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시간의 여신]은 S급 특성 중에서도 예측이 불허한 특성이었다. 만약 로렐라이가 더욱 강해진다면 어떤 스킬을 배우게 될지 몰랐다.
하지만 특성의 잠재력이 높다는 게 언제나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너무나도 위험한 몇몇 특성들은 때론 존재 자체만으로 인류에게 위협이 되곤 한다.
그리고 아리스는 그게 재앙으로 발현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녀석처럼.’
빌런 단체 리벨리온의 수장.
아리스가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이 들은 순간에도 기억은 망령처럼 되살아나 이따금씩 그녀를 괴롭혔다.
그리고 어느 날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아리스에게 잔인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만약 그 사건이 없었다면.
자신과 유원학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았다면. 둘은 어떤 식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을까?
‘나도…… 나이가 들어버린 걸까.’
아리스는 옅게 웃으며 보고 있던 방송의 소리를 낮췄다.
“들어와.”
그리곤 누군가를 불러들이는 아리스. 문이 열리고 거구의 남성이 들어오자. 아리스는 장난 섞인 어투로 상대에게 물었다.
“방송은 안 꺼도 되지?”
“그래.”
“……오늘 찾아온 건, 어느 일 때문이야? 지금? 아니면…….”
“아마도 둘 모두겠지. 이번 이야기는 세상의 모든 헌터가 엮여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니 말이다.”
유원학의 진지한 어투에 표정이 굳는 아리스. 권왕 유원학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할 정도라면. 보통 심각한 사항이 아니었다.
“이건 한국에서 발견한 증거다만. 아무래도….”
“잠깐. 급해?”
하지만 아리스는 도중에 말을 끊어버리며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아직, 아지트조차 특정되지 않았다. 조사가 끝날 때까지 급한 일은 없겠지.”
아리스는 유원학의 이야기에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그럼.”
그리곤 아리스는 포켓을 터치해 방송의 소리를 키웠다.
“경기가 끝나고 듣도록 할게. 지금 나에겐 이 경기가 더 중요하거든. 너도 궁금하잖아?”
유원학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녀 아리스는 자신의 동료. 유원학은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유성이가 이길 것이다. 네가 나를 이길 수 없었듯이. 저 아이도 유성이를 이길 수 없다.”
언제나 자신과 제자가 최강이라고 말했던 유원학이지만 오늘의 이야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
아리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대답 대신 그녀의 상징인 지팡이를 의자 옆에 내려놓았다.
“그건…… 지켜볼 일이지. 저 아이는, 로렐라이는 내가 아니야.”
유원학은 좀처럼 기분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방송을 쳐다보았다.
“그래. 저 아이는 네가 아니다. 유성이도 내가 아니지.”
오늘의 그는 호쾌하게 소리치던 평소의 분위기와 너무 달랐다.
“그러니 설령 만일의 가능성으로 저 아이가 유성이를 이긴다 하더라도. 바뀌는 건 없어. 그건 누구의 성취도 위안도 되지 못한다.”
“너…….”
아리스의 손이 떨렸다.
동료이자 헌터가 아닌, 한 사람의 인간 아리스로서 그녀는 절망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난 그 일을 자책하지 않는다.”
유원학이 쐐기와 같은 말을 박자. 아리스는 괴로운 얼굴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알고 있어.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도 잘 알고 있다고…….”
“……그러니. 나는 너도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기를 바랐다.”
유원학의 중후한 목소리.
그의 상상도 못한 위로에 아리스는 그만 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자신이 아는 유원학은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를 위로할 인물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싸구려 위로라고 생각할지도 몰랐지만 어쩌면 이건 아리스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그 일은 어쩔 수 없는 재앙이었다.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다. 아리스.”
너무나도 부드러운 이야기.
창밖에 시선을 둔 유원학이 말을 끝내자 아리스는 놓아둔 지팡이를 들며 번쩍 일어났다.
“이놈이! 네, 네가 감히, 동료의 인두겁을 쓰고 나를 농락해!? 정체가 뭐냐! 너는 대체 누구야!”
항상 여유로웠던 아리스가 씩씩거리며 지팡이를 날카롭게 들이밀었다. 어떻게 자신을 속였는지는 몰라도. 아리스는 지금 말을 하는 사람이 유원학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크하하! 격한 반응이로군. 삼두룡 결전 이후로는 처음 보는 반응 같은데. 아리스?”
“너, 네가 진짜 유원학이라고?”
“당연하지. 이 몸만큼 강인한 신체와 마나를 가진 존재가 어디에 또 있겠느냐.”
“그건, 변장 아티팩트로…….”
“아티팩트로 네 눈을 속인다고?”
“그야! 레, 레전드리급이면…… 또 모르지!”
아리스가 아주 본격적으로 모자까지 쓰며 자신을 견제하자. 유원학은 자신의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그럼 기억은 어떠냐. 동료랑 겪은 기억들은 무엇 하나도 잊은 적이 없다만.”
“기억?”
“그래. 가령, 네 오른쪽 엉덩이의 점 같은 것 말이지. 그건 나 말곤 그 누구도 모를 일이지 않더냐?”
유원학이 귀를 파며 심드렁한 얼굴로 말을 하던 순간. 아리스의 지팡이가 빛을 뿜었다.
지이잉! 콰앙!
지팡이에서 쏘아진 엄청난 속도의 보랏빛 구체. 그건 웬만하면 보스들도 녹아내릴 공격이었지만 유원학은 아무렇지 않게 손바닥으로 구체를 막아냈다.
아리스는 멀쩡한 유원학을 보더니 그제야 입을 열었다.
“……너 원학이 맞구나?”
* * *
[보는 것만으로 배울 것이 있다.]
라는 교장 진병철의 전언과 국가대항전의 2차 경기는 전교생이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반장인 김은아의 출전. 처음에는 그저 신기하게 지켜보던 A반의 분위기는 김은아의 활약으로 열을 더해가고 있었다.
특히 화제의 정점을 찍은 건, 김은아의 뇌룡강신과 함께 이어진. 섬광과 같은 공격.
“멋있다!”
“역시 반장이야!”
“아까 말한 예쁘장한 남자. 역시 신유성? 그럼 뭔가…… 로맨틱한 거 같지 않아?”
“약간 왕족과 천민의 신분 초월 로맨스? 그런 느낌?”
“꺄악! 그거 미쳤다! 진짜!”
“어! 뭐야! 은아가 갑자기 애기로 변했어!”
“완전 위기잖아!”
“근데 귀여워…….”
이젠 다 같이 웃음꽃까지 피우며 이야기를 떠드는 A반. 박수현은 쯧쯧- 혀를 차면서도 뭔가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유성 저 녀석. 결계를 맨손으로 없애다니. ……뭐, 저런 상대였으니. 내가 패배한 거지만. 저 녀석이 아니라면 내가 F반에게 패배하는 게 납득이 될 리가…….”
박수현은 마치 취한 사람처럼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자신이 신유성에게 진 게 당연하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박수현의 말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지만. 신유성이 상대라면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유성은 가온의 1인자였던 무패신화 아델라의 라이벌.
감히 그 누구도 올려다보지 못한 겨울의 여제를 꺾어버린 상대였다.
만약 신유성에게 상대가 있다면. 그건 가온이 아닌…….
* * *
향긋한 홍차.
푹신한 소파.
평소에는 입지 않는 하늘하늘한 드레스까지 아델라는 휴식에 최적화된 상태를 갖추고 경기를 보고 있었다.
- 로렐라이 양의 특성을 발동시켰습니다! 비록 시계탑 아카데미는 엄청난 점수를 잃었지만 김은아 양을 탈락시켰는데요!
- 이대로라면 혹시 영국 팀의 승리도 가능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진행자의 이야기가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뾰로통한 얼굴로 실눈을 떴다.
‘……이건 가온이 유리한 건데.’
아무리 한 명이 탈락을 했어도, 전원 탈락을 제외하면 이제 시계탑 아카데미는 점수를 따라잡지 못한다.
즉, 임무라는 선택지가 있는 가온과 달리 시계탑은 어떻게든 신유성을 탈락시켜야 승리가 가능한 상황.
아델라는 진행자가 경기의 흐름을 볼 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 신유성 학생!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중앙 로비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판단이 엄청나네요. 최강의 학생들이고! 최고의 라이벌입니다!
거기다가 자꾸 신유성을 로렐라이와 라이벌로 묶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약 신유성에게 라이벌이 있다면 그건 가온의 1위를 놓쳐 본 적이 없는 아델라 자신.
상대가 로렐라이라도 1대1에 한해서라면 아델라는 승리를 장담할 수 있었다.
‘……라이벌은. ……나인데.’
마시던 홍차마저 내려두고 담요를 손가락으로 꼼지락- 꼼지락- 만지작거리는 아델라. 아무래도 아델라는 가온의 1위 자리는 내려놓아도 신유성의 라이벌 자리는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