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인류가 도달하지 못한 지식.
몇몇의 학자들과 헌터들은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아카식 레코드의 존재가 있다고 믿었다.
세계를 넘어 우주 전체의 기록이 담긴 정보의 집합체.
그나마 인류가 가진 지식 중 아카식 레코드에 가까운 건 ‘탑의 기록’이었다.
그 책에는 아티팩트를 비롯해 인류가 몰랐던 헌터에 관한 지식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우리 시계탑의 집단 지성은 결국 탑의 기록을 뛰어넘었다.’
교장인 벨로체가 도서관의 비어있는 책장을 보며 웃었다. 원래는 시련이라는 이름의 책이 꽂혀 있었던 장소.
하지만 지금은 책의 주인이 생겨버렸다.
‘……시련을 통과할 수 있는 건 아리스 님이 인류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기억 깊은 곳, 역사의 순간을 떠올리자 벨로체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시련을 통과하고 책을 쥔 아리스의 모습은 영국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벨로체 그녀가 현역을 물러나자마자 시계탑의 교장이 된 이유.
이젠 전설이 된 아리스를 대신할 헌터는 영국에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영국에서 마녀라는 이명은 영원한 결번이 될 예정이었으니까.
하지만 마녀가 제자를 데려왔다.
시간의 마녀.
자랑스러운 시계탑의 오라클.
로렐라이 코넷.
‘정말, 지금도 믿기지 않는단 말이지…….’
로렐라이는 17살의 나이로 시련에 도전했다. 그 작은 손에 책을 쥐었고, 결국 마지막 페이지를 덮어 그곳에 담긴 모든 지식을 정복했다.
‘아리스 님이 시련을 통과했을 때보다 2살이나 어린 나이.’
그렇게 모든 영국인의 축복을 받으며 새로운 마녀가 태어났다.
시계탑의 지식이 이어졌고.
마녀가 키워낸 시간의 마녀가 새로운 세대를 물려받았다.
그러니 지식을 선망하는 시계탑의 모든 이들은 로렐라이를 존경 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은 물론 교수까지도 로렐라이를 영국과 시계탑의 희망이라 여겼다.
‘문제가 있다면. 역시…….’
사실 교장인 벨로체는 가장 어려운 상대로 아델라를 생각했지만 이젠 생각이 바뀌었다.
벨로체의 생각을 비웃듯 신유성은 선발전에서 우승을 거뒀다.
‘신유성.’
영국에 마녀가 있다면 한국에는 역시 권왕이 있었다.
‘……로렐라이 양에게도. 분명 쉽지 않은 상대겠지. 전투에 앞서 어떤 계획을 준비할지…….’
6급 헌터까지 되며 천재라 불렸던 벨로체도 감히 로렐라이의 생각은 예측 할 수 없었다. 로렐라이는 마녀를 뛰어넘을 진짜 천재였으니까.
‘후후, 정말 기대되는걸?’
벨로체는 교장으로서 그저 로렐라이를 믿어줄 뿐이었다.
* * *
오라클의 개인 서재.
“그럼. ……로렐라이 님. 저와 안젤라는 부실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저희를 찾아주십시오.”
세바스찬은 깍듯한 인사와 함께 로렐라이를 안내했다. 로렐라이는 대답 없이 서재의 구석.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아늑한 장소로 걸어갔다.
저벅저벅. 투욱.
서재에는 작은 매트릭스와 따뜻한 이불. 거기다 푹신한 베개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이 공간은 로렐라이의 아지트.
오라클만이 출입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 로렐라이는 이불 안으로 들어가더니 베개에 상체를 기댔다.
툭.
그리곤 매트릭스 바로 옆의 책장에서 능숙하게 책을 꺼내는 로렐라이.
스윽.
작고 하얀 손이 알록달록한 귀여운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한 장.
두 장.
어느새 반절 가까이 넘어간 책의 페이지. 로렐라이는 시련을 통과하기 위해 수많은 책을 읽었다.
로렐라이는 책에 적혀있던 모든 내용을 똑똑히 기억했다.
지식의 정수를 습득하기 위해선 모두 필요한 이야기. 하지만 로렐라이가 좋아하는 장르는 따로 정해져 있었다.
동화(Märchen)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공주와 기사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아름다운 로맨스.
로렐라이는 잔뜩 집중한 얼굴로 페이지를 넘겼다.
[Then the knight said.]
[그때 기사님이 말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I will protect you forever.]
[영원히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자신의 공주에게 영원한 서약을 맹세하는 기사.
철저하게 문자들로 이루어진 두 남녀의 로맨스는 로렐라이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지금까지 로렐라이는 방대한 책을 읽으며 수없이 단련된 상상력 덕분이었다. 책만 있으면 현실보다 뚜렷한 세계를 머릿속에 펼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상상력은 현실을 이길 수 없었다.
오늘 만난 남자는 로렐라이가 지금까지 상상했던 그 어떤 기사나 왕자보다도 멋있었다.
얇은 얼굴 선.
호수처럼 깊은 눈.
바람에 따라 아름답게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
‘나, 나는 무슨 생각을…….’
신유성의 모습을 떠올린 로렐라이는 눈을 질근 감고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잊을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로렐라이의 뛰어난 기억력은 더욱 또렷하게 신유성의 모습을 떠올렸다.
[영원히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중세의 기사처럼 무릎을 꿇고.
[로렐라이 님.]
로렐라이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미소를 지어주는 신유성.
[존칭은…… 싫어.]
상상속의 로렐라이가 천천히 손을 잡아당기자. 앉아있던 신유성은 느긋하게 일어났다.
그리곤 그윽한 눈으로 로렐라이를 내려다보며 중저음의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영원히 널 지킬게. 로렐라이.]
로렐라이의 상상 속에서 서약을 맹세하며 서로를 껴안는 기사와 공주. 장밋빛 분위기에 취해 있던 로렐라이는 화들짝! 상상에서 깨어났다.
“헉…….”
화악-
로렐라이는 붉어진 얼굴을 재빨리 베개에 파묻었다. 그러나 로렐라이의 상상은 멈추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끊임없이 펼쳐졌다.
로렐라이의 상상 속에서 신유성은 서로의 가문이 만남을 반대하는 비극의 귀족이 됐고, 마왕에게 잡혀간 공주와 용사로도 변했으며, 불치병의 소녀와 신비의 약초를 구하러 간 소년으로도 변했다.
“……나, 나.”
하나같이 이야기의 최후가 사랑으로 귀결되는 달콤한 상상의 세계. 로렐라이의 귀는 부끄러움에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대체 무슨.”
툭.
로렐라이는 결국 책을 덮어버렸다.
‘그 남자는…… 아리스 님께서 직접 부탁하신…….’
지금 자신의 행동은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금단의 사랑을 갈구하는 셈이었다.
‘내가 어떻게든 이겨야 할 상대.’
신유성은 자신이 부숴야 할 상대.
아리스가 부탁한 이상,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는 건 로렐라이에겐 죄악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아니야.’
결국 로렐라이는 머리를 털어내며 자신의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 * *
체육복을 입은 김은아는 제법 괜찮은 자세로 샌드백을 차고 있었다.
탓! 퍽! 퍽! 펑!
쭉 뻗은 다리가 샌드백에 작렬 할 때마다 시원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 제대로 정권도 지를 줄 몰랐던 김은아에겐 큰 성장이었다.
김은아는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더니 멀리서 지켜보는 신유성에게 말했다.
“유성아! 나 그거 사용한다?”
이것이 바로 신유성이 김은아에게 체술을 가르친 이유.
“좋아. 보여줘 은아야.”
신유성의 허락이 떨어지자.
김은아의 주변에 스파크가 튀겼다.
파짓!
김은안의 몸 안에서 손끝까지 타고 흐르는 푸른색의 번개.
전기자극은 김은아의 속도를 끌어 올렸고, 곳곳에 마나를 운반해 신체를 강화시켰다.
차앗!
김은아가 땅을 박차며 이동했다.
팟!
찰나에 불과한 엄청난 속도였지만 신유성의 눈에는 김은아의 동작이 하나하나 또렷하게 보였다.
특수 제작된 샌드백의 앞.
중심축인 다리를 틀어 가속도를 이용해 발차기를 작렬했다.
발차기를 가르쳐준 신유성과 어딘가 닮은 자세. 김은아는 평소에 꾸준히 필라테스를 한 덕분인지 유연성이 필요한 동작도 물 흐르듯이 소화했다.
파아앙!! 파사사사사-
체육관에 엄청난 크기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찢어진 샌드백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모래. 김은아는 발차기의 파괴력에 짐짓 놀란 모양이었다.
“어, 어어…….”
도대체 언제 자신의 체술이 이렇게 강해진 걸까, 김은아는 뿌듯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게 고생했으면 강해질 만도 하지…….’
신유성의 훈련은 힘든 만큼 김은아를 확실히 강해지게 만들었다.
“은아야. 자세가 엄청 능숙해졌는데?”
어느새 다가온 신유성이 웃으며 칭찬하자. 김은아는 올라가려는 입 꼬리를 참았다.
“흠흠, 그냥 뭐……. 아직은 그냥 볼만한 정도 같고. 이제 감 잡았으니까. 더 빨리 늘겠지.”
겸손한지 거만한지 모를 어투로 이야기하는 김은아. 신유성은 기뻐하는 김은아를 향해 그저 웃어주었다.
‘……물론 나는 7살에 끝냈던 과정이지만.’
김은아는 모르는 충격적인 진실.
신유성의 신체와 무투술은 현역 중에서도 비견할 사람이 없었다. 물론 김은아는 그 사실도 모른 채 뿌듯한 표정으로 검지로 코를 슥- 닦았다.
“이제 주먹만 배우면 발차기는 마스터한 거 같아. 주먹은 좀, 무게가 안 실린다고 해야 하나?”
신유성에게 김은아의 발차기는 귀여운 수준이었지만. 신유성은 기꺼이 칭찬을 해주었다.
“그러네. 발차기는 이 정도면 더 배울 필요가 없겠어.”
신유성은 김은아를 가르치기 위해 옆으로 걸어갔다.
“아마…… 주먹에 힘이 실리지 않는 건, 무게 중심 때문일 거야.”
발차기는 비교적 허리까지 틀며 제대로 데미지를 적중시켰지만. 아직 김은아는 상대방에게 깊이 주먹을 질러 넣지 못했다.
“좀 더 은아 네가 생각한 것보다. 이렇게 깊이…….”
가볍게 질렀는데도 신유성의 주먹은 엄청나게 빨랐다.
파앙!
귀가 얼얼한 살벌한 파공음.
“오 ……신기하네.”
김은아는 신유성을 따라 자세를 잡았다.
“약간 이런 느낌인가?”
“좀 더 이렇게 팔을…….”
이번에도 자세를 잡아주기 위해 김은아의 팔뚝부터 손목을 부드럽게 하나하나 만져주는 신유성. 김은아는 안쪽의 부드러운 살에 신유성의 손가락이 닿자. 괜히 헛기침을 했다.
“……크흠! 조, 좀 쉬고 할까?”
“좋아. 컨디션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니까.”
평소처럼 순수한 얼굴로 웃어주는 신유성. 김은아는 멀찍이 거리를 두더니 그런 신유성을 바라보며 점점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이 녀석. 요새 들어 스킨십에 능숙해진 기분인데…….’
하지만 김은아의 의심은 신유성의 순수한 얼굴을 보자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냥 기분 탓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