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학원 도시에 유일한 협회 지부.
메이렌은 쏟아지는 수많은 서류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서류 업무만 며칠 째야?”
반나절 가까이를 서류 처리에 바쳤는데도 여전히 책상 위에 쌓인 종이뭉치들. 메이린은 한숨을 쉬더니 포켓에 대고 말했다.
“패스 목록 확인.”
하루 종일 바라봤던 종이 서류보단 홀로그램이 낫겠다는 판단. 마침 확인해야할 대상도 있었다.
“대상자. 신유성.”
[신유성-패스 목록 확인]
[탑 2층 클리어]
[히든 스테이지 발견(시간의 방)]
[히든 스테이지 도전(시간의 방)]
[히든 스테이지 클리어(시간의 방)]
[보상:특성 강화]
홀로그램을 바라보며 멍해진 메이린의 눈.
“……어?”
단말마를 뱉더니 한 순간에 또렷해진 메이린의 눈.
“히, 히든 스테이지?”
상식을 벗어난 신유성의 기록에 메이린은 꿀꺽 침을 삼켰다. 학원 도시의 지부장인 그녀가 이렇게 당황하는 건 몹시 드문 일. 하지만 신유성의 기록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정말…… 히든 스테이지를 발견하고 클리어했다고? 그것도 첫날?”
기록을 보아하니 신유성은 2층을 클리어하며 히든 스테이지의 등장 조건을 만족시켰다. 그것만으로도 놀랄 일.
“……이게 가능해?”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겁도 없이 히든 스테이지에 도전하고 클리어까지 해냈다는 점이었다.
꿀꺽.
도대체 이 학생은 뭘까?
‘……역시 한국의 정점. 아니, 그 이상이 되는 것도 절대 먼 이야기가 아니야.’
메이린은 지긋지긋한 서류들을 스윽- 훑어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겨우 1학년에 불과한 신유성의 히든 스테이지와 특성 강화라는 보상.
‘협회장님께 보고 드려야겠어.’
밀린 서류의 중요성은 신유성의 활약에 한참 밀리고 말았다.
* * *
갈색과 흰색으로 깔끔하게 디자인 된 가온의 2층 복도.
저벅저벅.
신유성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복도를 거닐었다. 이렇게 복도를 걷고 있으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게 많다.
“……에이, 아무리 현역이랑 같이 가도 위험하지 않냐? 3급 보스를 어떻게 잡아?”
“우린 그냥 구경만 하면 삼촌이 잡는다니까? 그 다음 서류에 한 줄 적는 거지. 1학년 때 3급 보스 공략!”
“길드 가입할 땐 좋겠네.”
2층에 사람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1층에서 떠들고 있는 두 명의 학생.
저벅저벅.
“요새 S반 애들 분위기 왜 그래? 뭔가 싸운 거 같던데.”
“몰랐어? 이채현이랑 민성혁 요새 장난 아니잖아.”
“반장 자리 때문인가…….”
“왜~ 호랑이 없는 곳은 여우가 왕이라고~”
낄낄거리며 지나가는 B반의 학생들. 이야기를 들은 신유성은 생각에 빠졌다.
‘……아델라가 이탈리아로 갔기 때문인가.’
분명 아델라가 이탈리아의 대표로 참가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단순히 1대1 대련이 아닌, 국가 대항전의 새로운 룰로 싸우게 된다면 아델라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강적.
‘그래도 난 새롭게 얻은 특성과 천년옥의 힘이 있어…….’
문제는 팀원들의 실력을 끌어 올려야 했다. 다행이 스미레도 라플라스의 간택을 받으며 이미 엄청난 힘을 얻은 상태.
‘……스미레는 좀 더 마녀의 편린이 가진 힘을 활용할 수 있도록 전략적인 부분을 가르쳐야겠어.’
이미 예전보다 훨씬 강해진 스미레는 파티장으로서 크게 손을 댈 구석이 없었다. 지금의 성장세만 유지해줘도 전력은 충분.
‘오히려 전력을 늘린다면 은아 쪽이겠군…….’
오히려 신유성의 눈에는 김은아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게 전력 보강에 유리해 보였다.
전체적인 등급은 A급이지만 김은아가 가진 전기 특성의 잠재력은 S+. 특히 파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문제는 그 힘을 다룰 수 있는 집중력과 안전성.
‘지금 은아에게 부족한 부분은. 내가 가르쳐줄 수 있는 부분이야.’
그래서 신유성이 계획하고 있는 건 김은아의 단독 수련.
‘역시 은아에겐…….’
야생에서 살아남기.
맨몸으로 폭포 맞기.
마나 강화로 추위에서 버티기.
신유성은 권왕에게 배운 수많은 수련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 수련이 좋겠지.’
하지만 신유성에겐 이미 정해둔 수련이 있었다.
* * *
햇빛이 쏟아지는 부실.
긴장한 김은아는 심각한 표정으로 초콜릿이 담긴 상자를 바라보았다.
‘……어, 어쩌다 이렇게 됐지?’
첫 시작은 이수현과 같이 본 드라마였다. 이야기가 나온 건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다이아 반지를 선물하는 장면.
[흐윽, 태수 씨! 저는…….]
남자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고 있는 여주인공을 보며 김은아는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었다.
[반지 받았다고 저렇게 좋아하냐? 저 남자 때문에 목숨도 위험했잖아. ……솔직히 나는 둘이 사귀는 것도 이해 안 가는데.]
드라마의 몰입을 깨는 김은아의 투덜거림. 이수현은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당연히 좋아하죠. 선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거라고요. 물론…….]
이수현은 김은아를 훑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가씨는 너무 돈이 많으셔서 다이아 반지로는 성의 표현도 안 되지만…….]
[성의?]
이수현의 말에 가만히 드라마를 보던 김은아는 관심이 없다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럼…… 어떤 선물이 성의 있는 건데?]
하지만 이수현은 이미 김은아의 생각을 눈치챈 상태. 김은아가 들으라는 듯이 넌지시 말했다.
[아가씨의 경우에는 역시 손수 만든 물건 아닐까요? 초콜릿이나. 목도리 같은 거?]
지금의 상황은 그 꼬드김에 넘어간 결과. 김은아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초콜릿이 담긴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오버했나. 초콜릿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
물론 지금이 발렌타인데이는 아니었지만 초콜릿은 자신이 좋아하는 이성에게 주는 선물.
‘그냥 빠진 게 미안해서. 선물이나 주고 싶었는데…….’
준비할 땐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초콜릿은 신유성의 얼굴이 캐리커처로 만들어진 우정의 선물.
막상 그걸 선물하려고 하니 김은아는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그리고 뭐라고 주면서 말하지? 그냥 주면 이상한데. 오해할 수도 있고…….’
김은아가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진 와중에 벌컥 문이 열렸다.
“은아야. 마침 있었구나?”
평소와 같은 신유성의 인사.
하지만 김은아는 화들짝 놀라더니 상자를 등 뒤로 숨겼다.
“어엉? 나, 나도! 방금 왔어!”
김은아는 상자를 숨기고 나니 자신의 행동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니 왜 나는 초콜릿 주는 걸로 쫄고 난리야?’
뒤늦게 밀려오는 창피함에 입술을 우물거리는 김은아.
“그…… 탑 다녀왔다며?”
김은아가 슬쩍 시선을 흘기며 묻자 신유성은 냉장고에서 바나나 우유를 꺼내며 담담하게 답했다.
“응. 쉬웠어. 기껏해야 2층이니까.”
풀썩.
아무렇지 않게 소파에 앉은 신유성은 탑에서 경험했던 정보를 김은아에게 말해주었다.
“내 계획은 워프가 작동하지 않은 5층까지 내가 미리 클리어를 해두고, 5층부터 파티원과 함께 공략을 할 생각이야. 물론 다음 국가 대항전 준비도 마쳐야겠지만…….”
“그래? 뭐, 괜찮지. 5층이랑 10층까지는 3급 4급 헌터들도 깰 수 있다고 하니까…….”
김은아는 여전히 눈치를 봤다.
언제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꺼내야 이상하지 않을까, 긴장되는 순간.
툭.
김은아는 정공법으로 초콜릿이 담긴 상자를 신유성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은아야. 이건…….”
신유성의 질문에 민망함으로 얼굴이 붉어진 김은아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 그냥 초콜릿. 대항전 때 미안하기도 하고…… 탑도 클리어 했기도 하고…….”
김은아는 그렇게 온갖 이유를 붙이더니 뒤늦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너 단 거 좋아하잖아.”
단 음식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신유성의 취향을 생각한 선물. 신유성은 미소를 지으며 받아 들더니 김은아를 불렀다.
“은아야.”
“……뭐.”
대답을 하기도 말을 꺼내기도 민망한 간지러운 분위기. 이건 김은아가 평소에 드라마를 보면서도 느끼하다며 으으- 하고 질색을 했던 제일 싫어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하자 말없이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 김은아.
신유성은 그런 김은아의 마음에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직접 선물을 준비하다니 김은아의 성격을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덕분에 긴장했던 김은아의 얼굴은 한결 풀린 분위기였다.
“뭐 별거라고…….”
덕분에 은근히 뿌듯해하며 말까지 건네는 김은아. 신유성은 그저 말없이 웃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