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승리 - 가온 아카데미]
스크린에 떠오른 글자.
경기를 진행하던 시계탑은 정적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홈그라운드에서 타국이 이겼고, 영국 팀의 패배라서가 아니었다.
영국의 희망.
시계탑의 오라클.
마녀 아리스의 제자.
주변 사람들의 기대는 본의 아니게 너무 많은 짐을 17살 소녀에게 지웠다.
노력을 했지만 패배했다는 사실에 슬퍼하는 게 아닌, 주변의 기대를 배신했다는 생각에 괴로워한 로렐라이.
그러나 그런 로렐라이를 위로해준 건 다름 아닌 상대팀인 신유성이었다. 좀처럼 입을 열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우승팀의 파티장. 신유성 학생이 포탈에서 나왔습니다!”
김은아를 제외한 신유성과 이시우.
로렐라이를 비롯해 세바스찬과 안젤라가 시계탑의 중앙으로 걸어 나오자. 사람들에게선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영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각국의 응원들. 벨로체는 한숨을 뱉어냈다.
‘이건, 정말 완벽하게 ……졌군. 진병철이 교장인 가온에서 어떻게 저런 인성의 아이가…….’
벨로체에겐 미스터리 중의 미스터리. 객석의 진병철은 소리 내어 웃으며 환호하고 있었다.
“역시! 유성이야! 뭐? 홈그라운드? 어디에서 붙든 다~ 우리 한국의 승리다!”
벨로체는 기뻐하는 진병철을 꼽게 바라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실력으로 보나 다른 부분을 보나 이건 영국의 패배.
벨로체는 힘이 빠진 얼굴로 씁쓸하게 웃는 로렐라이가 보였다.
‘우리의 기대가…… 이제야 아카데미에 입학한 어린 학생에게 너무 큰 짐을 지워버린 걸지도 모르겠군.’
어쩌면 이번 패배가 로렐라이에겐 성장의 거름이 될지도 모르는 일. 벨로체는 로렐라이처럼 쓰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 * *
밖에서 들려오는 함성은 대기실까지 이어졌다.
“오예! 유성이가 이겨써!”
오르카의 입속에서 눈을 빛내는 어려진 김은아.
“정말이에요! 유성 씨가-! 저희가 이긴 거예요!”
스미레는 오르카를 껴안고 제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국가대항전이 3차전까지 확정이 된 상황. 정말 대항전의 우승까지도 멀지 않았다.
둥가- 둥가-
스미레가 들고 뛴 덕분인지 오르카 속에 있던 김은아는 우으으- 하고 어지러움에 질색을 했다.
“으, 어지러…… 슈미레. 뛰지 마.”
“헉, 죄, 죄송합니다.”
“아냐 갠차나. 유성이 보러 가쟈!”
“네! 좋아요!”
“오예!”
어려진 김은아를 보며 스미레는 헤실헤실 웃었다. 아카데미의 열등생이었던 자신이 이젠 전국에서 가장 주목하는 파티의 일원이었다.
모든 게 꿈만 같은 상황.
‘빨리 유성 씨가 보고 싶어.’
스미레는 배시시 웃으며 오르카를 안고 대기실의 밖으로 걸어 나갔다.
* * *
신유성을 비롯한 한국의 승리.
가온 아카데미는 문자 그대로 뒤엎어졌다.
“미쳤다! 벌써! 준결승이야!”
“지, 진짜 유성이는…… 아니! 한국 팀은! 신이다!”
“이제 무슨 경기만 남았지? 마지막까지 한 경기 아냐?”
“그럼 유럽 쪽 국가들 엄청 살아있던데 역시 상대는 그쪽?”
“모르지. 중국일지도.”
학생들은 책상에 걸터앉아 스크린을 보며 시끄럽게 떠들었고, 학생들의 들뜬 분위기는 1학년 전체에 퍼져 있었다.
특히 S반은 누구를 응원하냐는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이제 한국이 아델라랑 붙는 거?”
“진짜 볼만하겠네.”
“야, 성혁아 근데 아델라는 전 반장이고, 신유성은 우리 학굔데 누구 응원하냐?”
“이채현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솔직히, 김은아 잰척하는 건 꼴 보기 싫긴 한데. 당연히 신유성 아님? 일단 잘생겼잖아.”
“아니 잘생긴 게 뭔 상관이야.”
“응~ 상관 많아~”
손가락으로 민성혁의 안경을 흉내내며 놀리는 이채현. 인상을 찌푸리는 민성혁. 둘의 열띤 토론은 학생들을 끼어들게 만들었다.
“내 생각도 유성이 쪽이지. 아무리 아델라가 이전에 반장이라도. 신유성이 지면 한국이 이탈리아한테 지는 거잖아. 같은 나라 응원하는 게 맞지 않냐?”
한 남학생이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하자. 여학생들 중 아델라를 따르던 몇몇은 쯧- 하고 불편한 기색을 내비췄다.
“와~ 국가급 의리~ 눈물겹다~ 아델라가 A반이랑 붙을 때 멱살 잡고 이겨준 건 다 잊었지?”
“맞아. 몇 십이라도 SP 챙겨준 게 어제 같은데. 신유성이랑 일면식도 없으면서 아델라한테 등 돌려 버리네~”
여학생들의 매도에 이야기를 꺼낸 남학생은 억울한 표정으로 외쳤다.
“아니 그럼 아델라 응원하던지!”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떻게 타국한테 지라고 하냐?”
여학생이 으- 하고 얼굴을 찡그리자. 남학생은 정색을 했다.
“이게 장난치나.”
“장난 맞음. 너라서 놀린 거야.”
“진짜 넌 뒤졌다.”
“존나 느리면서. 잡아보던가.”
갑자기 술래잡기를 시작하는 S반의 두 학생. 그 광경을 보던 소해정 교수는 소해정은 이마를 짚었다.
‘개판이군. 그래도 역사적인 날이니 오늘 하루는…….’
소해정이 한숨을 쉬며 인자한 마음을 가지려고 할 때, 한 학생이 창문으로 운동장을 가리켰다.
“야! 저거 봐! F반 미쳤다!”
“뭐야 저거? 폭탄? 화약?”
폭탄. 화약.
학교에선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단어들의 나열에 소해정은 후다닥 창문으로 다가섰다.
“뭐라고!?”
운동장에서 보이는 건 손을 흔들고 있는 레니아의 모습. 레니아는 숨을 흡- 하고 모으더니 크게 소리 질렀다.
“얘드라아! 시자악! 한다아아-!”
시작하긴 대체 뭘 시작한다는 걸까.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소해정이 다급하게 눈을 굴리자. 발견된 건 무언가가 가득 담긴 박스였다.
레니아는 눈을 번뜩이더니 무서운 표정으로 손을 박스에 집어넣었다.
슥! 슥슥-!
그 다음 레니아가 꺼낸 건, 다름 아닌 폭죽.
“아니! 저게 무슨! 야! 안 멈춰!?”
항상 지적인 모습을 보여준 소해정조차 놀란 얼굴로 일갈했지만 레니아는 이미 버튼이 켜진 듯 보였다.
“흐, 흐흐 폭죽! 불이다! 불!”
픗-! 프브브븟-! 쌔히잉-!
레니아가 불을 붙인 폭죽을 잡고 흔들자. 매서운 속도로 터져나가는 불꽃. 소해정은 상상도 못한 광경에 육두문자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아니 저 미친년이!”
“야하! 터진다! 터져! 불이야!”
레니아는 꺄르르- 웃음을 흘리며 운동장을 누볐다.
거기다 다른 반의 학생들까지 운동장에 합류하며 가온 아카데미는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
언제 찾아왔는지 린샤오는 고개를 저으며 소해정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개판이군요.”
* * *
신성그룹 일가는 어지간한 일로는 체통을 위해 기뻐하는 티도 내지 않았다. 마치 현대의 귀족.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꺄악! 이겼다! 정말~ 우리 은아가 고생한 보람이 있네! 신유성 학생이 해낼 줄 알았다니까?”
어머니인 김윤하는 옆사람을 손바닥으로 치며 기뻐했고. 회장 김석한은 어느 때보다 인자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허허허! 귀여운 우리 은아! 저 쪼그마한 것을 어쩌면 좋겠어? 이수현 비서! 어서 은아를 데려오게!”
우승은 뒷전인 채, 작아진 김은아의 모습에 녹아내린 김석한.
“네! 알겠습니다. 본국에 귀환하시는 대로…….”
이수현이 칼같이 대답하자.
김준혁은 김은아의 오빠로서 빙긋 웃었다.
“은아가 파티장을 정말 잘 만났네요. 마음도 따뜻한 학생인 거 같고.”
“그렇지? 내가 직접 봤는데 제법 괜찮다니까~ 저번에 연회장에 왔을 때도…….”
김윤하까지 거기에 합세하자. 김석한은 크흠- 하고 불편한 티를 냈다.
하지만 웬일인지 김석한의 기색에도 신경을 써주지 않는 가족들.
‘아주. 다들 그 녀석 이야기구만. 은아도 집에 올 때면 꼭 그 녀석 이야기를 하고 말이야…….’
애지중지한 손녀딸에게 자신보다 가까운 사람이 생긴 것에 서운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
김석한은 한숨을 쉬었다.
‘뭐, 그래도 표정은 밝아진 거 같으니…….’
* * *
도심 속 밝은 분위기의 카페.
원래라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로 시끄러워야 했을 공간이지만 오늘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내가 통째로 빌렸다네.”
아덴은 의자에 앉은 상대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자네는 시끄러운 걸 싫어하지 않는가. 하하! 내가 또 이런 건, 잘 기억하지.”
이야기의 상대는 검은색 베일이 둘러진 갓을 벗었다.
초췌해 보이는 눈과 관리가 안 된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채였지만 드러난 건 인상을 쓴 미녀의 얼굴.
“……잡설은 필요 없다. 난 바쁜 몸이야.”
“친구끼리. 너무 까칠하게 굴진 말게.”
아덴은 사람 좋게 웃더니 변해버린 검신의 몸을 훑어보았다.
“그나저나, 나도 자네를 대하는 게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말이야. 보다보니 그 몸도 이젠 익숙해져 보이는군.”
아덴은 썩어 들어가는 검신의 표정은 보지도 않은 채, 눈치도 없이 손뼉을 짝- 하고 마주쳤다.
“생각해보니 젊어졌고 예뻐졌으니 저주는 아니지 않은가? 자네와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해!”
스릉.
검신은 카페에서 검을 쥔 채, 뽑으려고 했다. 손아래에서 빛나는 은색의 검날.
검신의 역린을 건드리고 아직도 아덴의 머리가 붙어 있을 수 있는 건, 그가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말장난을 하면 죽이겠다는 검신의 기세.
“자, 장난일세! 크흠! 사실 오늘 자네를 부른 이유는.”
기세에 눌린 아덴은 헛기침을 하며 본론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