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헌터들은 다른 존재의 힘을 흡수하거나 계승하는 걸 편린이라고 부르지만 그건 편리를 위해 모두를 묶었을 뿐, 편린에 속한 힘은 제 각각 다르다.
힘의 주체가 스미레의 경우처럼 보스몹이었던 마녀인 경우도 있었고, 탑에 봉인 되어버린 헌터인 경우도 있었으며, 일반적으론 상상도 못할 존재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로렐라이가 얻은 편린은 그중에서도 단연 손에 꼽혔다.
- 저는 크로노아,
- 시간을 관장하는 여신으로서 당신을 신도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크로노아와의 첫 만남은.
시련을 진행하던 결계 속이었다.
어떻게 보면 운명이었고.
어떻게 보면 필연이었다.
로렐라이는 헌터들 최초로 [시간의 관리자]라는 특성을 가지게 된 헌터. 크로노아는 일찍이 로렐라이를 탐냈다.
로렐라이의 잠재력을 알아본 최강의 스승. 마녀 아리스.
기꺼이 로렐라이에게 자신의 편린을 넘겨준 시간의 여신. 크로노아.
로렐라이가 강해지는 건 어렵지 않았다.
- 정신이 피폐해진 인간은 이 정도 결계로도 정신이 붕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신은 예외지만요.
시련에 도전한 로렐라이가 정보의 파도 속에서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크로노아의 도움이 제법 컸다.
- 당신 같은 철저한 사람이 동화책을 좋아한다는 건, 재밌는 사실이네요. 물론 책의 내용은 여신인 저도 재밌지만요.
- 여신들은 운명을 믿지 않는답니다. 그럼 과연 운명적인 사랑도 없을까요?
특별한 능력이나 일은 아니었다.
시련에 도전한다는 건 지식을 부유하고 떠다니는 외로운 방랑자가 된다는 것. 간간히 들리는 크로노아의 목소리는 로렐라이에게 큰 위로가 됐다.
그리고 드디어 로렐라이가 지식을 절반 가까이 흡수 했을 때 크로노아는 물었다.
- 그거 알고 있나요 로렐라이? 편린의 힘은 주인을 닮은 자를 계승자로 선택한답니다.
- 제가 당신을 고른 것조차. 실은 거대한 운명의 일부라는 이야기죠.
그런 어려운 이야기는 몰라.
로렐라이는 마음속으로 생각했지만 입으론 내뱉지 않았다. 부정하고 싶지만 실은 그녀가 말하는 모든 지식은 이미 알고 있었다.
로렐라이가 크로노아의 편린을 흡수했다는 건. 로렐라이와 크로노아가 닮았다는 이야기.
로렐라이는 좀처럼 자신과 크로노아의 닮은 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크로노아는 생각이 달라보였다.
- 로렐라이? 편린이 주인을 찾듯. 특성도 주인을 고릅니다. 시간의 관리자는 가장 시간에 얽매이는 존재입니다.
- 아, ……정확히는 ‘지나간 시간’이겠군요.
- 그래서 누구보다 후회하고 누구보다 비탄하고. 바로 잡고 싶은 시간이 있는 자에게 [시간의 관리자]라는 특성이 찾아가는 겁니다.
로렐라이는 책을 읽는 걸 멈추었다.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크로노아는 그런 로렐라이에게 다시 청아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 여신인 제가 얽매인 ‘지나간 시간’이 무엇일지 궁금하지 않나요?
여신이 후회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그녀를 지나간 시간에 얽매이도록 만들었을까. 처음에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독의 시간들은.
크로노아와 말을 나눴던 시간들은 로렐라이에게 꾹 닫혔던 입을 열도록 만들었다.
“……궁금해요.”
적어도 지식을 탐구할 때의 로렐라이는 놀랍게도 공손하다. 그건 크로노아가 귀여워하는 로렐라이의 모습 중 하나였다.
- 전 약속을 어겼기에.
- 소중한 걸 잃었고.
- 적어도 그 기억만이라도 보존하기 위해 이렇게 조각난 파편이 되어 다른 시간의 다른 차원을 해매이기를 택했습니다.
크로노아의 이야기인줄은 모르겠지만 로렐라이도 비슷한 이야기를 책에서 본 적은 있었다.
인간과 금단의 사랑에 빠진 여신.
결국 노여워한 주신에게 인간은 죽임 당했고, 여신은 인간을 별자리로 만들었다는 그런 흔한 신화 속 이야기.
‘비슷한 이야기겠지.’
하고 로렐라이가 생각한 순간, 이번에는 크로노아가 물었다.
- 그럼 로렐라이 당신이 시간의 관리자가 된 이유는 뭘까요? 억겁의 시간을 산 저도……. 당신이 얽매이게 된 ‘지나간 시간’이 뭔지는 정말 궁금하답니다.
“나의 ……지나간 시간?”
내가 얽매이는 시간이 무얼까?
그건 대체 어떤 순간일까.
로렐라이가 멍한 눈으로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크로노아는 말했다.
- ……이제야 알겠군요. 당신을 얽매이게 만든 시간, 당신을 사로잡은 순간은…….
소리가 멀어졌다.
심해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공간. 서서히 멀어졌던 불빛이 다가오며 자신을 비추자, 로렐라이는 익숙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너는 터지지 않은 거대한 폭탄처럼 위험하지만. 동시에 세상을 구원 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단다.]
[네 재능이 어떻게 쓰일지는 나도 알 수 없겠지.]
[내가 장담 할 수 있는 건 무엇도 없어. 책임감이 강하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난…….]
소리가 다시 멀어진다.
시계탑의 시련이란 이런 걸까?
온 몸에 힘이 빠지며 심해를 부유하는 감각 속에서 로렐라이는 어떻게든 허공을 움켜쥐었다.
[……제자를 둔다면 역시 네가 갖고 싶구나.]
아.
이렇게나 강하고.
이렇게나 멋진 사람이.
나를 원하고 있어.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자신이 얽매인 순간이 무엇인지.
로렐라이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 ……상대방의 기대에 보답하고 싶다니. 정말 어린 아이 같은 생각이군요.
책망하는 말과 달리 자상한 크로노아의 목소리.
결계가 부서졌고.
금빛의 책들이 흩날렸고.
금빛의 지식이 흩날렸다.
로렐라이는 그제야 시련을 통과하기 위한 마지막 조각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그렇게나 지식을 탐냈으면서. 자신에 대한 것도. 나는 모르고 있었구나.’
그렇게 시련을 통과했다.
끝내 찾지 못했던 마지막 조각을 찾았으니까.
타닥. 타닥.
모닥불이 타는 소리.
로렐라이는 간절하게 허공을 붙잡았던 그때처럼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주어진 시간은 10분.’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이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모든 노력을 증명하는 순간.
로렐라이는 감았던 눈을 뜨며 쥐었던 손을 폈다.
“Χρόνοα.”
시간의 여신. 크로노아의 진명.
10일의 수명을 바친 10분을 위해.
로렐라이의 손에선 압축 됐던 금빛의 파동이 터져 나왔다.
화아아악!
모닥불의 소리가 번져간다.
세상을 뒤덮을 듯 커져가며 금빛의 불꽃이 로렐라이의 주변을 계속해서 잠식했다.
번져나가는 불꽃.
변해가는 풍경.
데에에엥-!
어디선가 거대한 괘종시계 소리가 들여왔고.
째깍! 째깍! 째깍! 째각!
수백, 수천 개의 셀 수 없는 초침 소리가 주변을 뒤덮었다. 이게 바로 여신의 힘을 빌려 로렐라이가 펼치는 결계.
쿠구궁-! 쿵! 쩌억!
평범했던 시계탑의 바닥은 균열이 가더니 로렐라이와 함께 치솟았다.
어느새 지어진 여신의 성전.
하늘에 떠 있는 금빛의 상징.
마나로 작열하는 여신의 빛은 밤의 조각을 단 한 점도 남기지 않았다.
로렐라이는 금빛으로 잠식되어가는 세상을 내려다보며 씁쓸한 목소리로 신유성에게 말을 걸었다.
“……저는 헌터들의 상식을 깨부수고. 그들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레귤러.”
여신의 빛은 세상을 멈춘다.
정확히는 아주 느리게 흐르도록 만든다. 1초를. 100분의 1로. 10000분의 1로. 바위를 모래로 만들 듯이 잘게 쪼갠다.
풍화된 시간 속에서 자유로운 건 오직 결계를 펼친 로렐라이 뿐.
“당신 같은 무투가들에겐 반칙과도 같은 존재……. 상대가 나빴군요.”
로렐라이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가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는 건, 자만이 아니었다. 지금 사용한 여신의 힘은 편린 중에서도 최상격. 시전자인 로렐라이조차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신유성이 강해도.
설령 자신보다 강하더라도.
이런 논외의 힘은 막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드는 과정은 아니지만 나에겐……. 나를 선택해준……, 스승님이 있어.’
로렐라이의 어깨에는 마녀 아리스의 믿음이. 영국의 희망이 걸려 있었다. 로렐라이는 모두의 기대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변해가는 세상에서 신유성은 가만히 로렐라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후회는 없었다.
메르헨 속, 왕자님을 기다리는 공주는 되지 못하겠지만 나라를 구원할 성녀를 택했으니까.
이거면 된 거라고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신유성의 눈은 로렐라이를 올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어떤 패배의 기색도 없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금빛의 파도에도 담담하게 자세를 잡았다.
‘운명이라.’
신유성은 생각했다.
지금의 자신 자신을 이루고 있는 어떤 조각만 빠져도. 이 위기는 극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과정들을 모두 겪고, 로렐라이를 만나게 된 건, 어쩌면 정말 운명일지도 몰랐다.
헌터계의 이단.
모두의 상식을 파괴하는 이레귤러.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12년의 수련.
무신산에서 신유성이 겪었던 경험은 감각을 극대화 시켰다. 신유성은 몸 안에서 엄청난 속도로 마나를 순환시켰다.
탑의 히든 스테이지.
시간의 방을 통과하고 얻은 초감각 각성. 금빛 파동은 신유성에게 닿기 전에 멈추었다.
유한했던 시간은. 이제 무한했다.
신유성은 천천히 자신의 감각을 짚으며 손끝으로 마나를 만들어냈다.
로렐라이의 결계는 난생 처음 느끼는 종류의 마나에 엄청난 규모였지만 상관없었다.
마나의 흐름이란.
강물의 흐름처럼.
한 방향을 타고 흐른다.
대세를 거스르지 않고,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결국 이렇게 큰 규모의 결계라도 마나의 길목이 좁아지는 곳은 존재했다.
신유성이 할 일은 그 길목과 같은 양의 마나를 정확한 장소에 흘려주는 것.
오히려 거대한 결계는 신유성에게 빈틈이 많은 느릿한 초식동물을 상대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나도 너와 같아.’
이번 경기가 로렐라이에게 증명할 순간이듯이 신유성에게도 이번 경기는 증명의 순간이었다.
해야 할 일은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자신만의 길을 보여주는 것.
스승인 권왕이 했던 말처럼, 신유성은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냈고.
투신류 5장 파류공명(波流共鳴)
펼쳐냈다.
파아앙! 자작-! 자자작!
금빛의 물결이 세상을 침식했듯이.
이번에는 신유성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푸른색의 균열이 금빛 세상을 침식했다.
“이, 이건! 설마, ……마, 마나! 마나 공명!?”
로렐라이가 당혹감에 말까지 더듬으며 외쳤다. 편린의 힘과 수명까지 바치며 만들어낸 자신의 완전무결의 세계는 푸른색의 균열로 무너지고 있었다.
“난, 난……. 나는…….”
로렐라이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보처럼 중얼거렸지만 붕괴는 멈추지 않았다. 솟았던 지반은 가라앉고, 여신의 신전은 형체도 없이 부서졌으며, 금빛 태양은 저물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으려 높이 뻗는 손.
그러나 이번에는 무엇도 움켜쥘 수 없었다. 붕괴된 세계에서 로렐라이는 그저 한없이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