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산꼭대기에 세워진 폐성.
구류섬의 전경이 한 눈에 보이는 이곳의 이름은 [운사의 정상]이었다.
스미레는 깨진 창문 사이로 탁 트인 전망을 확인했다.
“역시 운사의 정상은 구류섬에서 제일 좋은 점령지 같아요.”
스미레는 숨을 들이쉬었다.
숲이 뿜어내는 피톤치드 냄새는 마음을 진정시켜주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상쾌한 기분.
스미레는 소심하게 양손을 앞으로 뻗어 기지개를 펴더니. 고개를 돌려 이시우와 주하진을 바라보았다.
“자 그럼. 가까운 장소부터 점령해볼까요?”
“어? 그, 그래…….”
주하진이 웬일인지 스미레의 시선을 피했다. 스미레의 말처럼 [운사의 정상]은 주변을 확인할 수 있는 전망 덕에 가장 인기가 많은 점령지 중 하나였다.
5개 가까운 파티가 운사의 정상을 점령하기 위해 모였지만 살아남은 건 오직 스미레의 파티.
스미레는 5개의 파티를 혼자 정리했다. 놀라운 건 다른 파티원들은 손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5개의 파티를 전원 탈락시킨 건, 스미레. 아니 스미레의 사역마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대단한 사역마들도 사령술사인 스미레에겐 절대적으로 복종했다.
“이곳은 주인님의 미모와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폐성! 하지만 주인님께서 만족하신다니 이 릴리스는…… 마음이 놓입니다!”
채찍질로 무자비하게 학생들을 탈락시킨 릴리스가 스미레에게 강아지처럼 아첨을 떠는 모습은 주하진도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이게 뭐냐 진짜…….’
거기다 듀라한은 한손에는 검을. 나머지 한손에는 웬 금발미남의 머리를 들고 있었다.
“……주군의 힘이 강대해지신 덕분에 저의 머리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심지어 머리가 말도 한다.
“따다닥-! 딱딱!”
스미레의 승리에 기뻐하며 턱을 부딪치는 해골들. 만약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식은땀을 흘린 주하진은 슬쩍 이시우를 흘겼다.
“뭐여. 데스나이트가 이제 머리도 생겼네.”
“저는 이제 무명의 데스나이트가 아닙니다. 저는 주군의 힘으로.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습니다. 제 이름은…….”
“뭐야 잘린 머리가 말을 하니까! 엄청 소름 끼치잖아!”
아무래도 이시우조차 말하는 머리는 처음 보는 모양. 주하진은 듀라한에게서 시선을 피하더니 괜히 스미레를 쳐다보며 센 척을 했다.
“야! 음침녀! 너, 너도 제법이네!”
나름 자존심이 강한 주하진도 스미레의 실력은 인정한다는 의미. 하지만 주하진의 어투는 엄한 릴리스를 자극했다.
“네놈! 주인님에게 무슨!”
화가 난 릴리스가 채찍을 휘두르려고 하자.
“릴리스 씨! 저흰 모두 팀이에요! 절대 싸움은…….”
스미레는 오히려 그런 둘을 말렸다. 릴리스는 주하진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스미레의 명령에 화를 식혔다.
“……알겠습니다.”
“흥. 서큐버스 넌. 음침녀 덕에 목숨 건진 줄 알아. 채찍을 휘둘렀다면 내 ‘질주’로 엉덩이를 걷어 차줄 생각이었으니까.”
주하진은 혀를 내밀며 끝까지 릴리스를 자극했다. 스미레는 그런 둘을 보며 멋쩍게 웃어주더니 차근차근 작전을 설명했다.
“……이번 작전은 이시우 씨와 주하진 씨 두 분의 의견을 적극 수용할 생각이에요.”
스미레의 작전은 이랬다.
구류섬의 곳곳을 탐험하며 신물을 가져올 선발대.
그리고 점령지에 남아 운사의 정상과 스미레를 지킬 수비대.
이렇게 팀원을 나눠 각자 운용하는 것. 물론 해골과 구울 같은 언데드는 선발대와 수비대 모두에게 나눠서 투입 시킬 생각이었다.
“인원 분배는 파티원의 시너지와 의견을 내신 쪽에 맞게 정해보았습니다!”
그렇게 정한 선발대는 주하진과 릴리스. 해골과 구울을 합친 도합 5마리의 언데드.
수비대는 천리안과 투시로 장거리 저격이 가능한 이시우와 듀라한. 스미레가 소환한 대량의 언데드였다.
“선발대는 언데드가 많으면 동선이 들킬 위험이 있으니. 투입하는 언데드의 숫자를 일부러 줄였어요.”
스미레는 역시 기본적으로 필기시험이 순위권인 이론의 우등생이었다. 거기에 사령술사라는 특성으로 다져진 전략까지 더해졌으니 능숙하게 작전을 내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주하진 씨 선발대의 역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케이. 돌아올 땐 잔뜩 신물을 가져올 테니까 둘 다 집이나 잘 지키고 있어.”
콧노래를 부르며 앞장서는 주하진.
스미레는 주하진이 떠나자. 소중하게 티슈에 보관했던 신유성의 머리카락을 포켓에서 꺼냈다.
사아아-!
보라색 빛이 머리카락을 삼키고 드드득- 소리를 내며 바닥에서 일어나는 해골.
“딱! 따닥!”
신유성의 머리카락으로 소환한 스켈레톤은 다른 스켈레톤들과 달리 척 보기에도 건장해 보였다.
“뭐야 그 해골은?”
결국 호기심을 못 참고 이시우가 묻자. 스미레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유성 씨의 해골요!”
맞는 말이지만 스미레가 웃으며 말하니 어딘가 오싹한 느낌.
“비록 해골이지만……. 혼자서 신물을 전부 쓸어 담아주실 거예요.”
스미레가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해골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이시우는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어……, 그, 그래.”
* * *
수성전을 할 때 최고의 점령지라는 [수신의 강]은 전망이 트인 앞은 강물을 끼고 암벽을 등지며 성이 지어져 있었다.
쪼르륵.
에이미는 마나로 작동하는 커피포트로 찻물을 따라냈다.
“자. 여기. 얼그레이! 홍차도 원하면 나한테 말해.”
김은아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흰색 의자와 테이블에 앉은 채, 품위 있게 찻잔을 들었다.
홀짝.
얼그레이 차의 맛을 본 김은아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에이미에게 말했다.
“나 요새 드는 생각인데. 시험은 딱 적당히 하는 게 좋은 거 같아.”
“그러셔? 한~ 어느 정도?”
“점령지만 먹는 정도. 그래도 상위 10퍼 안에는 들 거 아냐.”
배고픈 새가 일찍 일어나 먹이를 찾고. 목이 마른 사슴이 먼저 강물을 찾는다.
하지만 김은아는 배가 고프지도 목이 마르지도 않았다. 이미 헌터로서 어느 정도 성장을 거둔 지금. 학교 성적 같은 게 김은아에게 중요할 리가 없었다.
일반 학생들에게 성적표는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하는 스펙이었지만 김은아에겐 어느 하나 해당되는 일이 없었다.
“하긴 은아 넌 이번 시험에서 뭘 하든 세븐넘버 정도는 거뜬하니까.”
“난 그냥 덤비는 애들만 잡을래. 아, 에이미 그 쿠키 좀 줘. 허닉스에서 만든 거.”
“커피 크림 든 거? 아님 초코칩?”
“초코칩으로.”
“난 다~ 이해해~ 우리한테는 파티장님이랑 있는데 학교 점수로 조바심 낼 필요는 없지!”
그렇게 말을 하며 시험 중에도 여유롭게 다과 타임을 즐기는 에이미와 김은아.
지켜보는 레니아는 상상도 못한 광경에 식은땀을 흘렸다.
‘무슨 시험 중에 티타임이냐고!?’
하지만 레니아는 순식간에 학생들을 박살내고 점령지를 얻어준 김은아에게 반박할 수 없었다.
점령지를 차지했으니 이대로 버티기만 해도 성적은 상위권. 레니아에겐 엄청난 기회였다.
레니아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엄청난 고민.
“레니아 넌 뭐로 먹을래?”
하지만 레니아의 고뇌는 에이미의 질문 한 번에 무너져 내렸다.
“나, 나는 홍차에! 허닉스 쿠키. 커피크림으로……”
“좋아! 그럼 나중에 조명탄에 불 좀 붙여줘!”
어느새 레니아는 김은아와 에이미처럼 같이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 * *
피유우우-! 화가가각!
마나로 불을 붙이자마자 피어오르는 붉은색의 연기.
“그 음침녀. 나한테 별걸 다 시키고 말이야.”
조명탄에 불을 붙인 주하진이 혼자서 투덜거리자. 릴리스의 이마에는 또 핏줄이 돋았다.
“네놈…… 주인님에게 경의를 표하지는 못할망정. 자꾸 ‘음침녀’라느니 무례한 호칭을 쓰는군.”
“너한테나 주인이겠지. 난 아니걸랑.”
주하진이 피식 비웃자. 릴리스는 굳었던 표정을 풀고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뭐, 열을 올릴 필요도 없겠지. 난 잘 알고 있거든. 너 같은 부류.”
주하진은 릴리스를 무시한 채 시큰둥한 얼굴로 그러셔~ 라고 대답했지만 릴리스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속삭였다.
“자존심만 높고. 강한 척하지만 실상은 아이에 불과한…… 그런 녀석들 말이야.”
릴리스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이건 스미레의 사역마가 아닌, 몽환의 성에 군림하던 서큐버스의 목소리였다.
“뭐, 뭐라고!?”
“난 서큐버스라고? 너 같은 녀석들을 얼마나 봤을 거라고 생각해? 정신을 무너트리기 위해서 공을 들일 필요도 없이.”
변한 릴리스의 분위기에 주하진은 압도되고 말았다. 꿀꺽- 침을 삼키며 릴리스를 바라보는 주하진.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져버리는……. 빈틈 투성이의 불량품. 우리들 먹이로는 최상이지.”
릴리스는 성큼성큼 주하진에게 다가오더니 서큐버스답게 검열되지 않은 날것의 말을 뱉어냈다.
“난 네 시선만 봐도 알 수 있어. 당장 ■■을 ■■■ ■■해서 ■■■■■ 하고 싶지? ■■■도 괜찮고 말이야. 아니면 ■■■■■■…….”
“뭐, 뭐, 뭔 소리여!!”
얼굴이 새빨개진 주하진이 놀란 얼굴로 외쳤지만 릴리스의 정신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서큐버스인 난 네 욕망이 보인다니까? 그런 마음이 추잡한 게 아니야. 본능은 원래 자연스러운 거라고.”
릴리스는 주하진을 위아래로 훑더니 풋- 하고 웃었다.
“당장 우리 주인님에게 강한 척하는 것만 봐도. 센 척 없이는 여자아이에게 말도 못 붙이는……. 뭐, 됐어. ■■을 ■■■해서 ■■■■■하고 싶어 하는 허세 덩어리 변태를 누가 좋아하겠어?”
“커컥! 켈록 켈록!!”
놀란 주하진은 헛기침을 하더니 비명처럼 소리쳤다.
“그런 생각한 적 없다고오! 아니, 없습니다. 그만 말해주세요!”
정말이지 완벽한 패배.
울상이 된 주하진이 항복선언을 하자 릴리스는 흐뭇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