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중국의 헌터협회 지부. 금정각(金炡閣). 그곳에는 비단베일이 드리운 검은색 삿갓을 쓴 여성이 고풍스러운 나무 의자에 앉아 기다란 담뱃대를 물고 있었다.
“후우-.”
그녀는 하얀 연기를 뿜어내더니 말없이 맞은편의 류진에게 물었다.
“……그래.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지?”
여자의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힘이 있었다. 야생의 맹수조차 움츠러들게 만드는 힘. 그건 강자의 위압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바쁜 시기에…… 굳이 금정각까지 찾아오다니.”
툭툭- 담뱃대의 재를 털어내자 소매에 감추어져 있던 그녀의 하얀 팔이 드러났다. 척 보기에도 아름다운 선. 하지만 하얀 팔에는 어울리지 않게도 자잘한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그건 그녀가 전투를 치루며 지금까지 새겨온 흔적들이었다.
“그럴 가치가 있는 이야기더냐?”
여자가 다리를 꼰 채, 여유롭게 묻자. 류진은 한쪽 눈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류진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묻는 스승의 태연함이 싫었다.
“……어제 류밍이 수술에 들어갔습니다.”
류진의 동생인 류밍은 희귀한 마나 질환에 걸려 있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선 일정한 시간마다 마나의 체질을 바꾸는 수술이 필요했다.
그야말로 시한부나 다름없는 삶.
“네 여동생의 이야기더냐? 그럼 이번으로 4번째로군?”
여성은 그런 류밍의 비극에도 아무런 동요 없이 다시 입에 담뱃대를 물었다.
“그래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지?”
류진에게도 스승의 이런 반응은 새로울 것 없었다. 류진을 가르친 것도, 자신의 검술을 가르쳐 후계에 전달하기 위함.
그녀는 중국의 전역에서 영재들을 모았고 치열한 선발과정 끝에 류진을 택했다.
그 관계 속에서 사제 간의 교감 같은 따뜻한 이야기는 없었다.
류진이 검신이라는 스승을 택한 이유도. 검신이 류진이라는 제자를 택한 이유도. 모두 둘의 이해관계가 맞았을 뿐이었다.
“제가.”
류진은 잠깐 말을 멈췄다.
그리곤 자신의 감정을.
고요하고 차갑게 갈무리했다.
“……제가 왜 당신의 제자가 되었는지 잊으신 겁니까?”
중국의 검신(劍神).
그녀의 가르침을 원한 수많은 헌터들 중에서 류진의 소원은 특이했다.
[……강한 헌터가 되면. 정말, 제 동생을. 낫게 할 수 있습니까?]
14살의 나이에도 의젓한 소년.
류진의 물음에 검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탑에는 온갖 기적이 있으니 말이다. 죽어가는 아이 하나를 구하는 것쯤이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 ……하지만.]
말을 끊곤 대련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류진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검신. 그녀는 지금 류진의 자격을 재고 있었다.
[탑의 기적은 아름답게 타오르는 불빛이다. 불빛의 열기에 휘말린 자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지. 그중에서 기적을 거머쥐는 건, 선택 받은 극소수의 헌터. 그런 강함을 네가 가질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를 일이지.]
[상관없습니다. 설령 잿더미가 되더라도 거머쥘 테니까.]
그녀는 천천히 담뱃대를 입에 물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곤 천천히 하얗게 뿜어내는 연기.
“잊었을 리가. 후우-.”
검신은 담뱃대를 내려놓더니 류진에게 말했다.
“죽지 않을 정도는 조치해주도록 하마. ……순환석을 더 사용한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순환석은 임시방편일 뿐 류밍의 병을 치료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대신, 너의 빚이 더 늘어나겠지. 내 부탁이긴 하지만…… 네 동생을 살려주고 있는 건, 협회의 돈이니 말이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안 그러냐. 제자야?”
하지만 순환석은 자신의 동생을 살리리기 위한 유일한 불꽃. 류진은 그 임시방편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류밍이 차갑게 식어버리지 않기 위해선 스스로가 잿더미가 되더라도 불길을 피워야 했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협회에 진 빚은 얼마일까? 순환석은 희귀한 광물이다. 원하는 사람에 비해, 그 숫자가 적었기에 자그마한 돌 하나로 건물 몇 채를 살 수 있었다.
어지간한 아티팩트보다도 비싼 금액. 류진은 동생을 위해 7년의 시간동안 그런 순환석을 십여 개가 넘도록 사용했다.
그 금액을 충당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자신에게 투자를 해준 협회의 도움 덕분.
중국의 헌터 협회장인 검신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지원이었다.
류진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때 검신의 목소리가 류진을 불러 세웠다.
“……탑에 오르고 싶으냐?”
탑.
미지의 기적이 잠든 정체불명의 구조물. 류진은 지금껏 류밍을 치료 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얻기 위해서 강해졌다. 그러니 탑을 오르고 싶은 건 당연했다.
류진은 고개를 돌려 다시 스승을 마주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열의가 담긴 류진의 눈에 검신은 삿갓을 비스듬히 틀었다. 베일의 틈새로 보이는 분홍빛 입술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그럼 잘됐구나.”
스윽-
검신은 종이를 꺼내 책상에 올려놓았다.
“탑의 입장서다. 나의 날인이 새겨져 있지. 어디 한번 탑에 가서 네 한계를 시험해 보거라.”
미지가 숨겨진 탑.
지금까지 류진이 그 어디보다도 들어가길 원하던 장소. 그곳의 입장권이 지금 류진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검신은 그제야 꼬았던 다리를 풀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이만큼 편의를 봐줬으니. 모두가 납득할 만큼 확실히 너의 가치를 증명 해주어야 할 것이다.”
검신은 곧 진행될 신유성과 로렐라이의 전투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기껏해야 학생들의 대결정도로 치부하기에는 걸려 있는 이름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자신의 동료였던 권왕 유원학과 마녀 아리스. 그 둘의 제자라니.
“미리 말하지만. 목표는 우승이다. 그 외에는 의미가 없으니. 내 이름에 먹칠할 생각은 하지 말거라.”
그 말을 끝으로 검신이 금정각을 떠나자 류진은 입장서를 쥔 손에 꽈악- 힘을 주었다.
탑의 정점.
지금까지 누구도 닿지 못한 미지의 영역을 노리는 류진에게 겨우 일개 학생들 따위는 목표가 될 수 없었다. 병원의 밖으로 나가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싶다는 류밍의 소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류밍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류진은 멈출 수 없었다.
‘누가 올라오든 상관없다.’
신유성. 아델라. 로렐라이.
지금의 류진은 상대가 누가 됐든 패배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 * *
시계탑의 트레이닝 룸은 어떤 대련 중 발생하는 공격에도 부서지지 않도록 대비된 안전한 장소였다.
로렐라이와 안젤라는 이곳을 암전시키고 천장에 설치된 라이트닝 건으로 실험을 했다.
안젤라가 천장에서 쏘아지는 전기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가에 대한 실험. 전기의 속력을 생각한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실험이었지만 안젤라는 금방 라이트닝 건의 패턴을 파악하고 모든 공격을 피해냈다.
정말이지 믿기 힘든 체술.
“역시 당신이군요.”
로렐라이는 무감한 눈으로 한쪽 무릎을 꿇은 안젤라를 내려다보았다.
“……성자의 구로 사령술사를 견제한 이상. 남은 상대는 한 명. 안젤라. 당신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로렐라이는 포켓에서 준비했던 아티팩트를 꺼내 안젤라에게 건넸다.
안젤라가 건네받은 건 정체불명의 옷이었다.
“로렐라이 님…….”
“아티팩트까지 갖춘 당신이라면 분명 손쉽게 김은아라는 학생을 이길 수 있겠죠.”
“후훗, 그분이라면 꼭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정말…… 정말로 자신이 있습니다.”
로렐라이의 입에서 김은아의 이름이 나오자. 안젤라는 즐거워 하는 표정을 지었다. 주변을 한 눈에 사로잡는 미모.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하얀 피부. 잘 관리된 각선미의 몸매와 고압적이고 까칠한 성격까지.
잠깐 본 상대지만 김은아는 안젤라의 취향을 집결한 듯 보였다.
하지만 안젤라가 김은아에게 꽂힌 이유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거기다 난 알 수 있어. 강한 척하는 그 아이의 겉모습은 가짜.’
안젤라는 김은아의 눈빛에서 내면을 느낄 수 있었다.
김은아는 강한 게 아닌, 강한 척 하는 부류가 분명했다. 갑옷처럼 단단한 가면을 내세우지만 그 속에 감춰져 있는 건 유약한 성격.
‘……보고 싶어. 그 아이가 숨기고 있는 진짜 얼굴.’
안젤라는 이번 경기에서 진득하게 김은아를 괴롭혀줄 생각이었다. 준비한 아티팩트를 통해 전기내성까지 얻었으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특성을 봉인한다면 체술에 중점을 둔 그녀의 압승이었으니까.
‘항복을 외칠 수 없도록. 입부터 가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괴롭혀 주는 거지.’
안젤라는 자신만만했던 김은아의 얼굴이 고통스런 표정으로 일그러지고, 결국에는 흐느끼며 안젤라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벌써부터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안젤라의 몸.
‘……물론, 울어도 용서해주지 않을 거지만.’
꿀꺽-
안젤라가 마른 침을 삼켰다.
‘이왕이면 쭉 내 곁에 남았으면 좋겠지만……. 기회는 한 번뿐이니까.’
안젤라는 김은아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새겨주고 싶었다. 자신과의 전투를 떠올릴 때마다 몸서리치게 만들고 싶었다.
새하얀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는 기분. 그 감정이 공포가 됐든, 치욕이 됐든 상관없었다.
안젤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로렐라이를 마주보았다.
“그럼…… 로렐라이 님의 분부대로. 그분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김은아와의 전투를 기대하며 들뜬 미소를 짓는 안젤라. 로렐라이는 무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젤라.”
“네. 로렐라이 님.”
안젤라는 음흉한 속내와 다르게 로렐라이를 보며 보기 좋은 미소로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