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48화 (148/434)

제148화

아카식 레코드.

이 세상의 모든 기록이 담긴 지식의 집합체. 인류 중 일부는 아카식 레코드가 오컬트에 불과하다고 여겼고, 다른 일부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건 탑에서 발견된 하나의 책.

흔히 ‘탑의 기록’이라고 부르는 책 덕분이었다.

스킬.

특성.

몬스터.

아티팩트.

심지어 박사 학위를 가진 헌터들에게도 어려운 원소학에서 던전 공략의 토대가 되는 모든 학문이.

‘탑의 기록’이라는 책 하나에 친절히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물었다.

이 책을 정리한 이는 누구인가?

그 어떤 인류도 몰랐던 정보를 알고 있는 이가 누구인가?

그리고 그때 떠오른 추리 중 하나가 바로 아카식 레코드 설.

탑의 기록에 적힌 정보가 아카식 레코드라 불리는 지식의 집합체에 일부라는 낭설이었다.

터무니없는 추리는 아니었다.

특정 던전과 탑의 벽화까지 다양한 곳에서 ‘미지의 지식’에 관한 언급은 끊이지 않았으니까.

만인이 탐내지만 누구도 닿지 못한 지식의 보고. 발견되지 않는 미지에 많은 헌터가 아카식 레코드의 존재에 대해 잊어갔지만. 대영도서관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지식’을 갈구하던 이가 바로 시계탑의 초대 교장 그레폰.

[우리가 아카식 레코드를 만든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상관없다.]

[설령 도달하지 못할 종착지라 하여도 우리가 도전 할 것이다.]

그레폰은 바쁘게 움직였다.

책을 모았고.

정보를 모았고.

지식을 모았다.

이 세상의 근원에 닿을 미지의 지식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모든 지식을 갈아 넣었다.

프로젝트 넘버 0.

codeN0.Information.Record.

통칭 노아의 방주(Noah's Ark).

[결국 영국이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번 프로젝트는실패작입니다.]

[……모순된 이야기입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너무나도 성공적이었기에, 도리어 실패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족의 마석을 통해 심상의 결계를 구현하고. 영국은 아티팩트의 힘으로 문자를 변환해 결계 속에 수없이 많은 정보를 녹여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욕심이 너무 과했다.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다 결국 추락해버린 이카로스처럼. 계획보다 너무 방대해진 노아의 방주는 지식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절망을 선사했다.

[……그레폰 님. 이번 도전자도 실패했습니다.]

[시련을 통과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엘리트에서 헌터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결계에 들어갔지만 포기가 속출했다.

그 숫자가 도합 500명.

프로젝트 넘버 0(zero).

노아의 방주는 그렇게 폐기된 프로젝트였다. 초대 교장이 된 그레폰은 아카데미를 설립하며 그 결계를 시계탑에 봉인했다.

낡은 먼지만 쌓인, 그저 이론에 불과하다고 여긴 폐기된 비운의 프로젝트. 하지만 오랜 시간 끝에 도전자가 나타났다.

아리스.

추후 마녀라는 이명을 가지며 탑에 역사를 새로이 남기는 인물..

삐그덕-

낡은 나무문이 열리고 아리스가 보라색 아공간에 들어갔다. 결계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라도 대부분의 도전자가 버티는 시간은 1분.

아리스는 무한하게 증식되는 시간 속을 부유했고 결국 쟁취했다.

결계에 담긴 모든 지식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흡수한 것이다.

‘……난 그런 아리스 님을. 존경했어. 멋있고, 외로운 사람. 혼자만의 세상을 가진 사람. 고독의 차가움을 알기에 모두를 따뜻하게 품을 수 있는 사람.’

아리스가 느꼈을 고독은 오직 자신만이 이해 할 수 있었다. 로렐라이는 아리스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시련을 통과한 사람이었으니까.

‘시련에서 겪은 건, 끝이 없는 긴 고독.. 아리스 님은 대단해. 그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버텨내신 거야.’

로렐라이는 감았던 눈을 떴다.

[역할- 빌런]

[임무1- 준비해둔 골렘 연성식을 작동시켜 헌터 팀을 혼란에 빠트립시오.]

[임무2- 학생들이 빠져 나갈 수 없도록 설치된 연성진으로 이동해 결계를 지키십시오.]

존경하는 사람의 묵은 소원을 이루기 위해. 눈앞에 있는 홀로그램은 빠르게 읽어 내렸다.

‘……결계의 위치는 옥상. 배치를 보니, 나의 속도로는 빠르게 도착해도 11분. 전투가 있다면 더욱 길어진다. 반면 연성식을 작동 시키는데 걸리는 시간은 미확인. 하지만 전투를 배제할 수 있어.’

로렐라이의 계산은 너무나 빨랐다.

그녀의 판단은 언제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근거했다.

‘……연성식은 아티팩트처럼 가동에 의한 마나 구현 형식. 프랑스의 헌터 용품에서 자주 쓰이는 방식이군.’

일반적인 학생이라면 골렘 연성식을 작동시키는 데 30분도 넘게 걸렸다. 물론 골렘은 그럴 가치가 있었다.

‘……방어선.’

경기의 밸런스를 위해, 학교에는 단 한명의 교수도 남아 있지 않지만 방어선은 남아 있었다.

재래식 무기들과 학교의 비품들로 만든 일종의 바리게이트.

골렘 연성식은 그걸 파괴하기 위해서 준비해둔 장치였다.

‘학생들을 인솔해. 방어선을 지키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분명 연성식을 작동시키는 시간보다 빠르다. 하지만 자세한 전투법까지 가르치려면 시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로렐라이는 엄청난 속도로 자신의 지식을 꺼내 쓰고 있었다.

빨라도 너무 빠른 계산.

로렐라이는 경기가 시작한 지 10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이제는 작전의 디테일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연성식의 구현에 공을 들이면 강한 골렘이 나오지만. 상대팀이 학생들을 교육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학생회장…….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학생회장의 역할을 맡은 사람을 누군가 견제해 주어야 해.’

하지만 로렐라이도 학생회장을 누가 맡았는지는 모른다.

알 수 없는 영역.

그러나 학생회장이 어디에 있을지는 유추할 수 있었다.

‘입구가 좁으면서. 최후의 상황에도 도주 경로를 확보 할 수 있고. 수용인원이 가장 넓은 공간이 좋겠지. ……2층 강당이 확실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로렐라이는 정답을 맞춰냈다.

남은 건 명령을 내리는 일.

[Märchen:발전기와 시계탑의 2층. 두 분 모두 가까운 쪽으로 이동해주세요.]

[C.M.Sebastian★: 로렐라이 님. 그럼 제가 발전기로 이동하겠습니다.]

[Alexander.B: 세바스찬 네가 더 발전기에 가까운 거 맞아 =o=?]

[C.M.Sebastian★: Sure.]

[Alexander.B: 그럼 제가 2층으로 가겠습니다.]

세바스찬은 발전기로.

안젤라는 시계탑의 2층으로.

로렐라이는 상대의 작전을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상대는 신비했다. 좀처럼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건, 다음 상황을 기다리는 것.

‘당신을 꼭 쓰러뜨려야 한다면. 차라리…… 그게 저라면 좋을 텐데요.’

로렐라이는 짐짓 비장한 표정을 짓더니. 단화의 앞굽으로 톡톡 바닥을 두드렸다.

화아아악!!

그와 동시에 바닥에서 일어난 금색의 빛이 파도처럼 물결쳤다.

사아아-!

그렇게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금색의 물결은 로렐라이를 에스컬레이터처럼 인도했다.

콰아앙-!

금빛 물결은 벽까지 부수며 공중을 날았다. 마치 동화에서 볼법한 환상적인 장면. 로렐라이는 어느새 무감해진 눈으로 어둑해진 아카데미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16594423701256.jpg 

‘……그럼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의 가치.’

*     *      *

[신유성: 은아야. 최대한 많은 인원을 데리고 방어선으로 이동해줘.]

띠링!

김은아는 빛나고 있는 신유성의 메시지를 심각한 표정으로 확인했다.

학생들과 함께 방어선에서 상대를 저지하라는 이야기. 심지어 수성전이 끝나면 근처에 있는 방공호를 통해 학생들을 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안전하게 방어선으로 이동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빌런의 공격으로 혼란에 빠진 학생들은 좀처럼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

“이건 아니야…….”

“차라리 흩어지자. 벽장 같은데 숨는 게 나을 거야. 들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흑, 아까 다리 삔 곳이 너무 아파. 엄청…… 다친 거 같아.”

구석에서 벌벌 떠는 남학생과 다리르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여학생까지. 인공지능의 실력이 낮게 설정된 탓인지 학생들은 정말 도움이 될까 의심스러운 수준이었다.

“하아, 미치겠네…….”

김은아는 한심한 학생들의 행동에 이마를 짚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촉박하게 흐르는데 시험을 위해 설계된 ‘가상의 학생들’은 그 중요성을 모르고 있었다.

‘유성이라면. 이런 녀석들도 금방 따르게 만들었겠지…….’

하지만 김은아는 신유성이 아니다.

지금까지 쭈욱- 반장을 맡아 왔음에도 리더십이나 카리스마를 보여준 적은 없었다.

강하니까.

신성그룹의 후계자니까.

그저 김은아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항상 떠받들어졌을 뿐이었다.

“그만 떠들고 나한테 주목해!”

답답함에 소리를 치는 김은아.

학생들의 시선이 모이자 김은아는 맡은 역할인 학생회장의 위치로 명령을 내렸다.

“모두 일어서. 지금부터 방공호로 갈 거니까.”

“회장. 그게 무슨 소리야. 나가려면 괴수 떼를 뚫어야 하잖아. 아까 못 봤어?”

학생 중 한 명이 반박하자, 김은아는 인상을 쓰며 주변에 찌릿- 전기를 피워 올렸다.

“그래서 여기서 기다리다 빌런한테 잡힐래?”

김은아가 보내는 일종의 경고.

하지만 이미 자포자기해버린 학생들에겐 통하지 않았다.

“……괴물한테 죽을 바엔 차라리 빌런한테 잡히는 게 나아.”

“나, 나도 괴수들한테 잡아먹히긴 싫어…….”

왜 국가대항전의 2라운드를 ‘종합평가’라고 부르는 지 김은아는 이제야 이해가 갔다.

지금 경기에서 요구 받고 있는 건, 헌터로서의 강함 같은 게 아니었다.

‘대체…… 나보고 어쩌라고?’

경기의 내용은 김은아에게 이 악조건을 해결 할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 누군가를 설득해본 적이 없는 김은아에겐 너무 어려운 일.

“너흰…….”

무언가 말을 하려던 김은아가 다시 입을 닫았다. 설득이란 결국 누군가가 되어 보는 과정. 상대의 생각을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한다면 결국 설득은 할 수 없었다.

‘……이 녀석들은 빌런을 상대해야한다는 공포에 떨고 있어.’

물론 빌런의 실상은 로렐라이를 비롯한 영국파티의 역할극에 불과하지만 가상의 캐릭터들에겐 생생한 현실이다.

‘……두려움.’

여기 모인 사람은 김은아처럼 학생에 불과하다. 아직 실력으로도 정신적으로 미숙했고, 완성 되지 않았다.

김은아는 그들이 느끼는 공포를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학생들이 보기엔 좀 잔인할 텐데. 눈을 감고 있는 게 좋지 않겠니?]

김은아에겐 악몽을 꾸게 만들 정도로 끔찍한 기억.

리벨리온의 치트는 김은아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 쓰러진 김준혁을 죽이겠노라 선포했다.

머리를 밟아 터트려버리겠다고 발을 높이 들었다.

치트의 전자음 섞인 웃음소리는 한동안 김은아의 트라우마였다.

깊은 밤에도 폭주한 김준혁의 모습과 치트의 발이 오버랩 되며 잠을 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미안. 난 인질이랑은 협상 안 해. 악당이 왜 악당이겠어~?]

아무런 죄책감도.

아니 오히려 즐겁다는 듯이 기꺼이 살인을 자행하려던 빌런. 신유성이 아니었다면 자신도 김준혁도 모두 끝이었다. 그런 생각에 닿자 김은아는 손이 떨려왔다.

“나도…….”

김은아가 목소리를 다잡고. 앞을 보았다. 신유성처럼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스미레처럼 공감을 해줄 수도 없었고, 에이미처럼 말주변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김은아에겐 진실한 경험이 있었다.

“……나도. 무서워. 그래도.”

말을 하던 김은아의 눈이 또렷해졌다. 무언가를 느꼈는지 단 한 마디에 조용해진 강당.

“그래도…… 그렇다고 여기 앉아서 떨진 않아.”

예전의 자신이라면 떨고 있는 학생들처럼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저들을 탓 할 수는 없었다.

과거의 김은아에겐 목표가 없었으니까. 부귀영화도 희생정신도 강해지고 싶다는 향상심도 없었다.

그저 재능이 있으니, 재미삼아, 혹은 떠밀려서 아카데미를 다녔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지키고 싶은 게 있었고, 신유성을 우승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고, 강해지고 싶다는 향상심도 있었다.

김은아는 A반의 반장이나, 신성그룹의 후계자가 아닌, 신유성의 파티원으로서 남고 싶었다.

“난 혼자서라도 갈 거야. ……설령 너희 말대로 괴수한테 잡아먹히는 한이 있어도.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진 않을 거야.”

설득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이게 최선. 망연자실한 김은아가 출구 쪽으로 걸어가던 순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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