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밟고 있던 지반이 무너지며 추락하는 로렐라이.
일렁!
금빛의 파도가 로렐라이를 감싸 안았지만 충격을 모두 흡수하진 못했다. 자신의 결계가 파훼됐다는 당혹감에 마나 컨트롤을 실수한 것이다.
쿠웅-!
땅과 부딪치며 몰려오는 발목의 저릿한 고통.
“윽…….”
로렐라이는 고통에 찔끔 눈을 감았지만 크로노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 마나 공명이라, 제대로 당했군요. 제 권능을 발현하는 매개체는 어디까지나 당신의 마나니까요.
신유성을 상대로 결계 스킬을 펼친 게 문제였다. 결계란 마나를 부품으로 삼은 정교한 기계장치. 조그마한 문제만으로도 금방 고장 나고 만다.
“그렇지만 마, 마나 공명은…….”
이런 커다란 결계에선 마나 공명은 원래 자연적 발생이 불가능하다. 재료로 무려 편린의 진명과 로렐라이가 가진 반절이 들어간 스킬.
거기다 10일이라는 수명을 더했다.
국가대항전의 우승을 위해서라면 아깝지 않았으니까. 근데 그 계획들이 단 한 번의 마나공명으로 분쇄되어 버렸다.
- 운이 아닙니다. 의도겠죠. 하지만…….
크로노아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로렐라이의 머릿속에 말을 걸었다.
- 제 권능과 신력을 사용한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로렐라이가 인상을 쓰며 팔을 휘둘렀다. 금빛의 파도가 몰아쳤지만 신유성은 손등으로 가볍게 쳐냈다.
“통하지……. 않아.”
절망에 찬 얼굴로 중얼거리는 로렐라이. 방금 전의 결계에 너무 마나를 소모한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로렐라이는 신유성을 떨쳐내기 위해 억지로 마나를 짜냈다.
“치천의 날개!”
펄럭!
로렐라이의 등에 화려한 12장의 금빛날개가 펼쳐졌다.
화악!
이내 날개의 깃털은 금빛의 탄환으로 변해 신유성을 향해 쏘아졌다. 깃털 하나하나가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고 위력의 스킬.
월영보법(月影步法)
그러나.
일렁.
잔해를 남기며 신유성의 몸이 사라졌다. 겁에 질려 아무렇게나 쏜 로렐라이의 공격이 신유성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 로렐라이 다시 말하지만. 제 권능과 신력을 사용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마나가 아닌, 신력은 마나공명으로도 풀지 못하니까요.
신력을 구현한다는 건, 결계에 필요한 능력을 빌리는 것과 단위가 달랐다. 그야말로 자신의 수명을 제물삼아 여신 크로노아의 힘을 현세에 구현하는 것. 로렐라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대, 가는…….”
여신 크로노아는 로렐라이에게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 ……50년에서 60년 정도의 수명이 되겠군요. 선택은 로렐라이. 당신의 것입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답니다.
로렐라이는 울컥 입술을 깨물며 힘을 끌어올렸다. 금빛의 섬광이 주변을 감쌌고, 신유성에게 쇄도했다.
“난, 난…….”
정말 이기고 싶다.
그 마음은 거짓이 아니다.
이건 나를 택해준 아리스님이 원하시는 승리. 영국의 기대가 어깨에 걸려 있었고, 지금까지 자신을 응원한 모든 이들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승리를 위해서 바쳐야 하는 건 60년의 수명.
방금 전, 로렐라이가 바쳤던 10일과는 무게가 달랐다.
“싫어……. 지고 싶지 않아…….”
로렐라이는 금빛을 빚어 무기들을 투영하더니 마구 잡이로 난사했다.
강하지 않은.
자신의 가치는 대체 무엇일까?
누군가 로렐라이를 설명할 때는 언제나 수식어가 붙었다.
마녀의 제자.
영국의 희망.
시계탑의 오라클.
로렐라이는 패배를 한, 모두의 기대를 배신한 자신을 상상했다.
하지만 역시 떠오르지 않았다.
로렐라이에게 붙은 수식어는 걸어온 길의 증명이고. 목표이자 이유. 로렐라이의 전부였다.
- 다시 말하지만. 정말, 그게 당신의 전부라면. 모두 놓아버릴 수 있다면 로렐라이. 제 손을 잡으세요.
- 딱 50년. 50년의 수명이면 당신에게 승리를 안겨드리지요.
그런데 왜 자신은 쥐고 있던 걸 놓지 못하는 걸까.
- 강요는 하지 않아요.
멈춘 시간.
흑백의 세계에서 크로노아는 로렐라이에게 속삭였다.
- 하지만 로렐라이……. 당신도 저처럼 이루고 싶은 게 있는 것 아니었나요?
이기고 싶다.
스승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 스승님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다.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
로렐라이의 목표는 17살의 소녀에 어울리는 순수한 목표였다.
- 전 알고 있답니다. 당신을 얽매이게 만든 사건과 시간이 있다는 걸. 당신은 제 편린을 이어 받았으니까요.
- 당신은 저를 무척이나 닮았죠.
크로노아는 자신과 로렐라이가 닮았다고 말했다.
- 제가 그 사람을 위해 전부 내려 놓을 수 있었듯이. 분명 로렐라이 당신도…….
여신의 달콤한 목소리.
- ……그럴 수 있겠죠?
이제 선택의 순간이라는 듯이 다시 시간이 흘렀다. 승리를 위해 대가를 치룰 순간.
[……제자를 둔다면 역시 네가 갖고 싶구나.]
로렐라이의 머릿속에서 말들이 흩어졌다.
[로렐라이 님은 대단하세요! 벌써 6급이라니!]
모두가 자신에게 기대하고 있다.
[저도 시계탑의 교장으로서 로렐라이양의 활약이 무척 기대되는군요. 이번 대항전이 끝나면 분명 전 세계는 영국을 다시 보게 되겠죠.]
로렐라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못, 하겠어…….”
로렐라이의 마지막 말과 함께.
파앙! 와장창!
유리조각처럼 부서지는 배리어.
[배리어가 모두 파괴되셨습니다.]
[남은 배리어 0%]
[경기의 진행을 종료합니다.]
주먹과 함께 불어온 돌풍이 로렐라이의 머리카락을 뒤로 흩날렸다.
[승자 팀…….]
홀로그램의 메시지는 두 팀의 승패를 못 박았지만 고개를 숙인 로렐라이는 볼 수 없었다.
“나는, 아리스님의, 제자인데…… 졌어…… 모두, 믿어줬는데…….”
신유성은 그런 로렐라이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권왕과 무신산에서 함께 했던 시간들. 기대에 부응 하는 게 기쁜 일이라는 것 정도는 신유성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목표가 아니다. 곧 상처받고 지치고 만다.
그건 자신의 목표가 아닌, 타인의 목표니까.
“넌 강해. 로렐라이.”
신유성의 말은 진심이었다.
만약 히든 스테이지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마나공명을 깨닫지 못했다면 둘의 승패는 예측할 수 없었다.
신유성과 로렐라이의 승패를 가른 건 종이 한 장의 차이.
“……그래도 전, 졌어요. 분명 다들 실망하실…… 거예요.”
눈시울이 붉어진 로렐라이가 중얼거리자. 신유성은 로렐라이와 시선을 맞췄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잖아.”
혼자 짊어지기엔 처음부터 무거운 짐이었다. 그 무거운 무게를 로렐라이가 아니었다면 누가 버틸 수 있었을까. 고독한 시련을 통과하고, 크로노아의 인정을 받아 여기까지 도착한 건. 모두 로렐라이의 몫이었다.
5살.
신유성은 그 어린 나이에 특성이라는 결과만으로 급이 나뉘고 가족에게 배척당했다.
그렇기에 결과만으로 상대를 탓하는 짓은 절대 할 수 없었다.
“만약 네가 너를 응원했다면.”
오히려 같은 아픔을 가졌기에 누구보다 진심으로 상대를 응원해줄 수 있었다.
“넌 여전히 내 자랑일 거야.”
로렐라이를 내려다보며 옅게 웃어주는 신유성. 역시 신유성은 로렐라이가 상상했던 왕자님 그대로였다.
자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도 따뜻함이 묻어나오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신유성은.
‘정말로…….’
그 아름다운 미소에 로렐라이는 울던 것도 잊은 채 자신도 모르게 따라 미소를 짓고 말았다.
‘……잘생겼어.’
경기장이었던 세상은 새하얗게 점멸했고. 부서졌다. 자신의 몸이 홀로그램으로 변해 휘날렸지만 로렐라이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