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27화 (127/434)

제127화

탑의 1층.

혼자 남게 된 신유성은 한참 동안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 목표는 5층…….’

탑의 층을 공략하면 워프석은 파티장인 신유성을 기억한다. 지금은 비록 신유성이 혼자지만 워프석에 장소를 기억시켜두면 파티원들과 함께 올 수 있었다.

‘그러니 저층에서부터 팀원과 파티플레이를 할 필요는 없지.’

지금 신유성의 실력이라면 탑의 저층은 간단하게 돌파할 수 있었다.

‘클리어 자체는 혼자서도 충분해.’

하지만 효율을 생각하면 파티플레이가 좋았다. 예를 들어 2층으로 올라가는 조건이 몬스터의 토벌 숫자라면?

‘……선택지가 있다면 파티를 구해 시간을 절약할 것인가. 혼자서 클리어해 경험을 쌓을 것인가.’

신유성이 데스크 앞에서 고민에 빠지자. 계속 지켜보고 있던 헌터 일행이 말을 걸었다.

“안녕~ 지금 1층에 가는 거 같은데 혼자서 왔니?”

머리핀을 꽂은 순한 인상의 긴 생머리 여자.

“뭔가…… 얘 나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뱅글뱅글.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쓴 여자.

“보긴 뭘 봐. 넌 여자애한테도 작업을 거……. 뭐, 뭐야 남자야?”

대검을 들고 깜짝 놀라는 강인한 인상의 남자. 대검남은 자신의 반응이 미안했는지 웃음으로 무마하려고 했다.

“하, 하하…… 사실 우리도 탑은 처음인데. 학생을 보니 신기해서 말이야.”

“그러게 교복이라니. 귀엽다~ 옛날 생각나고 좋은데?”

안경녀는 툭툭- 신유성의 등을 두드려주더니 씨익 웃었다.

“어때~ 우리랑 같이 갈래?”

“마침 한 자리 남았으니까. 좋겠네요! 모두 같은 한국인이고…….”

머리핀녀가 배시시 순하게 웃자. 대검남은 자신의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그래! 우리랑 같이 가자! 저층 보스몹 정도는 4급 헌터인 형이 맡을 게! 학생을 다치게 둘 순 없지!”

신유성은 현역 헌터 3명을 천천히 눈으로 훑으며 판단하기 시작했다.

‘……마나만으로 판단하면. 대검을 쓰는 남자는 4급. 나머지 두 여자는 3급 헌터 정도인 거 같군.’

물론 신유성의 감각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었다. 마나 수치가 높다고 모든 헌터가 강한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모두 저층에서 짐이 될 실력은 아니겠어.’

빠르게 판단을 내린 신유성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5층까진 동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신유성의 대답이 떨어지자. 안경녀는 요란하게 기지개를 폈다.

“좋아~ 좋아~ 호쾌하구만! 교복을 보니 가온 같은데. 어디 엘리트 실력 좀 볼까?”

신유성을 포함해 4인 파티가 데스크 앞에 도착하자. 안내원은 미소로 답했다.

“최종 확인 부탁드립니다. 4분 모두 목적지는 2층으로.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머리핀녀의 활기찬 대답.

대검남은 안경녀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 저층에서부터 길드 가입 제안이 오면 어쩌지? 내 목표는 일편단심 협회 간부인데!”

“풉. 김칫국 좀 그만 마셔. 누가 보면 5급이라도 되는 줄.”

하지만 안경녀는 대검남을 비웃어 버리더니 워프석에 손을 얹었다.

파아앗! 사아!

일순간에 사라지는 안경녀와 대검남. 머리핀녀는 웃으며 신유성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워프석은 손을 얹고. 아주 조금만 마나를 부여해도 작동해. 나 먼저 가 있을게?”

파앗! 사아!

신유성은 사라지는 일행들을 바라보더니 워프석에 손을 올렸다.

‘손을 얹고…… 마나를?’

신유성은 체내에 있던 손바닥으로 조금 끌어 올렸다. 아주 미비한 수준의 마나.

파앗!

그러자 빛에 휩싸이며 입자로 변한 신유성의 몸이 워프석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쉽게 익숙해질 감각은 아니군.’

친해지기 힘든 감각.

정신을 차린 신유성의 앞에 푸른 홀로그램이 펼쳐졌다.

[ID : 신유성]

[특성: 집중력 강화]

[소속 : 가온 아카데미]

[현재 위치 : 2층 ]

[헌터 협회는 당신의 새로운 여정을 응원합니다.]

팟!

홀로그램을 꺼버린 신유성은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여기가 2층?”

눈앞에 펼쳐진 건 온통 초록.

탑의 2층은 드넓은 초원이었다.

[3층 입장 조건: 렉스보어를 죽이십시오.]

[정보: 렉스보어는 칼드보어 무리 중 가장 강인한 힘을 가진 우두머리를 칭합니다.]

쿵쿵쿵쿵쿵!!

저 멀리서 지축을 울리는 엄청난 발소리. 사자처럼 붉은 갈기를 등에 두르고 발톱을 가진 멧돼지들이 신유성과 일행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정신 차릴 새도 없이 환영식이라니. 이거 너무 하구만.”

투덜거리던 대검남은 가장 선두로 나서더니 신유성을 걱정했다.

“학생은 뒤로 가 있어. 우리가 처리할 테니까.”

“저 중에서 우두머리를 찾으라고? 고생 좀 하겠는데…….”

안경을 포켓에 집어넣으며 지팡이를 꺼내는 안경녀. 그 옆에서 머리핀녀가 신유성에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자자, 이리 오세요. 유성 학생. 벌써 다치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신유성은 평범한 학생 취급에 어울려 줄 수 없었다.

‘……설마 이분들. 렉스보어를 구분할 줄 모르시는 건가?’

렉스보어와 칼드보어는 생김새에 차이가 없다. 물론 비교적 덩치가 큰 칼드보어가 렉스보어가 될 확률은 높았지만 절대적이진 않았다.

‘렉스보어를 구분하는 건 진형.’

위험한 선봉대 역할을 하는 가장 선두의 칼드보어를 제외한. 두 번째 줄. 그 중앙에 있는 멧돼지가 렉스보어였다.

그러나 대검남의 시선이 꽂힌 건 선봉대 역할은 하는 첫 줄이었다.

‘모르는 게 확실해. 어쩔 수 없군.’

아주 어린 시절.

신유성은 무신산에서 멧돼지를 상대해본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의 칼드보어처럼 무리를 만들고 다니진 않았지만. 멧돼지의 특징은 충분히 익힐 수 있었다.

‘상대의 무기는 체중을 무기 삼은 돌진력.’

돌진력은 가속할수록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지만 동시에 방향을 전환하기 힘들어지는 양날의 무기였다.

‘이번에는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겠군.’

신유성은 뛰어난 시력으로 칼드보어 중 하나를 콕 짚었다. 목표물은 두 번째 줄의 정중앙의 멧돼지.

‘분명 렉스보어야.’

목표물의 설정이 끝났으니 이젠 진형을 파훼할 차례였다.

쿵쿵쿵쿵쾅쾅!!

수많은 멧돼지들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돌진해오자, 기세에서 밀린 대검남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2층부터 이 정도라고?”

“역시 탑…….”

지팡이를 쥐고 특성을 준비하는 안경녀. 반면 신유성은 차분하게 손날에 마나를 덧씌웠다.

사아아!

이제 신체강화를 마친 신유성의 손은 바위도 뚫을 수 있는 무기였다.

콰아앙!!

대검남과 선봉대의 멧돼지가 격돌한 절체절명의 순간.

‘지금이군.’

*     *      *

맛있게 끓인 죽 위에 ‘맛 가루’라 불리는 일본식 후리가케까지 뿌려주는 스미레.

“어, 어떠신가요? 맛있으신가요?”

스미레는 눈을 빛내며 김은아의 평가를 기다렸다. 그 눈빛을 본 김은아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맛있긴 해. 무척.”

“저, 정말요? 은아 씨는 지금까지 맛있는 음식을 잔뜩 맛보셨을 테니까……. 이런 조촐한 죽은 입맛에 안 맞으실까 봐 걱정했는데……. 맛있게 드셔 주셔서 다행이에요!”

진심을 다해 기뻐하는 스미레.

하지만 김은아는 어제의 기억으로 울상이 된 얼굴이었다.

‘……나 진짜. 무슨 짓을 한 거야.’

김은아는 생각을 더듬을수록 창피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신유성의 볼을 꼬집고. 안아달라고 조르고. 등에 업혀서 귀를 깨물고. 음식들을 직접 먹여주고.

‘……죽자 은아야. 제발 죽어.’

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었다.

‘아 진짜……. 티라미수를 먹고 취할 줄 누가 알아?’

김은아가 숟가락질도 멈추고 좌절에 빠지자 옆에서 지켜보던 스미레는 표정이 심각해졌다.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응. 아주 큰 걱정이 있어…….”

“헉! 무, 무슨?”

“아냐……. 모르는 게 나아.”

티라미수에 취해서 애교를 떤 게 걱정이라니. 김은아는 그런 걱정 따위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스미레는 그런 김은아를 보며 빙긋 웃더니 얼굴을 붉혔다.

“……그래도. 저, 은아 씨가 말씀해주신 거. 무척…… 기뻤어요. 친구 분 중에서도…… 콕 저를 짚어주신 거니까.”

“어, 어엉? 내가 말한 거?”

김은아는 또 기억을 떠올려야 했다. 심지어 이제 상대는 신유성이 아닌 스미레.

‘……아니 내가 뭔 말을 했지?’

김은아는 아무리 어제의 기억을 더듬어도 스미레에게 했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반면 스미레는 얼굴을 붉히더니 몸을 배배 꼬았다.

“네 그…… 내일은 쭉 저와 같이 있고 싶다고…….”

스미레의 이야기를 듣자. 김은아는 그제야 어제 자신이 했던 말이 머리에 스쳤다.

[스미레에~ 나랑 같이 자게 되니까 좋지? 내일으은~ 내가 쭈욱~ 같이 놀아 줄게?]

스미레는 김은아의 반응에 풀이 죽더니 멋쩍게 웃었다. 누가 봐도 실망한 게 역력한 눈치.

“아, 혹시……. 잊으셨다면 저는 괜찮…….”

“아, 아니야! 같이 놀기로 했잖아! 오늘 쭈우욱! 맞지?”

기억을 떠올린 김은아가 다급하게 대답하자. 실망했던 스미레의 얼굴은 순식간에 밝아졌다.

화아아-

“네! 저 그럼! 목욕물 좀 데워올게요! 은아 씨가 부탁하신 거! 제가 전부 적어놨어요!”

스미레는 환하게 웃으며 종이를 내밀었다. 거기엔 티라미수에 취한 김은아가 말했던 버킷리스트가 전부 적혀 있었다.

[1. 아침밥 해주기]

[2. 같이 목욕하기]

[3. 과자 먹으며 공포영화 시청]

[4. 파자마 파티]

[5. …….]

[6. …….]

딱!

소리가 날 정도로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친 김은아. 스미레의 종이에 적힌 건 솔직히 김은아가 하고 싶었던 목록이었다.

그러나 깊게 사귀어본 동성의 친구는 김은아도 스미레가 처음. 이전부터 꿈꿔 왔지만 막상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근데 저걸 내 입으로 전부 말했다고? 아오, 진짜…….’

김은아가 애꿎은 자신의 입술을 톡톡톡! 두드리며 혼을 내고 있자. 스미레는 욕실에서 김은아를 불렀다.

“은아 씨! 준비됐어요!”

“어~? 어어! 알았어.”

*     *      *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수.

초록색의 입욕제가 은은하게 퍼진 욕조. 김은아와 스미레는 서로를 마주보며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 건. 우리 집의 욕탕이었는데.”

김은아는 스미레를 보며 작게 투덜거렸다. 둘이서 있기엔 너무 좁은 욕조. 하지만 말을 덧붙였다.

“……근데 여기도 나쁘지 않네.”

빈말이 아니었다. 꼼지락거릴 때마다 닿는 스미레의 다리나. 둘이서 꽉 채운 욕조의 느낌이 제법 좋았다. 김은아의 저택에 있는 거대한 노천탕과는 사뭇 다른 느낌.

김은아는 스미레의 몸을 흘기더니 점점 눈이 가늘어졌다.

“넌 대체 뭘 먹고 그렇게…….”

“네?”

반면 스미레는 그저 기분이 좋은지 김은아를 보며 마냥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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