 수 있는 끔찍한 차원.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그를 들여다볼 것이라 했던가. 네임리스가 절망의 심연 속에 빠진 순간, 그 감정에 어울리는 차원의 존재가 네임리스를 바라본 것이다.
그것은 곧 끔찍한 반전의 서막이었다.
네임리스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다고 했던가요? 20년이 지난 세월 끝에 겨우 만나게 됐군요.”
“윽, 읍읍읍!”
파올라는 그때와 달리 하얗게 변한 머리카락을 한 채, 미친 듯이 발버둥치고 있었다.
“전 당신을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네임리스는 파올라의 입에 붙여진 테이프를 떼어냈다. 첨단 기술을 가진 달클로와 치트가 이런 부분에선 아날로그를 추구하다니 정말 재밌는 일이었다.
“넌, 너는!”
파올라의 눈에 어린 공포.
네임리스는 빙긋이 웃으며 파올라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길 얌전히 기다렸다.
“3017! 3017이구나!”
역시 20년이 지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3017은 3016명의 죽음으로 만들어낸 피로 물든 숫자.
“맞습니다. 당신과 세계 헌터 협회들은 절대 잊어선 안 될 이름이죠.”
리벨리온의 수장이 벤덤의 실험체인 3017이라는 사실은 이미 협회의 수뇌부에겐 비밀도 아니었다.
당사자인 파올라는 절대 모를 수 없는 사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나를 찾았지? 나에 대한 모든 정보를 소거했건만!”
파올라의 물음에 네임리스는 그저 빙긋이 웃었다.
그가 파올라를 찾아낼 수 있었던 건, 소거된 파올라의 정보를 복구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그저 치트라는 유능한 해커를 자신의 편이 되도록 설득한 덕분이었다.
“……그게 중요한가요?”
네임리스의 싸늘한 목소리에 파올라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 찾았는지 보다. 왜 자신을 찾았는가? 였다.
“그때의 난, 그저 인류를 위해 일했을 뿐이다! 세계의 공익을 위해서! 이건 협회가…… 아니! 전 세계가 협의한 사실이야!”
네임리스는 대답 대신 자신의 안경을 벗더니, 손수건으로 천천히 닦았다. 그건 거사를 치루기 전, 경건한 마음을 다잡는 네임리스만의 의식이었다.
“……그렇군요.”
천천히 안경을 쓴 네임리스는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화창한 날씨.
보름달과 만월.
하늘에 떠있는 두 개의 달.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아름다운 꽃이 핀 좁은 섬.
이곳은 자신이 계약으로 만들어낸 공간. 2996을 맞이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변명은. 제가 아니라. 2996에게 직접 하시죠.”
딱!
네임리스가 손가락을 맞대 소리를 냈다. 그러자 등 뒤에서 공간이 일그러지고 갈라졌다.
그 틈에서 천천히 흘러넘치는 안개와 정체불명의 그림자.
“오랜만이야. 2996.”
네임리스가 웃으며 말했다.
안개가 걷히자. 정체불명의 그림자도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의 혼을 삼키고 영원토록 구속한다는 이터널 디멘션의 괴기스러운 존재.
고오오-
2996이라 불린 괴물은 천천히 붉게 물든 손을 뻗었다.
사아아아-
네임리스를 움켜쥐려던 붉은 손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더니. 대신 조금 더 앞에 있는 파올라를 쫓았다.
“크흐억!! 당장 이걸!”
파올라는 입에 거품을 물며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촉수처럼 움직이던 붕대는 파올라의 몸을 옥죄어 왔다.
쐐애액! 콰악!
괴물은 자신의 얼굴 앞으로 파올라를 데려갔다. 그리곤 머리통에 모여있던 손가락의 형상이 열리며 파올라에게만 진정한 얼굴을 드러냈다.
“컥, 커헉…….”
외마디 비명과 함께 마나쪼가리로 잘게 분해되어 흡수되는 파올라의 몸. 네임리스는 끔찍한 광경을 보며 빙긋 웃었다.
이곳은 네임리스가 계약한 심상(心象)의 세계. 맑았던 하늘에선 끝없이 비가 내렸다.
“……천천히 먹어. 2996. 그동안 내가 만든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들려줄게.”
협회를 향한 네임리스의 복수는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