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부실에 감도는 진지한 분위기.
에이미는 준비했던 영상을 포켓으로 틀어주었다. 칙칙한 마족의 성에서 유독 빛나는 아름다운 금발의 로렐라이.
[……빛이 어둠을 심판하리라.]
로렐라이가 손을 뻗자. 옆에 있던 성자의 구에서 환한 빛이 쏟아졌다.
사아아아!!!
끔찍한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지르는 마족들. 빛에 타오르는 언데드들과 그 자리에서 무너져버리는 스켈레톤. 스미레는 영상에 놀랐는지 입을 가리고 있었다.
“이, 이건…….”
“……역시 충격적이지? 에휴.”
에이미는 그런 스미레의 반응에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거 무려 유니크 아이템이래.”
“뭐!? 유니크?”
유니크라는 단어에 깜짝 놀라는 김은아.
“그것도 기껏해야 7일 밖에 사용 못하는 걸…… 학생이 사용했다고?”
김은아의 반응은 당연했다. 유니크는 레어보다도 한 단계 높은 등급. 고층의 탑에서도 유용하게 사용 될 수 있는 귀한 보물이었다.
“아무래도 6급 던전 공략도 있고, ……국가대항전도 있잖아?”
에이미의 이야기에 모두의 시선이 스미레를 향해 모였다. 다른 학생들은 몰라도 사령술사인 스미레에게 성자의 구는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스미레는 신유성을 바라보더니 결심을 한 듯 주먹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저, 저는 그래도 최선을…….”
“아니, 스미레.”
그러나 신유성은 그런 스미레를 가로 막았다.
“스미레. 그건 허락할 수 없어.”
단호한 신유성의 목소리.
신유성은 탑의 기록에 적힌 성자의구 효과를 읽어주었다.
“성자의 구에 당한 언데드는 전투력의 8할을 잃게 돼. 그것도 영구적으로.”
저런 강렬한 빛의 마나에 휩싸인 언데드가 멀쩡할 리가 없었다. 특히 듀라한이 된 데런과 서큐버스인 릴리스는 계약이 된 사역마. 그들의 전투력이 낮아지는 건 사령술사인 스미레에게 치명적이었다.
“설령 이번 경기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파티원인 네 전력을 상실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자신을 아껴주는 신유성이 설명에 스미레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미는 스미레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맞아. 스미레. 이번 대항전은 파티장님 말씀대로 쉬고 있어. 상대가 너무 안 좋은 거 같아.”
짐짓 심각해진 분위기.
김은아는 파티원들을 둘러보더니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유성이랑 내가 들어가면. 스미레의 빈자리엔 누가 들어갈 건데?”
꿀꺽.
에이미는 침을 삼키더니 흐, 흐흐- 실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에이미는 A반이긴 했지만 특성의 특수함 때문에 세븐넘버조차 아니었다.
“……여, 역시 이렇게 된 건가. 좋아! 보여주지, 여기선 가온의 자랑인 내가!”
그런데도 방송인이 아닌 헌터로서 용기를 내는 에이미. 김은아는 풋- 하고 웃더니 에이미의 아픈 곳을 찔렀다.
“네가 무슨 가온의 자랑이야. 너 아델라한테 2초 만에 박살났잖아.”
“으, 으윽! 그건 내가 약한 게 아니라아……. 아델라가 너무 강한 거라구우우…….”
짧아도 너무 짧은 기록 2초.
신유성은 담담하게 생각에 빠졌다. 스미레가 성자의 구에 의해서 빠지게 된 지금. 신유성이 생각해둔 적임자는 따로 있었다.
‘역시 마지막 자리는…….’
* * *
벨로체 아펠리온.
42세의 나이로 시계탑 아카데미의 교장 자리에 오른 그녀는 의외의 손님에 눈을 가늘게 떴다.
“……가온 아카데미의 교장님께서 여기까진 어쩐 일이실까?”
실내에서 낀 선글라스를 올리며 웃어 보이는 벨로체. 진병철은 자신의 안경을 만지작거리더니 길길이 날뛰었다.
“어쩐 일? 안 본 사이에 꽤나 능청맞아졌군! 대항전 장소로 뜬금없이 시계탑을 장소로 부탁한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국가대항전의 2차전.
영국 헌터 협회가 시합의 장소로 선택한 곳은 로렐라이가 재학 중인 시계탑 아카데미였다.
“음? 왜 그래? 열을 다 내고? 그게 그렇게나 ……화를 낼 일인가?”
여유롭게 웃는 벨로체의 모습에 진병철은 씩씩거리던 숨을 멈추고, 자신의 콧수염을 만지며 오히려 느긋하게 피식 웃었다.
“좋아,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지.”
벨로체는 흠- 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
“그래. 생각! 네가 어디에 어떤 술수를 숨겨놨을지 모르는 위험한 장소에서 경기를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 아닌가?”
“그건 억측이야. 시계탑 아카데미를 경기 장소로 부탁한 건…….”
벨로체가 이마에 손을 짚으며 설명을 하려하자. 진병철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설명은 내가 아닌 조사단에게 하도록 해! 강유찬 협회장님께도 직접 말씀 드릴 테니까 말이야. 유성이의 스승과 협회장님이 각별한 사이인 건 알고 있겠지?”
조사단부터 시작된 익숙한 이름들의 나열. 당황한 벨로체는 여유로움을 온데간데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진짜 너 왜 그래! 별 거 아닌 일을 그렇게 크게 만들어야겠어? 그냥 홍보차원에서 부탁한 거야! 학교 홍보도 되고 좋잖아. 응?”
갑자기 너무 싹싹해진 벨로체의 태도. 아무리 권력을 가진 그녀라도 이번 일을 협회간의 파벌싸움으로 키우고 싶진 않았다.
“그 말을 나에게 믿으라고?”
“아니 당연히 믿어야지. 미스터 병철. 나도 너랑 같은 교육자야. 비겁한 짓 안 한다니까? 내가 누구야? 우리 같이 아펠트 성 공략했던 거 다 잊었어?”
벨로체가 꺼내는 옛날이야기에 점점 눈이 가늘어지는 진병철. 벨로체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 솔직히 이번 대회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데. 경기장에서 하는 건 아깝잖아.”
“그게 우리 가온에서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아니지.”
진병철의 단호한 대답에 상황 파악이 끝난 벨로체는 바로 저 자세로 손을 모았다.
“그냥 홍보를 겸하는 거지, 욕심 날 만하잖아. 응?”
벨로체는 검지를 보여주며 ‘한번만’이라고 작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정말이지 영락없는 한국인.
진병철과 함께 지내며 옮은 버릇 중 하나다.
“말했을 텐데. 시계탑 아카데미는 네가 무슨 수작을 부렸을지 모른다고. 그리고 지형도 모르는 우리 학교 학생들이 당연히 영국 학생들보다 불리하지 않은가?”
진병철이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자. 벨로체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깊이 생각에 빠졌다.
‘……저 고집쟁이가 그냥 넘어 가주진 않을 텐데.’
진병철은 고집이 얼마나 심한지 벨로체가 충고를 한 적도 있었다.
[알아? 사나운 개는 콧등 아물 틈이 없대.]
걸핏하면 상급자와 치고받는 진병철에게 벨로체가 해주었던 속담.
벨로체는 진병철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좋고, 저 녀석도 인정할 만한. 타협점.’
벨로체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아- 하고 다시 여유롭게 웃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너희 학생들을 미리 보내줘. 조사를 위해서 교사진도 몇 명 섞어서. 좋지?”
“……학생들을?”
진병철은 벨로체를 여전히 의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벨로체는 그런 진병철에게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미리 학생들이 아카데미 지형도 파악도 하고. 교수진들이 아카데미를 조사하면 의심은 해결이잖아?”
“……크음. 넌 괜히 일을 귀찮게 만든단 말이지. 그리고 우리 쪽 인력 소모도 생각해야지!”
진병철이 인상을 쓰자. 벨로체는 품위 있는 걸음으로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푸욱.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는 교장 벨로체.
“왜 그래~ 이번만 좀 도와줘 좋은 기회잖아? 너희 학생들한테도. 교수진한테도 든든하게 지급할 테니까.”
시계탑이 국가대항전의 경기 장소로 나온다면 명문이 많은 영국에서도 단연 돋보일 수 있었다. 교장인 벨로체에겐 절호의 기회. 푼돈을 아낄 때가 아니었다.
“견학 지원금 형태로 학생들은 전부 너희 돈 5천. 조사교수들은 1명당 1억. 어때? 수고에 비하면 괜찮지 않아?”
진병철은 벨로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 걸 보면 결백해 보이는 상황.
진병철은 가온의 교장으로서 벨로체에게 경고했다.
“……벨로체. 우리 학생들이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 어떤 불이익도 있어선 안 된다. 알고 있겠지?”
하지만 벨로체는 옛 동료로서 진병철을 보며 웃었다.
“여부가 있겠어? VIP로서 최상의 대우를 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
* * *
신유성. 스미레. 김은아. 에이미.
가온을 대표하는 4명의 학생들과 교수 중에서 직접 참여의사를 밝힌 린샤오와 소해정이 차분하게 시계탑 아카데미의 중앙으로 걸어왔다.
칼같이 도열한 영국의 학생들.
에이미는 그들의 정돈된 제식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쟤들 각 좀 봐. 매일 이것만 연습하나봐.”
이건 한국 팀들을 위한 환영식이자 기선제압을 위한 시계탑 아카데미의 퍼포먼스.
척척척-!
발소리를 낸 선두의 그룹이 1층의 입구를 향해 파앗- 고개를 돌리자. 금발의 소녀가 차분한 발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영국의 공주.
마녀의 제자.
시계탑의 오라클.
거창한 호칭들과 달리 로렐라이는 인형처럼 자그마한 소녀였다.
감정이 없는 듯 무표정한 얼굴.
로렐라이는 한국의 대표인 신유성에게 인사를 했다.
“……시계탑의 오라클인 로렐라이 코넷입니다.”
로렐라이는 교복 치마를 잡고 살짝 몸을 낮추었다. 정통성을 강조하는 시계탑 아카데미답게 영국의 왕실에서나 볼법한 고리타분한 인사였다.
압도적인 키 차이 때문에 고개를 들어 신유성의 얼굴을 마주보는 로렐라이.
“반가워. 로렐라이.”
신유성도 마찬가지로 웃으며 인사를 해주자. 로렐라이는 신유성의 얼굴을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 ……네!”
시계탑의 오라클.
신유성에게 다급히 대답을 한 로렐라이의 볼은 한 번도 본적 없는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