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가온의 기말 평가 시험은 아카데미의 1년을 마무리하는 중요한 이벤트. 덕분에 기말 시험은 연례행사처럼 스케일이 커지곤 했다.
“……참 우리 학교지만 놀랍네. 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 거냐?”
이채현이 아득히 펼쳐진 바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빌린 대형 크루즈만 보아도 아카데미의 시험에서 사용할 자금의 규모가 아니었다.
이채현도 중소기업의 회장 딸로 태어나 나름 부유한 생활을 했지만 가온의 씀씀이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린 세상을 구할 인재잖아. 당연한 거지.”
반면 민성혁은 가온의 대우가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왜 우리가 헌터 강국으로 불리겠어. 다 이런 헌터들에 대한 인프라의 규모가 큰 덕…….”
“후……. 진짜 잘난 채 하는 거 못 봐주겠네.”
이채현이 쓰읍- 하는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리자. 멋쩍은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말을 멈추는 민성혁.
그때 이채현은 누군가를 발견했는지 얼굴이 밝아졌다.
“오~ 저기 온다. 우리 파트너님!”
멀리서 걸어오는 건 다름 아닌 신유성의 모습. 이채현은 종종 걸음으로 신유성에게 다가오더니 크~ 소리를 내며 엄지를 올렸다.
“나 방송 봤어. 영국이랑 붙는데 전투 진짜 쩔더라. 로렐라이인가. 그 정도 애는 손쉽게 패던데?”
“넌 말을 참……. 품위 없게…….”
민성혁이 민망한 얼굴로 눈치를 봤지만 신유성은 아무렇지 않게 악수를 했다.
‘……둘 다 S반 중에서도 성적이 높은 편이었지.’
물론 약체로 평가받던 이시우마저 국가대항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친 지금. S반의 인원 중에서 신유성의 파티원에 버금가는 학생은 없었다.
만약 사령술사인 스미레가 전력을 다한다면 혼자서 S반 전체를 상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단순히 학교생활을 한 학생들과 실전에서 경험을 쌓고 아티팩트를 얻은 학생들의 격차는 어마어마했다.
신유성은 그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는 1학년.
이채현은 흐뭇한 표정으로 신유성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신유성 정도의 급이라면 친해져서 나쁠 건 없지.’
이채현은 자신과 어울리는 ‘급’의 사람들에게만 옆자리를 허용했다. S반에서 민성혁과 어울리는 이유도 자신처럼 성적이 높고 배경이 그럴싸하기 때문.
이채현은 상대가 신유성이라면 친해질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 네 경기 보면서 느낀 게 많아~ 이번에 같이 시험을 치게 됐다고 하니까, 엄청 기쁘더라니까?”
이채현은 신유성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싱글싱글 웃으며 신유성을 올려다보는 이채현.
‘……저 녀석 또 시작이군.’
민성혁이 노골적이게 한숨을 쉬었지만 신유성을 향한 이채현의 어필은 멈추지 않았다.
“어, 여기…… 너 근데 넥타이 좀 풀려있다.”
스윽- 이채현은 신유성과 눈을 마주친 채로 손수 넥타이를 매주었다. 키 차이로, 발뒤꿈치를 살짝 드는 동작마저도 어딘가 능숙해보였다.
“고마워.”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짧은 대답을 제외하면 너무나도 담담한 신유성의 태도.
‘……근데 얘는 왜 이렇게 반응이 없어?’
지금까지 이채현이 만났던 남학생들의 대부분은 가까이서 눈웃음만 지어도. 눈에 하트가 뜨는 부류였다.
헌터를 지망하는 남학생들 대부분이 바쁜 수련으로 여자 경험이 적었기에 가능한 일.
반면 신유성은 자신이 직접 넥타이까지 매주었는데 반응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시험 끝나면 같이 식사라도 할래? 너무 데이트 같은가? ……성혁이랑 셋도 괜찮은데.”
이채현은 자신의 겨드랑이 사이에 신유성의 팔을 끼웠다. 지금까지 온갖 남학생들에게 OK사인을 따내어준 일종의 필살기.
“미안. 바빠서 그건 힘들겠는데?”
하지만 신유성은 이번에도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거절했다.
‘……이, 이 새끼, 고자 아냐?’
이제 오기 때문이라도 이채현은 물러서기 힘들어진 상황.
그때.
톡-!
“악!”
조약돌만한 마나를 뒤통수에 맞은 이채현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고개를 뒤로 돌리자 보인 건,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김은아의 얼굴.
“야, 뭐하냐. 남의 파티장한테.”
하-!
이채현은 코웃음을 치더니 지지않고 김은아에게 빈정거렸다.
“왜 파티가 아니면 친해지지도 못해? 나도 이번 시험까진 파트너야. 그리고 남이야 뭘 하든?”
이채현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김은아는 다시- 검지에 마나를 모았다.
퉁! 팍!
그리곤 딱밤으로 마나탄을 날려 이채현의 이마를 맞췄다.
“악! 아니 저 미친년이!”
화가 난 이채현이 이마에 핏줄까지 드러내며 소리치자. 김은아는 남아 있는 음료수를 입안에 탈탈- 털어 넣더니 반대편 손으로 이채현에게 중지를 올렸다.
“어설프게 꼬리치지 마. 유성이가 네 얼굴로 넘어가겠냐? 차라리 거울을 보고 말지.”
그리곤 눈을 가늘게 뜨는 김은아.
김은아는 파티원들과 있을 때 보여주는 유한 모습과 달리. 오랜만에 예전의 사나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 얼굴이 어때서! 그리고 내가 신유성이랑 말하는 중에 사사건건 참견이야!?”
이채현이 인상을 쓰며 노려보자. 김은아는 턱- 말문이 막혔다.
“그, 그건…….”
“시간이 남을 땐 신유성이 나한테 시간 좀 내줄 수도 있는 거 아냐?”
그렇게 말을 하며 이채현이 신유성을 바라보자. 신유성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채현도 같은 가온 아카데미의 학생. 바쁘지 않다면 신유성도 조금은 시간을 내줄 수 있었다.
“그럼…….”
신유성이 무언가를 말하려하자. 위기를 직감한 김은아는 재빠르게 소리를 쳤다.
“유, 유성이는 바빠!”
소란이 커지자 점점 모이는 주변의 시선들. 수군거림 중에는 분명 신유성과 김은아의 관계를 의심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은아가 보여주는 애매한 태도는 확실히 의심을 살 여지가 많았다.
그리고 그런 김은아의 모습에 예리하게 반응한 건 다름 아닌 이채현.
“흐응~ 아아~ 알겠다~”
이채현은 갑자기 한결 풀어진 얼굴로 김은아의 얼굴을 보며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김은아. 너 귀여운 구석이 있네? 설마 내가 좀 붙어 있었다고. 질ㅌ…….”
번쩍!
김은아가 선반을 박차며 일어난 섬광. 어느새 둘의 모습은 크루즈에서 사라져있었다.
민성혁은 그제야 신유성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 학생회장님까지 너에게 관심을 보인 걸 보면 말이지……. 참. 넌 이래저래 인기가 많군.”
민성혁은 신유성과 신하윤이 같은 신오가문의 출신이라는 걸 몰랐다. 그러니 어찌 보면 민성혁의 반응은 당연했다.
민성혁도 헌터부의 부원이지만 신하윤이 직접 관심을 보인 건 신유성이 처음이었으니까.
“학생회장의 이야기라면. 하고 싶지 않아.”
그러나 이번에는 신유성이 먼저 이야기를 끊어버렸다. 민성혁은 한 동안 먼 곳의 바다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학생회장님한테는 날을 세우지 않는 게 좋아.”
민성혁은 다시 한숨을 쉰 후에야 말을 이었다.
“신유성. 널 무시하는 게 아니야. 넌 강하고, 전 세계가 주목하는 유망주지만. 그분한테는 네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어…….”
이건 민성혁이 신유성을 위해서 하는 말이었다. 헌터부의 단원들은 신하윤의 강함이 무서운 게 아니었다.
이혁을 제외하면 신하윤이 숨겨 놓은 ‘진짜 힘’을 구경조차 못한 단원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고등학생이라곤 믿기 힘든 신하윤의 수완. 그리고 카리스마였다.
자신을 거역한다면.
자신에게 반기를 든다면.
신하윤은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언젠가는 날카롭게 준비한 발톱을 환하게 미소 지으며 들이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괜히 네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잖아?”
민성혁의 신유성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신하윤.’
신오가문의 정식 후계자.
염동력이라는 현실 조작 특성을 가진 헌터. 그리고 자신의 누나.
동생인 신유성조차 신하윤이 가진 비밀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어떻게 그때 그 어린 나이로.
어른들을 상대로 자신의 뛰어난 실력을 숨겼었는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든 것 이 베일 안에 감추어져 있었다.
‘……신오가문.’
하지만 생각을 거듭해도 머리만이 복잡해질 뿐. 신하윤이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다가오는 이상, 신유성도 신하윤과 신오가문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 * *
마치 영화를 보듯.
아델라의 정신은 관찰자가 되어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추워…….]
눈앞에 보이는 건 곰 인형을 껴안고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 5살의 자신.
[……배고파.]
아델라에게 어린 시절 볼테라에서 겪었던 기억은 지옥이었다.
춥고.
배고프고.
무엇보다.
[엄마…… 아빠…… 보고 싶어.]
외로운 기억.
[……왜 나만 두고 떠났어?]
왜 어렸던 자신을 두고 부모님들은 루이스를 향해 떠나야 했는지, 5살의 자신은 이해하지 못했다.
아델라는 하루가 다르게.
[미워.]
달라졌다.
[괴로워…….]
마음속에 품고 있던 온기는 빠르게 식었고. 밝은 빛을 품고 있던 아델라의 내면을 시커먼 회색의 빛이 잠식했다.
자신의 내면을 죽이지 않고선 5살의 아이는 절대 살아갈 수 없는 척박한 곳. 마녀 루이스가 나타난 볼테라는 그런 곳이었다.
그렇게 3달.
아델라는 더 이상 아빠가 보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어머니의 스프가 먹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좀처럼 차갑게 식은 마음은 따뜻해지지 않았다.
화면이 넘어가듯 변해가는 장면.
아델라의 눈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이 보였다.
[아델라. 금방 돌아올게 알았지?]
아버지.
[딱, 3일만. 3일만 혼자서 기다리는 거야. 응?]
어머니.
[미안하다. 정말, 정말로…….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꿈속의 풍경을 바라보며 아델라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 가지 마…….
말은 뱉어지지 않았다.
그저 입안에 머물렀다.
차라리 옆에 있어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두 사람은 손을 펼쳤다.
사아아-!
집을 감싸는 푸른빛의 결계를 보며. 아델라는 질끈 눈을 감았다. 3달의 지옥 같았던 시간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기분이었다.
팟!
“으흑! 흑! 헉…….”
꿈에서 깨어난 아델라가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이 있는 곳은 기숙사의 침대. 더 이상 지옥 같았던 볼테라가 아니었다.
‘……꿈이었나.’
저벅. 저벅.
한숨을 쉰 아델라가 욕실을 향해 힘없이 걸었다. 온몸에 흐르고 있는 식은땀은 아델라가 겪었던 끔찍한 꿈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주었다.
스윽. 슥-
입고 있던 잠옷을 아무렇게나 한 꺼풀 한 꺼풀 벗어나가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델라의 몸이 드러났다.
더 이상 아델라는 5살의 자신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옥 같았던 기억에서 멀어지는 게 옳았다.
‘하지만 왜…….’
시간이 지날수록 그때의 기억은 더욱 자신을 옭아매는 것일까.
솨아아아아-
아델라는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그 사람을 만나.
서로 부딪히며.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다고.
이런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선 무엇이 됐든 의지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