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숙소는 이곳입니다. 만약 시설에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부디 말씀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신유성은 방금 전에 들었던 세바스찬의 당부에 숙소의 시설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확인한 숙소의 시설은 상상을 초월했다.
‘가온에도 밀리지 않는걸…….’
돈을 쏟아부은 최첨단 시설.
시계탑 아카데미의 세븐넘버 숙소는 심플하지만 고급스러운 가구와 설비들로 꾸며져 있었다. 거기다 6인용 숙소라 크기에서 오는 만족감도 상당했다.
‘그리고 이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냄새……. 스미레의 새로운 메뉴인가?’
부드러워 질 때까지 푹 끓인 고기와 본연의 맛을 잘 우려낸 야채.
스미레의 고기 스튜가 풍기는 진한 냄새에 신유성의 기대감은 한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맛을 보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어. 이건 분명히 맛있다.’
나머지 파티원들까지 전부 돌아올 시간을 생각한다면 식사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적어도 1시간.
‘고기 스튜 냄새를 맡으며 목욕을 하면 딱 좋을 시간이군.’
입구에서부터 나름의 스케줄 정리를 하는 신유성. 그때 주방에서 앞치마를 입은 스미레가 기쁜 얼굴로 신유성을 반겼다.
“아! 유성 씨! 생각보다 일찍 돌아오셨네요?”
“응. 은아랑 에이미도 곧 돌아올 거야.”
운동을 마친 김은아는 땀을 씻어내기 위해 숙소의 욕실이 아닌 아카데미의 샤워실을 택했다.
아무래도 공용 숙소에서 씻기는 부끄러웠던 모양. 스미레는 알겠다는 얼굴로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유성 씨는 목욕부터 하실래요? 아니면…… 밥부터?”
왜인지 스미레가 우물쭈물 부끄러운 얼굴로 묻자. 신유성은 담담하게 답했다.
“은아랑 에이미가 돌아오기 전에 일단 씻을게.”
리본을 풀자. 흘러내리는 신유성의 머리카락. 스미레는 빤히 신유성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다급하게 욕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그럴 줄 알고! ……저, 미리 목욕물 데워뒀어요!”
“항상 고마워. 스미레.”
신유성의 감사에도 스미레는 멋쩍게 웃더니 스튜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스미레는 생각이 깊어진 얼굴로 조곤조곤 말을 했다.
“……저, 이번에는 경기에 못 나가니까. 파티원분들의 컨디션이라도 제가 꼭 관리해드리고 싶었어요.”
그 말을 끝으로 신유성에게 배시시 웃어주는 스미레. 신유성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에 솔직했다.
“스미레는 언제나 우리들을 생각해주는구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며 천천히 다가오는 신유성. 스미레는 가까워진 거리에 긴장한 눈으로 신유성을 바라보았다.
“유성 씨…….”
“역시 우리 파티는 네가 없으면 성립하지 않아.”
스미레는 까칠했던 김은아가 마음을 열게 만들고, 못 미더워 했던 이시우가 인정을 하게 만들었으며, 지금까지 신유성의 신뢰와 기대를 한 번도 배신하지 않았다. 언제나 한계를 돌파하고 기대 이상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항상 고마워. 스미레.”
신유성이 파티를 만든 게 긴 시간은 아니었음에도 스미레에게는 감사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감사와 함께 신유성이 옅게 미소를 지어주자. 시선을 마주친 스미레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저, 저도요오…….”
하지만 스미레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어떻게든 신유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항상, 고맙습니다! 유성 씨!”
부끄러움을 참고 신유성을 보며 싱긋 싱긋 웃는 스미레는 확실히 변해 있었다.
툭.
그때 신유성의 손이 스미레의 머리에 닿았다.
‘스미레는 편린의 영향을 받으면 항상 이걸 부탁했었지?’
편린의 힘은 스미레의 성격을 솔직하게 만든다. 즉 신유성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건 평소에도 가장 원하는 행동.
신유성은 감사의 의미로 스미레의 부탁을 기억해내고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그럼 계속 부탁할게. 스미레.”
그 말을 끝으로 신유성은 욕실로 떠났지만. 스미레는 붉어진 얼굴로 석상이 되어버린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유성 씨…….’
만지작만지작.
자신의 머리를 만져보는 스미레.
비록 경기는 나가지 못했지만 신유성의 호의 덕분에 스미레는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 * *
샤아아아.
쏟아지는 물소리.
푸른색 유리가 칸막이로 쳐진 샤워실에서 에이미는 김은아를 보며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은아야. ……이건 내 생각인데. 안젤라랑은 친하게 지내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 뭔가…… 위험하다고 해야 할까?”
“에휴, 넌 또 그 이야기야? 뭘 내가 그렇게 친하게 지냈다고. 말 몇 마디 한 게 전부인데.”
“조심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지. 으으…… 안젤라 재는…… 진짜 뭔가 있다니까?”
고개를 내민 에이미는 안절부절 했지만 김은아는 이야기를 일축했다.
“그래. 알겠으니 씻기나 해.”
“진짠데…….”
“그것보다, 아까 꼭 말해야 한다고 한 작전은 뭐야?”
“아 그거?”
김은아의 질문에 에이미는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어떻게든 안젤라를 김은아에게서 떼어내려고 다급하게 꺼내긴 했지만. 작전 회의가 필요하다는 에이미의 말은 사실이었다.
“로렐라이팀. 이번에 협회에서 아티팩트를 지원받았대.”
“뭐? 성자의 구가 끝이 아니고?”
성자의 구는 사령술사인 스미레에게 대처하기 위해 아리스가 선물한 유니크 아티팩트. 그 존재만으로 스미레의 출전이 봉인됐었다.
“응, 이번에도 유니크급은 아니겠지만……. 정보에 따르면 대항전의 상대가 한국으로 결정되고 주문한 거래.”
에이미의 이야기에 김은아는 무언가 걸리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아티팩트를 주문했다고? 설마 그거……. ‘탑의 공방’에서 만들었다는 이야기야?”
탑의 공방.
이곳은 헌터 용품을 만드는 장인 중에서도 여섯 국가의 엘리트를 뽑아 운영하는 대장간. 탑의 공방은 현역 중에서도 극소수의 최상위 헌터만 이용 할 수 있었고, 아티팩트를 재가공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갔다.
“……그래서 뭘 만들었는지는 모른다는 거지?”
김은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변하더니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영국 팀은 시작부터 유니크 아티팩트에 탑의 공방에서 아티팩트까지 제작 주문했다.
국가의 명예가 걸렸으니 영국도 최선을 다하는 셈. 김은아는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번에는 꼭 나가야 하는데…….’
김은아는 일본과의 승부에서 가족의 사정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결국 이번 영국이 첫 출전.
그런데 아티팩트의 차이로 지게 된다는 건 상상만으로 분했다. 그건 김은아가 신유성과 함께한 수련을 의미 없이 만드는 결과였다.
‘그 녀석들이 뭘 가져오든. 어떻게든 내가 이겨야 해…….’
김은아에게 발동되는 강한 승부욕.
생각에 빠진 김은아가 얕게 입술을 물자. 에이미는 준비했던 샤워 타월을 돌돌만 채로 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탈의실로 걸어 나왔다.
슉- 스스슥!
금방 옷을 다 입은 에이미는 힐끔 김은아를 흘겨보며 말했다.
“……근데 은아야? 솔직히 어떤 아티팩트인지 유추 가능하지 않아?
이래보여도 에이미는 머리 회전이 빠른 편이었다. 그 증거로 아카데미의 필기 성적도 스미레만큼은 아니지만 상위권. 김은아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타월을 감은 채,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우리와 싸우기 위해서 준비한 아티팩트.’
툭.
김은아가 드라이기를 내려 놓았다.
잠깐 생각한 것만으로 알 수 있었다. 역시 에이미의 말이 맞았다.
“이제야 준비한 걸 보면, 자신들의 특성을 강화하기보단 우리 팀에게 대비하기 위한 아티팩트겠지.”
김은아의 진지한 목소리에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이는 에이미.
“스미레를 막기 위해 성자의 구를 준비한 걸 보면. 분명 그렇겠지.”
“그럼 누구를 막기 위한 아티팩트인지가 문제인데……. 성자의 구를 준비했으니 스미레는 아니고.”
김은아의 추리에 에이미는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응! 그렇지, 분하지만 큰 활약을 보여준 적이 없는 시우도 나도 아닐 거야. 뭐어~ 우린 세븐넘버도 아니고.”
결국 스미레. 이시우. 에이미라는 선택지를 제외하면 남는 건 단 2명. 신유성과 김은아였다.
김은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오른손에 전기를 피워 올렸다.
파짓-!
푸른색의 전기가 빛을 뿜자.
김은아는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나일까?”
“그건 모르지만. ……아마, 파티장님이 아니면 너를 막기 위한 아티팩트가 아닐까?”
김은아는 원소로 불리는 전기 특성. 내성을 가진 아티팩트의 종류도 제법 많았다.
“만약 나라면. 전기가 없이 싸워야 할 수도 있겠네?”
김은아의 직구.
에이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응, 너를 견제한다면 역시 전기일 거라고 생각해. 전기가 통하지 않는 슈트나 전기를 흡수해버리는 아티팩트라던가…… 그런 거.”
“그런가.”
어느새 옷을 입은 김은아는 머리끈을 묶고 있었다.
스윽- 툭.
‘전기내성이라…….’
에이미의 정보가 사실이라면 정말 전기가 통하지 않는 상대와 싸우게 될 지도 몰랐다.
그건 아종 여울룡을 처음 상대했을 때처럼, 막막한 상대. 하지만 김은아는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상관없어.”
하지만 김은아는 신유성과 수련을 하며 격투술을 배웠고. 새로운 기술을 깨우쳤다. 오로지 전기 공격에 의지하는 과거의 자신이 아니었다.
“내가 이길 거야.”
확신에 찬 김은아의 목소리.
에이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은아 엄청 멋있어! 방금 전 그거 파티장님을 닮은 거 같기도?”
귀여운 에이미의 웃음.
에이미는 김은아를 보며 평소처럼 해실해실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