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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화 (147/434)

제147화

오늘 시계탑은 평소와 달랐다.

하늘에 뜬 드론 카메라와 헬기 촬영 팀. 곳곳에 설치된 녹화 장치와 음향장비까지 방송국의 모든 세팅이 끝나 있었다.

“……어디 그럼. 나가볼까?”

교장인 벨로체가 중앙으로 걸어 나오자. 새하얀 빛이 쏟아졌다.

6급 현역 헌터였던 그녀는 시계탑의 교장이자 해설위원.

- 벨로체 님의 입장과 함께 영국의 대표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진행자인 벤덤의 중후한 목소리와 함께 벨로체가 걸어오자, 마치 아카데미가 떠나갈 것처럼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국가대항전의 진행으로 시계탑은 런던 전역의 시민들이 모인 듯, 축제나 다름없는 분위기.

온갖 나라의 말들이 주변에서 쏟아졌지만 그중 가장 많이 들리는 건 헌터들에게 공용어로 꼽히는 한국어였다.

‘……이 정도 인기라니. 역시 로렐라이라고 해야 하나.’

벨로체가 주변의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자 카메라가 그녀를 잡았다. 이제 전국을 향해 방송이 되는 시계탑의 모습.

신유성과 로렐라이.

권왕의 제자와 마녀의 제자가 맞붙는다는 소식은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화제성에 벨로체는 뿌듯하게 웃었다.

‘마음에 드는군. 이 정도 규모에…… 승리까지 쟁취한다면 더없이 좋을 텐데 말이야.’

마녀의 제자.

시계탑의 오라클.

제2의 시련 통과자.

로렐라이의 이름 앞에 붙은 수많은 위업과 호칭들. 로렐라이에게 이 정도 찬사는 오히려 모자라지 않을까 싶기도 생각하는 벨로체였다. 벨로체가 해설위원의 자리에 앉자. 진행자인 벤덤은 신사다운 멋진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곤 왕실의 허가까지 받아야 했던 최고급 레드카펫이 깔리자, 비로소 벤덤은 크게 소리쳤다.

- 시계탑의 대표는 최근 6급 던전의 공략으로 런던은 물론 영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소문의 주인공. 로렐라이 양입니다!

모두의 환영을 받으며 저벅저벅- 담담한 걸음으로 레드카펫 위를 걸어오는 로렐라이. 도열한 학생들의 제식과 함께 로렐라이는 마치 중세의 공주처럼 시계탑 아카데미에 군림했다.

그 뒤를 따라오는 건 여유로운 미소의 세바스찬과 김은아를 찾으며 두리번거리는 안젤라.

영국 팀인 로렐라이의 화려한 입장과 다르게 신유성을 비롯한 한국팀에게는 레드카펫은 깔리지 않았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도 그저 형식적인 수준에 그쳤다.

“역시 홈그라운드라는 건가?”

이시우가 주변의 분위기에 휘이- 하고 휘파람을 불자, 신유성은 상대인 로렐라이를 바라보며 파티원들에게 말했다.

“긴장하지 말고. 우리가 준비한 걸 보여주자.”

그럼 그렇지라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시우와 뚜둑- 뚜둑-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는 김은아.

진행자인 벤덤은 야외에 설치된 거대한 스크린을 가리켰다.

- 런던에서 진행되는 국가대항전의 제 2라운드! 모두들 아시다시피 2라운드부터는 1대1 대련이 아닌 룰렛으로 오리지널 맵 중 하나를 플레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헌터에게 필요한 능력이 전투가 전부가 아닌 만큼 국가대항전의 2라운드 맵들은 단순히 강한 것만을 판별하지 않는다.

팀원들을 통솔하는 전략.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생존 상식.

혹은 대규모 전투의 병법 등, 어떤 맵에 걸리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로 달라졌다.

촤르르르!!

스크린 속에서 매섭게 돌아가는 룰렛. 속도가 천천히 늦춰지며 소리가 멈춰갈 즈음 띠링! 하는 음성과 함께 맵의 이름이 정해졌다.

[맵 - 헌터 VS 빌런]

[헌터 팀 - 가온 아카데미]

[빌런 팀- 시계탑 아카데미]

-맵이 정해졌습니다! 이번 2라운드의 규칙은 다름 아닌 헌터와 빌런 팀의 대결! 전투는 물론 파티의 전략까지 엿볼 수 있는 흥미진진한 경기가 되겠습니다.

헌터 VS 빌런은 1학년부터 3학년에 이르기까지, 아카데미에서 치르는 가장 대표적인 실기시험 중 하나였다.

취지는 빌런과 헌터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빌런을 제압하기 위한 전략과 대처능력을 기른다는 명목.

하지만 국가대항전에선 그 실기시험을 단순한 역할극이 아닌, 가상 포탈을 통해 제대로 구현해낼 수 있었다.

[경기 내용]

[장소- 시계탑]

[헌터-발전기를 차단하고(5점), 결계를 부수어(5점) 학생들과 함께 시계탑을 빠져나오세요(5점).]

[빌런-학생들을 탈취하고(5점), 숨겨진 목표물을 훔쳐(5점) 탈출용 포탈을 작동시키세요(5점).]

[상대 파티원을 탈락시킬 시 5점, 파티장을 탈락시킬 시 10점이 추가됩니다.]

헌터 팀과 빌런 팀.

둘의 각기 다른 규칙.

이번 경기는 파티장의 전략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경기였다.

- 전략이 중요한 맵이군요. 로렐라이 양은 지식의 보고인 시계탑의 시련을 통과한 두 번째 인물. 뛰어난 전략이 기대됩니다.

진행자인 벤덤의 편애까지 받으며 로렐라이는 시계탑에 모인 영국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입이 절로 올라가는 상황에도 벨로체는 교장의 품위를 지키며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 후훗…… 한국과 영국. 두 팀의 승패 여하에 상관없이 멋진 경기가 나왔으면 좋겠군요. 그럼 포탈이 작동하는 동안 두 팀은 안내사항을 읽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규칙 및 안내사항]

[참가자들에겐 각자 다른 3가지 퀘스트가 부여됩니다.]

1. 가상 포탈의 장소는 사전에 협의가 끝난 시계탑입니다.

2. 데미지 누적으로 탈락 처리가 되면 포탈 밖으로 퇴출됩니다.

3. 포탈은 마나로 만들어진 가상공간과 이어져 있습니다.

4. 아티팩트와 헌터 용품은 최대 3개까지 포켓에 소지가 가능합니다.

5. 포켓의 메시지는 팀원 간 최대 5번 전달이 가능합니다.

이번 안내사항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퀘스트가 각자 다르다는 점과 포켓의 메시지가 사용 가능하다는 부분.

‘포켓으로 파티장이 내릴 수 있는 작전통솔의 기회는 5번. 그 기회를 어떻게 사용하는 지가 핵심이겠군.’

신유성이 머릿속에서 작전을 정리하고 있을 때, 로렐라이는 빤히 신유성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녀석 유성이를 아주 뚫어져라 보네. 아주 시작부터 승부욕이 대단하네.”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이시우. 김은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안젤라의 황홀한 표정에 식은땀을 흘렸다.

‘……저거 승부욕 맞냐?’

승부욕이라기엔 무언가 이상한 안젤라의 눈빛. 머릿속이 시작부터 다른 곳에 가 있는 건 로렐라이도 마찬가지였다.

‘……신유성.’

마음속으로 되새겨 보는 이름.

로렐라이는 신유성의 얼굴에서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높은 코. 하얀 피부. 가느다란 얼굴선.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잘생길 수 있을까?

로렐라이가 꿈속에서 상상했던 기사들조차 신유성을 미모로 이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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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유성…….”

로렐라이가 자신도 모르게 신유성의 이름을 내뱉었다. 뜻은 모르지만 신유성의 이름이라 그런지 로렐라이는 발음마저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저렇게 아름다운 미모에 강함까지 갖추다니, 신유성은 로렐라이가 꿈꿔왔던 기사에 누구보다 어울리는 이상형.

“로렐라이 님. 포탈이 열렸습니다.”

갑작스런 세바스찬의 부름.

멍에 멍한 표정으로 신유성을 감상하던 로렐라이는 문득 깨어났다. 그리곤 아무 일 없었다는 얼굴로 담담히 대답했다.

“……잠시 생각이 깊어졌군요.”

신유성의 뒷모습을 보며 아쉬운 속마음을 눌러 담는 로렐라이. 격전을 앞둔 두 파티는 포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임원급의 허가가 떨어져야 사용한다는 신성그룹 본사 회의실.

오늘은 특이하게도 회의가 없는 날인데도 거대한 벽면 스크린은 환하게 커져 있었다.

[지금 한국 팀의 파티가 포탈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앞의 2명인 신유성 학생과 김은아 양은 가온의 세븐넘버. 치열한 접전을 예상 중입니다!]

회의실에 울려 퍼지는 벨로체와 벤덤의 진행.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고요했다. 그저 방송을 지켜볼 뿐.

하지만 김은아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자 조용했던 회의실이 단숨에 시끄러워졌다.

“허허 아가야! 드디어 우리 은아가 나왔구나!”

오랜만에 보는 손녀 얼굴에 몹시 흡족해 보이는 회장 김석한. 김윤하도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후후훗! 아버님! 우리 은아, 표정이 엄청 진지하네요! 저렇게 무언가에 몰두한 모습은 저도 처음 봐요.”

“위험한 일이니 여전히 반대하고 싶지만…… 그래도 이젠 어쩔 수 없지. 응원해줄 수밖에…….”

김성한도 기뻐하는 딸의 모습을 보며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가족들은 바쁜 스케쥴 탓에 항상 김은아를 외롭게 만들었다. 심할 때는 1년에 가족보다 비서와 보낸 시간이 많았을 정도였다.

티 내진 않아도 외로움을 많이 타는 김은아를 볼 때마다, 늘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이번 경기는 김은아를 믿어주고 그 불안감들을 떨쳐 보내기 위한 무대. 이젠 김은아의 헌터 지망을 응원하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김윤하는 복잡한 심정의 김성한을 이해하는 듯 보였다.

“당신. 우린 이제 너무 걱정하지 말기로 하자.”

부회장과 대표 이사.

두 잉꼬부부가 눈을 맞추고 뜨겁게 서로를 바라보자. 김준혁은 분위기를 전환했다.

“맞습니다. 저도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유성 학생……. 이야기를 해보니 제법 믿을만하더라고요. 착하고, 어린 나이에 야망도 있고! 뭣보다 은아가 원하던 잘생…….”

김준혁은 김성한 회장의 살기에 그만 말을 멈췄다.

“기껏해야 파티나 같이하는 정도인데! 아주 앞서 나가는구나! 누가 보면 우리 은아를 저놈한테!”

무엇이 그리 화났는지 눈에서 불길이 화르르- 타오르는 김성한 회장. 김준혁은 무안한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었다.

“아, 아, 하하…….”

하지만 김준혁은 병원에서 소리쳤던 김은아의 이야기에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진 상태였다.

[……그래. 난, 그런 거 하나도 안하고. 흑, ……잘생긴 남자랑 결혼한 다음에 돈만 펑펑 쓸 거야.]

‘……은아 주위에 쟤보다 잘생긴 남자는 없을 거 같은데.’

외모에 대한 기준이야 각자 다르겠지만 김준혁의 생각에 신유성을 뛰어넘는 미모를 찾는 건, 전 세계를 뒤져도 힘든 일이었다.

거기다 신유성은 둘을 구해줬고, 김은아는 만날 때마다 신유성의 이야기를 온종일 했다.

‘……무척 표정도 밝아졌고.’

분명 김은아는 신유성을 통해 바뀌고 있었다. 타인을 받아주지 않던 김은아의 좁은 마음에 신유성이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할아버지. 은아는 이미…….’

그저 방송을 보며 실실 웃을 뿐, 그러나 김준혁은 그 사실을 굳이 입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저 둘의 사이를 김석한이 알 게 되는 날이 최대한 늦어지길 바랄 뿐이었다.

‘만약 밝힌다면 은아가 졸업한 후면 좋겠는데…….’

김석한은 김준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크린을 보며 큰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허허허! 이왕 참가했으니! 우리 은아가 전부 쓰러트리고 활약을 했으면 좋겠구나!”

*     *      *

포탈을 통과하자 보이는 건 새하얀 빛. 김은아가 천천히 눈을 뜨자. 가려져 있던 풍경이 김은아를 반겼다.

“……우린 전부, 망했어.”

“왜 아직도 헌터들이 안 오는 거야? 우리도 시민이잖아! 아직 학생이라고…….”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는 학생들. 방의 입구에 바리케이드 삼아 놓인 의자와 책상들.

“뭐야 이건…….”

김은아가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파앗!

눈앞에 친절하게도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선택된 맵- 헌터 VS 빌런]

[시작 장소- 시계탑 2층]

[역할- 학생회장]

[임무1- 당신은 현역 헌터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교수님들을 대신해 학생들을 통솔해야 합니다.]

[임무에 실패할 시 상대 팀에게 5점을 지급합니다.]

지금까지 이상할 정도로 강운을 자랑한 김은아였지만 이번에 주어진 역할은 헛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우린 끝이야…….”

“헌터들 진짜 오는 거 맞아?”

“아 좀 시끄럽다고! 소리라도 들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거기다 서로 목청을 높일 만큼 학생들 간의 분쟁이 일어난 상태. 김은아는 자신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건 완전 오합지졸이잖아.”

자신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

김은아의 첫 데뷔 경기는 시작부터 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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