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밤 12시.
달빛이 비치는 밤.
신유성은 의자에 앉아 유리 너머로 까맣고 아득한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쏴아아아!
마치 섬 전체가 잠겨 버릴 듯 계속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소리.
철썩!
무언가에 부서지는 파도의 소리.
빗물들이 쏟아지고, 이동하고, 넘실거리며 만들어내는 시끄러운 아우성은 신유성에겐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많이 바뀌었구나.’
하지만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었다.
지금의 신유성은 굳이 과거의 기억에 얽매이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신오가문을 떠날 수 있었던 건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오히려 실력지상주의를 표방하던 신오가문에서 버림받았기에 신유성은 너무나 좋은 인연들을 만날 수 있었다.
버림받았던 자신을 길러준 스승인 유원학. 올곧게 자란 신유성이었기에 함께 할 수 있었던 동료들.
“……아, 유성 씨.”
문을 열고 나온 스미레는 신유성을 보고 작게 속삭였다.
“……주무시고 계실 줄 알았어요.”
그렇게 말을 하며 신유성의 맞은 편에 앉아 싱긋 웃는 스미레. 신유성도 같이 웃어주자. 스미레는 함께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비, 정말 많이 오네요.”
“다행이지. 내일 공략 중에는 내리지 않는다고 하니까.”
표정이 평소보다 무거워 보이는 와중에도 공략의 이야기를 하는 신유성. 스미레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유성 씨는…….’
자신들에겐 언제나 힘이 되어주려 하지만 정작 신유성은 스미레와 동료들에게 고민을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스미레는 신유성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었다. 지금처럼 비가 오는 날. 말없이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땐 더욱 그랬다.
신유성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고민을 하는지 서로 공유하고 싶었다.
같이 함께 하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신유성에게 배웠으니까.
‘내게 그걸 가르쳐 주신 건 유성 씨였는데…….’
스미레는 정작 신유성의 힘이 되어줄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이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에겐 지나친 욕심. 스미레는 그렇게 생각을 하며 자신의 마음을 꾹꾹- 눌렀다.
“……유성 씨.”
홀린 듯 신유성을 부르는 스미레.
“왜, 스미레?”
창가를 바라보던 신유성이 시선이 스미레를 향하자. 스미레는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네? 아, 아뇨. 그냥…….”
결국 스미레는 말을 더듬더니 평소처럼 옅게 웃고 말았다.
“하, 항상 감사하다고……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조금 더 다가가고,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결국 속마음을 묻어버린 스미레.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신유성을 보며 스미레는 생각했다.
‘지금은…… 이거면 돼.’
* * *
살짝 열린 방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 김은아는 부스스- 해진 머리카락을 만지며 잠에서 일어났다.
“하으음…….”
늘어진 하품을 하며 터벅터벅- 거실로 걸어 나온 김은아.
숙소는 인기척이 없이 너무나도 조용했다.
“……얘들아?”
김은아는 눈을 비비며 방을 확인했지만 숙소에는 신유성도 스미레도 없었다.
숙소에 남아 있는 건 랩에 씌워진 채로 식탁에 놓인 오므라이스.
[아침은 꼭 드셔주세요!]
[은아 씨를 누구보다 아끼는 스미레 남김♥]
“둘 다 어디 갔데…… 나두 좀 데리구 가지.”
조금 투덜거리긴 했지만 김은아는 스미레가 두고 간 오므라이스를 우물우물 잘도 먹었다.
* * *
톡톡!
스미레는 긴장한 자신의 볼을 두드리더니 포켓의 정보를 확인했다.
[보스 이름: 검은 망토의 라큘]
[※주의 사항: 특성이 아주 강력하니 미리 확인하고 조심 할 것! 크게 당할 수도 있음... (。•́︿•̀。)ㅠ]
[특성: 버림받은 왕녀의 축복]
[효과: 24시간을 번갈아 가며 라큘에게 버프와 디버프가 적용. 버프 중에는 마나와 신체 능력이 2배. 디버프 중에는 50% 전투력이 4배 차이! (๑•̀ㅁ•́๑) /]
오괴도의 유일한 언데드 던전.
폐허가 된 성의 보스인 검은 망토 라큘. 이번 스미레의 도전은 일본과 했던 합동 공략을 제외하면 5급 보스를 처음으로 공략하는 것이기도 했다.
심지어 수련을 위해 라큘에게 도전하는 건 스미레 혼자.
신유성은 참전하지 않고 스미레의 도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공략이 힘들다 싶으면. 바로 참전하도록 할게.”
신유성의 이야기에 스미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맡겨주세요!”
5급 보스가 상대임에도 스미레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승리할 수 있다며 자신을 다독이고 있었다.
‘라큘은 디버프를 받았고, 여긴 언데드 던전. 상황은…… 내게 엄청, 엄청 유리해. 분명 할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며 신유성의 얼굴을 바라보던 스미레는 힘차게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녹슨 거대한 문이 열리며 퍼져나가는 소름 끼치는 소리.
검은 기사 라큘은 폐허가 된 왕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누구, 인가……. 나의 잠을 깨우는 이가?”
지키지 못한 왕녀를 대신해 언데드가 되어 영원히 고성을 떠도는 비운의 기사.
5급 보스.
라큘의 등장과 함께 뿜어져 나온 살기에 스미레는 온몸이 저릿했다.
하지만 스미레는 라큘을 바라보는 눈에 힘을 준 채, 천천히 머리핀으로 손을 올렸다.
그와 동시에 멈춰버린 세상.
스미레의 시야는 검은색 구름에 휩싸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눈앞에서 구름이 걷히자.
- 오랜만이구나.
폐허가 된 고성의 풍경은 라플라스의 성으로 변해 있었다.
- ……상대가 5급 보스라니. 너도 제법 성장한 모양이구나.
언제 나타났는지 고혹적으로 웃어주는 라플라스.
“네? 아, 아뇨! 모두…… 라플라스님이 빌려주신 힘 덕분이에요.”
스미레는 라플라스의 칭찬에 다급하게 손을 젓더니 겸손을 떨었다.
- 후훗, 아이야. 나와 파장이 맞는 것도. 너의 재능이고. 나를 만난 것도 너의 운이 아니겠느냐?
라플라스는 스미레를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라플라스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 그리고 너도 나만큼이나 참 고생을 하겠구나. 저리도 둔감한 사람을 마음에 담다니. 어찌 그런 부분까지도 닮은 건지…….
스미레는 라플라스의 말이 누구를 뜻하는 건지 뒤늦게 깨달았다.
“네!? 아, 아니에요! 저 같은 게 무슨…… 그, 그런 게 아니라! 저는 그냥! 정말로, 그…… 힘이 되어 드리고 싶어서!”
얼굴까지 붉히며 당황한 스미레의 부정에 라플라스는 입을 가리고 묘하게 웃고 있었다.
- 그래? 후훗, 그런 걸로 하자꾸나. 어차피 나와는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이야기.
라플라스는 스미레를 사뿐히 자신의 왕좌에 앉혔다.
- 모처럼의 만남이지만.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꾸나. 그럼 나의 아이야…… 나의 힘을 마음껏 펼쳐 보거라.
* * *
고오오오-
고성을 가리는 불길한 검은색 기운. 스미레는 주변을 정체불명의 마나로 잠식했다.
천천히 걷히는 검은색 기운.
그러자 왕좌에 앉은 스미레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났다.
“필멸자! 너의…… 죽음으로 왕녀님을 기리겠노라!”
라큘이 검을 들고 소리쳤지만 스미레는 그저 매혹적으로 웃을 뿐이었다.
사아아-
스미레는 다리를 꼰 채로 라큘을 유유히 내려다보았다. 라플라스의 왕좌를 통해 힘을 개방한 스미레. 언데드들은 진정한 여왕의 등장에 무릎을 꿇고 스미레를 맞이했다.
“……우리의 주인을 경배하라.”
모처럼 보인 라플라스의 힘에 릴리스는 전율했고.
“주, 인님을 위해…… 전쟁에서 승리하라.”
일찍이 타락해 기사도 따위 잊어버린 데스나이트 또한 무릎을 꿇고 스미레를 맞이했다.
스윽- 저벅저벅.
왕좌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스미레. 땅에서는 구울들이 기어 나와 그르륵- 울음소리를 냈고, 해골들은 턱뼈를 이용해 딱딱딱- 소리를 냈다.
모두가 기뻐하는 여왕의 행차.
그러나 여왕의 명령은 짧고도 간결했다.
“모두- 총 공격!”
검지를 치켜들며 라큘 가리키는 스미레. 그러자 명령을 기다렸던 언데드 대군은 라큘을 향해 파도같이 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