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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화 (125/434)

제125화

알카이드 홀에서 귀빈들과 이야기를 마친 김석한은 허허- 소리를 내어 웃더니 김윤하에게 말했다.

“하하하! 역시 우리 성한이가 시집 하나는 기가 막히게 들었단 말이지. 이렇게 똑똑하고 예쁜 새아가를 데려오다니 말이야.”

김석한이 기분 좋은 얼굴로 허허 웃으며 칭찬을 하자, 김윤하는 고개를 숙이며 겸손을 떨었다.

“아직 부족한데도. 아버님께서 예쁘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후훗, 그리고 평소에도…… 그이가 얼마나 저에게 잘해주는지…….”

김석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비어 있는 옆 자리를 보았다. 바쁜 스케줄로 김은아의 아버지인 김성한은 연회에 오지 못했다.

참으로 아쉬운 일.

김석한은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더니 한층 무거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은아에 관한 이야기는 들었다. 마음은 백번 이해하지만 성급했구나.”

“……죄송합니다.”

고개를 낮춘 김윤하의 사과에 김석한 회장은 손을 저었다.

“어허! 아니다 새아가. 너와 성한이의 뜻을 어찌 모르겠느냐. 헌터들의 세계는 은아 같은 아이가 헤쳐 나가기에는 벅찬 곳이지…….”

지금은 신성 그룹의 운영에 집중하고 있지만 김석한 회장은 전설로 불리는 헌터였다.

신성 그룹 누구보다 헌터들의 어려움과 위험을 잘 아는 사람.

김석한은 말라가는 입술을 와인으로 축이더니 차분히 말했다.

“그래도…… 난 그 아이가 하고 싶은 건 모두 해주고 싶구나.”

김석한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누구보다 헌터 일에 열정적이었던 그는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생각이 바뀌었다.

세계에 필요한 건.

헌터만이 아니라는 사실.

결국 김석한은 뒤늦게 신성그룹을 승계 받아 지금의 자리까지 성장시켰다. 이제 신성은 전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초일류 그룹.

그러나 김석한은 헌터의 꿈을 접게 된 게 못내 마음에 걸렸었다.

그렇기 때문에 헌터로서 활약하는 김은아의 모습에 김석한은 누구보다 만족하고 있었다.

“……그래도 은아의 일은 어미인 새아가. 너에게 맡기마. 너라면 분명 옳은 판단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런데도 끝내 김윤하에게 선택권을 맡기는 김석한. 재계에서 철혈이라 불리는 그도 가족에겐 한 없이 따스했다.

“네…… 알겠습니다.”

김윤하의 대답에 김석한은 대기 중인 이수현을 불렀다.

“이수현 비서. 우리 은아는 어디 있나? 허허, 늙으면 주책이란 말이지. 우리 귀여운 은아를 빨리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지 뭐야.”

김석한이 웃으며 말하자. 김윤하는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후훗- 그럼요 아버님. 제 딸이지만 은아는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아이니까요.”

김은아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훈훈한 분위기. 이수현은 다가오는 누군가를 발견하곤 재빨리 말했다.

“아가씨께서 들어오십니다.”

“하하하! 며칠 만에 보는 건지! 모두들 반겨주게. 우리 은아가 오고 있다는군!”

회장인 김석한이 주목을 시키자, 홀에 있던 귀빈들은 모두 한마디씩 거들었다.

“헌터계에서의 활약이 정말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

“거기다 이사장님을 쏙 빼닮으셔서 벌써부터 미모는 어찌 그리 눈부신지…….”

“하하! 제 자식들도 얼른 손자들을 보아야할 텐데. 정말 부러울 따름입니다! 회장님!”

“저도 은아 양을 보고나선 자식들에게 손자 재촉을 하고 있지 뭡니까?”

침이 튀기도록 아첨을 떠는 귀빈들. 기분이 좋아진 김석한은 사람 좋게 웃었다.

“어허! 이 사람아! 그게 어디 재촉한다고 되는 일인가. 하하하!”

하하호호.

웃음꽃이 피어나는 연회장.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김은아의 목소리에 김석한을 비롯한 일원들은 굳고 말았다.

“유성아~ 내가아~ 억지로 데려와서 미안. 그래두~ 마싯는 거 잔뜩 머겨 주께?”

짧은 혓소리를 내며 드레스차림으로 신유성의 팔에 착 달라붙은 김은아. 멋쩍은 미소와 함께 끌려오는 신유성.

“……으, 은아야?”

당황한 김석한의 목소리에.

‘쟨 또 왜 취해 있어!?’

비서인 이수현은 등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김윤하는 김은아에게 술은 물론 알코올이 들어간 모든 것을 일체 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티라미수를 먹고 취했다는 건 아무도 모르는 상태.

“하라버지~ 안녀엉~ 여기는 나의 처으음……? 첨? 첫! 동료!”

헤실헤실-

고개를 까딱- 까딱 움직이며 신유성을 소개하는 김은아. 김석한의 반응은 복잡했다. 김은아를 바라볼 땐 한 없이 인자한 얼굴.

“하라버지~ 우리 유성이 기엽지?”

하지만 김석한의 눈빛은 신유성을 바라볼 땐 한없이 매서웠다.

‘저, 저…… 저놈이!’

“은아야. 내 볼을…….”

그런데도 김은아는 보란 듯 김석한의 앞에서 신유성의 볼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애정을 과시했다.

“흐흐. ……말랑말랑.”

그 모습에 서로의 얼굴을 흘기며 눈치만 보는 귀빈들. 김윤하는 돌발상황을 중재하기 위해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우리 은아~ 할아버지한테 유성 학생을 소개시켜주고 싶구나?”

절레절레.

그러나 김은아는 고개를 저었다.

“응? 나, 그것보단 유성이 마싯는 거 머겨주러 왔는데…….”

그렇게 말을 하며 테이블에 놓인 최고급 요리를 포크로 신유성에게 집어주는 김은아.

냠.

‘맛있긴 하네…….’

신유성은 자신에게 시선이 모인 와중에도 잘도 김은아의 음식을 받아먹었다. 테이블의 음식들은 지금까지 신유성이 먹은 종류와는 격이 달랐다.

배달음식처럼 강렬한 자극적인 맛도 아니었고. 스미레의 음식처럼 정성이 어린 맛도 아니었다.

최정상의 셰프들이 전 세계 최고급 특산물에 지금까지 갈고닦은 기술들을 접목시켜 만들어낸. 일종의 예술품. 이미 테이블의 음식들은 요리의 경지를 뛰어넘고 있었다.

‘……이 오리 고기. 겉은 바삭하고. 촉촉해. 이 맑은 수프에 말랑한 덩어리는 뭐지?’

신유성에겐 새롭고 신기한 맛.

김석한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런 신유성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 은아는 절대 저런 행동을 하는 아이가 아닐 텐데!’

실제로 김은아는 부끄럽다며 가족들 누구에게도 이런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티라미수의 알코올에 취한 지금은 애교가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도대체 신유성 이놈이 무슨 짓을!’

질투심으로 활활 타오르는 김석한.

김은아는 바보처럼 배시시 웃으며 포크로 음식을 집어주었다.

“유성이~ 내가 주는 거. 잘 바다머거~ 아기새 같아.”

“여기 요리. 정말 맛있어 은아야.”

신유성이 음식의 맛에 순수하게 감탄하자. 김은아는 헤실헤실 웃으며 기뻐했다.

“지짜? 그럼~ 더 만들어 주까? 할아버지 괜찮지?”

홱-

그렇게 말을 하며 신유성의 곁에서 고개를 돌리는 김은아.

“그, 그래. 얼마든지 부탁하렴.”

김석한은 최대한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려 했지만 전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정말. 저 아이가……. 아버님도 모처럼 오셨는데. 후훗.’

김윤하는 그런 김은아의 모습에 피식 웃고 있었다.

‘……티라미수 먹고 취했다는 이야긴 이수현 비서에게 들었지만. 얘도 참. 어지간히 빠진 모양이네.’

우정이든 사랑이든 친해지면 집착이 심한 김은아의 성격. 어머니인 김윤하도 김은아가 신유성에게 어떤 감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신유성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건 분명했다.

“신유성 학생?”

김윤하가 평소에 내는 기업인으로서의 도도한 목소리가 아닌, 어머니의 따뜻한 목소리. 신유성은 김윤하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저번 일은 사과드릴게요. 부모로서 은아를 생각한 이기적인 행동이었으니 너무 미워하진 말아주세요.”

여유로우면서도 화사한 김윤하의 웃음. 취해버린 김은아는 굳이 끼어들더니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마자. 너무 했어. 나 가두고……. 입술도 꼬집…….”

“아, 아가씨!? 여기! 새로운 메뉴 추가 서빙입니다!”

이번에는 이수현이 김은아의 말을 재빠르게 막아버렸다.

[윽! 으브!]

[……그만 찡찡거리고 밥 먹으라고. 내일 같이 너희 엄마한테 말해줄 테니까.]

이수현이 김은아의 입술을 꼬집은 건 비밀 중의 비밀.

‘아니 얘가 미쳤나!? 나 죽으라는 거야!?’

김석한과 김윤하가 있는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털어놓으면 이수현은 끝이었다.

“아. 추가 메뉴우……. 우리 유성이 배고프대. 유성이 앞에! 앞에!”

하지만 다행이 김은아는 톡톡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미 하려고 했던 말을 잊은 모양.

김윤하는 신유성을 향해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항상. 우리 은아를 잘 부탁해요. 알았죠?”

부모인 김윤하의 부탁.

이건 파티장으로서 신유성을 인정하고 김은아의 전부를 맡기겠다는 뜻이었다.

“네. 은아는 제 평생의 파티원입니다. 그러니…… 제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신유성은 김윤하를 보며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올곧게 답했다.

정말이지 훈훈해 보이는 광경.

“크흐음! 으으음…….”

하지만 김석한 회장은 여전히 불편하다는 얼굴로 신유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에게 신유성은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손녀딸을 훔쳐간 도둑.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애정행각을 벌일 때마다 속이 타들어갔다.

“평생이라니. 거창한 말을 하는 구나. 잘 들어라. 세상일이라는 건 말이다. 무엇 하나 정해진 게 없다”

번뜩.

김석한은 갑자기 눈을 빛내더니 김은아를 대할 때와는 정반대인 중후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평생이나 백 프로 같은 단어로 장담하는 녀석들을 제일 싫어…….”

“으응? 하라버지. 나는~ 유성이랑 평생 파티할건데~?”

그러나 이번에도 끼어드는 김은아.

김윤하와 이수현을 비롯한 귀빈들은 꾹 웃음을 참았다.

“하, 하하……. 으, 은아야. 그러니까. 이 할아버지 말은 말이다. 세상에는 정해진 게 없으니~ 조금은 시간을 두고 보자~ 이런 말이란다.”

“응. 그래도 난…… 확실하게 말해주는 게 기뻐. 이렇게 말해주면 무지 좋아…….”

김은아는 또 신유성의 곁에 얽혀 볼을 만지작거리더니 베시시- 하고 웃었다.

“그, 그래? 아, 알겠다. 은아야. 생각해보니 이 할아버지가…… 틀린 거 같구.”

결국 김석한은 김은아의 미소에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한 평생의 신념이 손녀의 애교 한 번에 무너져 내리는 상황.

‘은아 양이 회장님을 쥐락펴락…….’

‘그런 은아 양에게 신임을 받는 사람이라니.’

‘저 학생에겐 환심을 살 가치가 있군……. 사람을 보내봐야겠어.’

덕분에 재계 최정상의 귀빈들이 일개 학생에 불과한 신유성을 눈 여겨 보고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어디 출신도 모를 놈이……. 우리 은아에게 크흑…… 은아야.’

손녀를 빼앗겨 좌절하는 김석한.

‘후. 겨우 막았네……. 들켰으면 난 진짜 여기서 죽었다.’

안심하고 있는 이수현.

“후훗, 그럼 서로 인사도 끝났으니. ……환영식을 시작할까요?”

웃으며 상황을 정리하는 김윤하.

이유가 어떻게 됐든 신유성과 김은아가 참여하고 나서 신성그룹의 연회는 더욱 활기를 띄고 있었다.

*     *      *

저벅저벅.

열띤 연회장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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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은 신오가문의 일원으로서 메시지까지 보내며 신유성과 만나기를 자처했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일 뿐 또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전부 물거품이 됐군.’

턱.

구석진 자리의 테이블에 앉는 유월. 거기엔 외국인으로 보이는 2명의 남녀가 이미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됐니? 이야기 좀 해준대?”

처음 이야기를 꺼낸 건 이국적인 외모의 갈색 머리 소녀. 그녀의 국적은 제법 거리가 있는 동유럽의 헝가리였다.

소녀는 10대 후반처럼 보이는 나이에도 유월에게 편히 반말했다.

“이 메시지를 보시죠.”

반면 유월은 소녀에게 존댓말로 답했다.

파앗!

[6月: 오랜만이야. 동생.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6月: 내가 누나를 대신해서 네게 할 말이 있단다.]

[신유성: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와. 칼답. 이 꼬마. 너희 가문한테 날이 많이 섰나본데?”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나이에도 신유성을 꼬마라고 부르는 갈색머리 소녀. 옆에 있던 안경을 쓴 남자는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모처럼 찾아 왔는데. 아무래도 당분간은 간단한 접선조차 힘들 거 같군요.”

“죄송합니다. 대장.”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유월.

안경을 쓴 남자는 아니라며 다급하게 양손을 저었다.

“아뇨. 사과하지 마세요. 유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오늘은 바람을 쐰 걸로 만족하도록 하죠.”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안경을 쓴 남자. 갈색 머리 소녀는 그를 따라 자리를 떠났다.

우뚝.

그러다 세 걸음 정도에서 멈춰서는 소녀. 유월이 무감한 눈으로 쳐다보자. 소녀는 씩 웃으며 말했다.

“아 맞다. 치트. 풀려났대.”

평범한 일반인이라면 절대 알 수 없는 국가적 기밀. 하지만 소녀는 그런 정보를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 내가 무슨. ……수고는 치트를 잡아넣은 네 동생이 했지.”

정중하게 인사하는 유월.

그 말을 끝으로 기분 좋게 웃으며 떠나는 갈색머리 소녀.

아무런 접점도 없어 보이는 셋은 상상도 못할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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