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36화 (136/434)

제136화

어둑해진 밤의 노천탕(露天湯).

야외의 찬바람과 욕탕의 따뜻한 온기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이게 블랙카드의 휴게 시설.’

너무나도 편안한 감각에 신유성은 대리석에 등을 맞대고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에 들고 싶을 정도야.’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노천탕이 좋아도 밖에선 스미레의 요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련을 마친 신유성에게 스미레의 요리는 최고의 선물.

‘냄새도…… 정말 좋았지.’

신유성은 야망 어린 목표와는 달리 카레 속의 닭튀김 같은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꼈다.

프스스-

느릿하게 팔을 움직이자 손끝에서 흩어지는 욕탕의 물. 신유성은 자신의 신체가 변했다는 걸 느꼈다.

변화의 시작은 시간의 방.

신유성은 특성인 [집중력 강화]를 [초감각 각성]으로 진화 시켰다.

이전에는 단순히 사고가 빨라지고 집중력이 올라가는 정도였다면 초감각 각성이 가진 힘은 인간이 가진 한계를 초월하는 것.

지금의 신유성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만으로. 이전에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몰랐던 마나의 파장들이 이렇게 많이 주위에 존재했다니.’

물에도.

공기에도.

소리에도.

빛과 소리와 마찬가지로, 마나의 파장 또한 물체로부터 반사된다.

그 어떤 헌터도 느끼지 못했을 감각. 이렇게까지 마나의 파장을 확연하게 느끼는 헌터는 신유성이 최초였다.

‘이 힘이라면…….’

마나공명.

마나의 파장이 맞았을 때 일어나는 극히 드문 현상. 하지만 마나의 파장을 볼 수 있는 초감각만 있다면 그걸 직접 유도하고 조종 할 수도 있었다.

마나 공명은 마나로 발휘되는 모든 것을 근본부터 분쇄할 수 있는 힘.

‘……지금까지 이걸 성공한 헌터는 없어.’

신유성은 수련을 통해 특성인 집중력 강화를 갈고 닦았기에 육감이라 불리는 영역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다.

[초감각 각성]은 그 경험들을 시간의 방에서 발휘 했기에 얻을 수 있었던 힘. 즉 [초감각 각성]은 신유성의 경험으로 얻어낸 특성이나 마찬가지였다.

‘……누나의 염동력에 무투파인 내가 대비하기 위해선 이 방법뿐이야.’

지금 신유성이 견제하는 것은 국가대항전의 라이벌들이 아니었다.

신유성이 진정으로 넘고 싶어하는 건 누구에게도 자신의 전부를 보여준 적이 없는 신오가문의 괴물.

신하윤이 신유성을 가지겠다고 선포한 이상. 정면 승부는 피할 수가 없었다.

‘……5살부터 가주에게조차 힘을 숨겼던 사람이야. 그 한계는 누구도 모르겠지.’

신오가문의 유일한 7급. 신강윤.

유수가문의 유일한 7급. 유민서.

그들에게조차 신하윤은 자신의 힘을 숨겨왔다. 그게 신하윤의 성격. 태어난 순간부터 신하윤은 치밀했다. 집어삼킬 수 없다면 절대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다.

거기다 신하윤의 능력은 [염동력].

공격과 수비.

근거리와 원거리.

그 어떤 형태의 전투에서도 자유로웠다. 특히 거리를 좁혀야 하는 신유성 같은 무투파에겐 최악의 상성.

‘빠른 시일 내에 5장을 마스터해야겠어.’

생각을 마친 신유성은 노천탕에서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반신욕으로 피로가 풀린 덕인지, 아니면 생각을 정리한 덕인지 신유성의 몸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     *      *

쏴아아아-

가운을 걸친 채 드라이어기로 머리를 말리는 신유성. 온탕의 열기 때문인지 신유성의 얼굴은 평소보다 붉어 보였다.

스미레는 그런 상태마저 예측한 듯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유성 씨! ……여기!”

스미레가 내민 건 신유성이 평소에 즐겨 마시던 바나나우유.

“엇.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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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레에게 바나나우유를 전해 받은 신유성의 얼굴에는 짐짓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목욕 전후에는 수분을 섭취해주는 게 좋거든요.”

스미레는 그런 신유성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식사 전에 단 음료를 마시는 건 좋지 않지만…… 그래도! 유성 씨는 바나나우유를 좋아하시니까요!”

사소한 부분마저 신경을 써주는 스미레의 성격.

“고마워. 스미레!”

바나나우유에 꽂힌 빨대로 입을 댔다. 쥬으읍- 힘을 주고 빨아 당기자. 입안 가득 퍼지는 바나나의 향과 부드러운 단맛.

바나나 우유를 마시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신유성의 모습을 보며 스미레는 손바닥으로 움찔거리는 자신의 입을 가렸다.

‘유성 씨 귀, 귀여워…….’

학생이라곤 믿을 수 없이 강인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부분에선 너무나 순수한 신유성. 스미레는 그런 신유성을 기꺼이 보살펴주고 싶었다.

“언제 오냐. 유성아~ 나 배고파.”

마침 멀리서 들려오는 김은아의 목소리. 스미레는 아! 하고 놀라며 합장을 했다.

“유성 씨는…… 면이 좋으세요. 밥이 좋으세요?”

오늘 스미레가 준비한 건 돼지고기와 무, 다시마 실파 등을 간장과 함께 끓인 오키나와의 향토요리 소키지루.

스미레는 신유성의 대답에 따라 면과 밥 중에서 하나를 신유성의 식사로 준비해줄 생각이었다.

“난 둘 다.”

하지만 신유성의 선택은 둘 다.

그 대답에 스미레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방법이…….”

신유성이 두 개의 메뉴 중 하나를 택한다는 건 바보 같은 생각.

스미레는 한 수 배웠다는 얼굴로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해맑게 인사를 했다.

“……그럼 유성 씨! 저희는 식탁에서 기다리겠습니다!”

*     *      *

영국 런던. 시계탑 아카데미.

마치 중세의 성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카데미의 정상에는 벽면에 거대한 시계가 달려 있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헌터들을 배출한 시계탑 아카데미는 영국의 어떤 시민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자랑스러운 런던의 상징.

하지만 영국에는 그런 시계탑 아카데미보다도 유명한 존재가 있었다.

첫째는 권왕. 검신과 함께 최강의 헌터라 불린 마녀 아리스.

둘째는 그런 마녀의 유일한 제자이자 1학년의 나이로 시계탑 아카데미를 평정하고 오라클(Oracle)의 칭호를 하사받은 학생.

로렐라이 코넷.

“……정말 틀림없나요?”

청아한 목소리.

눈을 감고 있던 로렐라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름다운 단정한 금발이 찰랑하고 움직였다.

“네. 영국 헌터 협회에서 내려온 정보입니다. 다음 상대 국가는 한국이 확실합니다.”

파티원인 세바스찬은 로렐라이를 너무나도 깍듯하게 대했다.

마치 왕족을 대하는 듯한 모습.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이곳에서 로렐라이는 왕족과 같았다. 런던은 물론 영국 국민 전체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영국의 영웅인 마녀를 이은 유일한 후계자이자. 영국의 헌터계에 새로운 빛을 밝혀줄 희망이었다.

1학년의 나이로 시계탑의 정점에 오른 것이 그 증거.

“그렇군요. 한국……. 한국인가요.”

로렐라이의 작은 중얼거림에 옆에서 있던 안젤라는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음? 로렐라이 님. 혹시 짚이시는 문제라도 있습니까?”

카드의 마술사. 세바스찬.

놓치지 않는 손. 안젤라.

두 남녀는 파티원보단 로렐라이를 모시는 집사 같았다. 그러나 그런 위계를 세운 건 로렐라이 자신이 아니었다. 오롯이 둘의 마음에서 우러난 충심. 유약해 보이는 로렐라이에겐 주변의 사람들을 강하게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아뇨. 안젤라. 문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로렐라이. 너의 스승에겐 꿈이 있단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너만이 이뤄줄 수 있지.]

그 스승님께서 부탁이라니.

제자를 맞이하게 된 것도. 그 제자로 자신을 택해준 것도 모두 변덕. 로렐라이는 누구보다 아리스를 잘 알고 있었다.

로렐라이가 지켜본 아리스는 무언가에 얽히지 않고, 갈망하는 것도 없는 자유로운 사람.

[……위해서라도. 꼭 이겨다오. 로렐라이. 나의 자랑스러운 아가.]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부탁을 하며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로렐라이는 지금도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잠시 떠올리기만 해도 곧바로 가슴이 뛰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줄곧 동경해온 사람의 부탁. 로렐라이는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저……. 스승님이 하신 부탁이 떠올랐을 뿐입니다.”

말을 끝낸 로렐라이는 공허해 보이는 눈으로 손안에서 멈춰 있는 회중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주 오래전, 잃어버린 기억과 함께 로렐라이의 시계는 멈추어 버렸다. 하지만 로렐라이는 시계를 고치지 않았다.

고장 난 시계를 고칠지언정, 지나간 난 시간은 고칠 수 없다.

시계는 멈추어도 시간은 멈추지 않으니까.

그러니 고장 난 자신을 되돌릴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최고의 방법은 그저 지금에 충실할 뿐. 회중시계를 포켓에 집어넣은 로렐라이는 천천히 시계탑의 밖으로 걸어나갔다.

저벅저벅.

문턱을 넘자 펼쳐지는 시계탑 아카데미의 가슴이 벅찬 광경.

로렐라이 코젯.

단 1명의 1학년을 위해서 시계탑 아카데미의 모든 학생들은 도열해있었다. 로렐라이가 나왔음에도 정적을 유지하는 학생들. 아카데미에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건 시계탑 고유의 경건한 의식.

로렐라이의 던전 도전을 축복하기 위해 정적을 깨며 저 멀리 시계탑의 학생회장이 걸어 나왔다.

“……베드라마. 칼트. 오라클에게.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아카데미의 모든 학생들은 로렐라이 파티에게 가호를 내려주기 위해서 한 몸처럼 성호를 그었다.

이것이 그들의 응원이자 기도.

겨우 3명의 인원으로 6급 던전을 공략하러 감에도 로렐라이는 출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2명의 파티원과 함께 묵묵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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