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콰앙! 쾅! 쾅!
라큘이 거대한 검을 휘두를 때마다 불꽃이 튀기고, 해골들의 뼛조각이 이리저리 튀었다.
라큘은 상대를 압살하고, 전투의 광기에 취할수록 강해지는 광전사.
스미레가 만들어낸 언데드 군대를 상대로도 엄청난 전력을 과시했다.
[상대는 디버프에 걸려 있습니다.]
[이름:저주 받은 왕녀의 축복]
[효과:24시간 동안 전투력이 50% 절감합니다.]
하지만 스미레는 홀로그램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던전에 오기 전부터 스미레는 이미 라큘의 조사를 끝냈다.
1일을 간격으로 뒤바뀌는 저주와 축복. 버프가 걸린 라큘은 네임드가 아닌 보스라면 6급과도 견줄 수 있었지만 지금 걸려 있는 건 전투력을 깎는 디버프였다.
콰앙! 캉! 캉!
“……그 누구도! 이 성을 지배할 순 없다! 절대로!”
라큘의 투구에서 새어 나오는 비탄한 음성. 스미레는 왕좌에 앉아 고아한 표정으로 그 전투를 내려다보더니 검지를 들었다.
사아아-
홀로그램의 입자가 흩어지며 검지에 끼워진 반지. 스미레는 빙긋 미소를 짓더니 손을 앞으로 뻗었다.
“어둠은 태양을 가려라.”
여왕의 청아한 음성.
라플라스가 스미레에게 선사해준 특성은 너무나도 특별했다.
[마녀의 흑마술은 <불사자의 반지>에 담긴 힘을 한층 더 끌어낼 수 있습니다.]
[마녀의 흑마술이 절망의 암운을 강화합니다.]
[마녀의 흑마술이 사역마들을 강화합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특성의 힘을 강화하고. 아티팩트는 물론 그곳에 담긴 스킬까지 강화하는 라플라스의 특성.
절망의 암운이 고성의 천장을 덮자 해골들의 눈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일어나라.”
스미레가 허공에서 손을 휘이- 저어버리자. 부서졌던 뼛조각들이 다시 일어나고 바닥에서 구울들이 솟구쳤다.
왕좌에 앉은 스미레의 마나는 한계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유희를 감상하듯이 사역마들의 전투를 지켜볼 뿐.
“……주인님의 힘이! 온몸에!”
“힘이, 넘친, 다…….”
특히 스미레의 총애를 받는 릴리스와 데스나이트는 환희에 찬 비명을 질렀다.
라큘의 힘은 약해지고.
스미레의 사역마들은 강해진 상황.
쫘아악!! 휘리릭!
“후훗! 그런…… 느려터진 검으론 절대 주인님께 닿을 수 없단다.”
릴리스는 전투에 자신이 있는 사역마도 아니었지만 라큘과 비등하게 맞붙고 있었다.
“네놈!”
라큘의 투구에선 망자의 기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평범한 학생들이라면 도망을 쳐도 이상하지 않을 위압감. 하지만 스미레의 군대는 공포가 없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망자의 군세.
구울들과 스켈레톤이 쏟아지고 릴리스가 채찍으로 움직임을 묶어둔 사이, 데스나이트는 대검으로 라큘의 머리를 내려쳤다.
콰앙!
풀썩! 쿵!
보스조차 감당하기 힘든 충격.
라큘이 무릎을 꿇으며 제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무거운 갑옷이 바닥에 부딪히며 울려 퍼지는 둔탁한 소리.
그그그그-!
쓰러진 라큘은 검은색 기운을 뿜어냈다. 그와 동시에 피처럼 붉게 물들어가는 라큘의 검은 망토.
스미레의 안전을 위해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신유성은 느긋했던 자세를 고쳐 잡았다.
“……두 번째 페이즈군.”
스윽- 쿵!
라큘이 투구를 벗어 내려놓았다.
지금껏 억눌려 있던 광전사의 힘을 깨우고 진짜 힘을 개방하는 의식. 라큘은 5급 보스 중에선 보기 드문 ‘각성’이라는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이건 위험할지도 모르겠는걸.’
꾸욱-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신유성이 자세를 잡으며 주먹에 힘을 주자. 스미레는 다급하게 신유성의 손을 잡았다.
“아, 안 돼요. 유성 씨…….”
“스미레?”
방금 전에 보여주었던 고혹적인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순한 양처럼 웃어 보이는 스미레. 하지만 평소의 순수한 웃음과는 느낌이 달랐다.
스윽-
스미레는 신유성의 손을 잡아 스스럼없이 자신에게 잡아당겼다. 평소라면 부끄러워서 하지 못했을 행동.
“겨우 이 정도 상대로 유성 씨의 손을 더럽힐 순 없으니까.”
스미레는 라플라스의 왕좌에 신유성을 앉혔다. 자신이 언데드들의 여왕이라면 스미레가 따르는 건 파티장인 신유성이었다.
스윽-
스미레가 신유성의 허벅지에 앉았다. 그리곤 신유성의 몸에 달라붙어 꿀 떨어지는 눈으로 얼굴을 바라보는 스미레.
“저런 녀석은 제가 처리할 테니까. ……유성 씨는 절 믿고 여기서 기다려주실래요?”
스미레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자 신유성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파티원을 믿는 건 언제나 신유성이 해왔던 일. 스미레의 부탁은 어렵지 않았다.
“스미레. 널 믿을게.”
결국 미소를 지어주는 신유성. 스미레는 황홀한 듯 배시시 웃더니 신유성의 볼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고혹적인 언데드의 여왕이 신유성에게만 순한 토끼처럼 변하는 모습. 지금 스미레의 행동은 평소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신유성의 앞에서만 해당하는 이야기.
파아아앙!
2번째 페이즈인 각성을 끝낸 라큘.
맨얼굴을 드러낸 라큘의 두 눈에선 광전사의 상징인 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내렸다.
“네놈의 목을 베어 이곳에 전시하겠다!”
광귀에 휩싸인 라큘은 엄청난 기세로 스미레에게 달려들었다.
언데드의 군세를 막으려면 사령술사인 스미레를 치는 건 상식 중의 상식.
쩌억!
하지만 릴리스는 채찍으로 라큘의 오른팔을 묶어버렸다.
“어딜?”
“주, 인님은, 내가 지킨, 다…….”
쿠웅!
데스나이트는 대검을 던지고 양팔로 라큘을 붙잡았다. 사역마를 다루는 것에 있어 마나를 사용하는 만큼 본체인 사령술사는 약하다는 게 세간의 상식이다.
그게 바로 라큘이 스미레를 노린 이유. 그러나 라플라스의 총애를 받고 있는 스미레는 달랐다.
사아아!
헌터들을 상대로 사역마들과 함께 싸웠던 마녀 라플라스처럼 스미레의 특성은 전투에서도 빛을 발했다.
쩌억!
갑자기 포탈이 공간을 찢으며 생겨나듯이 라큘의 가슴을 꿰뚫어버린 검은색 기운.
“이, 이건?”
라큘은 고개를 내린 채 가슴에 박힌 검은색 기운을 바라보았다.
그 가슴에 박힌 건 라플라스의 힘으로 가공된 스미레의 마나.
스킬이라기보다는 라플라스의 흑마술에 근간을 둔 마나 변환의 일종이었다.
라플라스의 힘과 스미레는 그야말로 축복받은 상성.
스미레의 몸에는 마나가 넘쳐나고, 타고난 잠재력으로 그 변환 또한 빨랐다.
그렇기에 빠르고.
그렇기에 강력했다.
라플라스가 내려준 힘은 원석과 같았던 스미레의 재능을 백분 살릴 수 있었다.
꽈악!
냉소를 지은 스미레가 무언가를 터트리듯 허공에서 주먹을 쥐었다.
라큘에겐 사형선고와 같은 기술.
파바바바바박!!
스미레의 검은색 기운은 라큘의 몸을 고슴도치처럼 꿰뚫었다.
비록 디버프에 걸렸지만 5급 보스를 상대로 보여주는 압도적인 실력의 차이.
쿠웅!
라큘의 몸이 쓰러지자 해골들은 저마다 팔을 들어 승리를 자축했다.
[라큘을 처치하셨습니다.]
스미레는 라큘이 있던 자리로 사뿐사뿐 다가갔다.
[라큘의 시체에서 강대한 힘의 원천이 느껴집니다.]
[힘의 원천을 사용해 마녀의 권능을 발동하실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권능: 애니메이트 데드]
[효과: 사자(死者)의 힘으로 사역마를 만들어냅니다.]
[두 번째 권능: 퓨전 언데드]
[효과: 사자(死者)의 힘을 사역마에게 융합시킵니다.]
애니메이트 데드.
퓨전 언데드.
두 스킬은 모두 5급 이상의 보스를 처치해야 사용이 가능했다.
대신 보스를 잡는 만큼 강해질 수 있는 사기적인 스킬. 스미레는 언데드의 여왕으로서 권능을 발휘했다.
“이번에는 두 번째 권능이 좋겠네요. 제겐 이미 든든한 기사가 있으니까요.”
사아아!
스미레가 손을 움직이자. 라큘의 힘은 반딧불처럼 빛을 내며 공중을 유영하더니 데스나이트의 몸에 깃들었다.
“크, 크학! 이! 이, 힘은!”
파앙!
갑자기 데스나이트의 몸이 역소환이 되며 사라졌다.
[퓨전 언데드 발동.]
[데스나이트 X 검은 기사 라큘]
[데스나이트가 라큘의 힘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어떤 힘을 계승하게 될지는 퓨전이 끝날 때까지 알 수 없습니다.]
[적용이 될 때까지 남은 시각 48시간.]
그와 동시에 떠오른 홀로그램.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주인님.”
릴리스와 언데드들의 경배를 받으며 스미레는 신유성에게 다가갔다.
사뿐.
이번에는 신유성의 위에 앉아 머리를 기대는 스미레.
“……저어, 잘했으니까. 칭찬해 주실 거죠?”
스미레는 마치 주인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평소의 스미레라면 절대 볼 수 없는 애교. 하지만 라플라스의 영향으로 솔직해진 스미레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그럼. ……전투도 끝났으니.’
신유성이 여느 때처럼 스미레의 장식을 떼어내려고 하자. 스미레의 손이 꾸욱 신유성의 손을 잡았다.
“이건 반칙이에요.”
조금 입술을 내밀더니 뚱한 얼굴로 신유성을 바라보는 스미레.
‘어쩔 수 없네…….’
신유성은 결국 스미레의 소원대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 으흐흐…….”
신유성의 손길에 이상한 소리를 내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스미레. 신유성은 그저 웃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