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알카이드 홀이 소수의 VIP를 위한 곳이라면 알리오스(Alioth) 홀은 세상의 온갖 산해진미를 모아둔 곳.
김은아는 신유성을 위해 직접 디저트를 접시에 담아 가져왔다.
하지만 김은아가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 신유성.
“어? 뭐야 유성이 어디 갔냐?”
김은아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이미 음식에 빠져버린 에이미는 김은아의 질문에 성의 없이 대답했다.
“몰라. 잠깐 어디 가셨을걸?”
“모처럼 내가 직접 골라서 가져왔는데…….”
김은아는 자신의 접시 위를 바라보았다. 접시에는 고기를 좋아하는 신유성을 위한 비프웰링턴. 그리고 카페에서 신유성이 처음 먹어본 디저트인 티라미수가 담겨 있었다.
“으에헥…… 진짜 이 랍스터 요리 미쳤어. 나 혀가 녹을 것 같아…….”
에이미가 호들갑을 떨며 음식을 먹는 와중에도 김은아는 뚱한 얼굴로 신유성을 찾기 위해 눈을 흘겼다.
하지만 5분 가까운 시간이 지나도 보이지 않는 신유성.
‘……대체 언제 오는 거야?’
드륵. 득.
김은아는 괜히 포크로 접시를 긁고 있었지만 에이미는 입 안 가득 음식을 우물거렸다.
“으으…… 매일 이렇게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어, 은아야! 나 그 티라미수 먹어봐도 돼?”
티라미수의 맛이 궁금한지 눈을 빛내는 에이미. 그러나 김은아는 신유성이 돌아오지 않아 잔뜩 심술이나 있었다.
“싫어. 내가 다 먹을 거니까. 네가 가져와.”
혼자 먹기엔 많은 티라미수의 양.
그런데도 김은아는 스푼으로 크게 한술을 떠 입에 넣었다.
자르르-
입 안 가득 퍼지는 부드러운 크림치즈와 쌉쌀한 커피가루의 맛.
김은아의 코에는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향기가 머물렀다.
‘……이게 무슨 냄새야?’
향기의 정체는 칼루아(Kahlúa).
아라비카 커피와 증류주 등을 재료로 만들어진 술이 김은아가 먹은 티라미수에 들어가 있었다.
우물.
‘엄청 맛있네……. 그 녀석. 가리는 건 없지만 분명 좋아할 맛이야.’
김은아는 티라미수를 한술 더 떴다. 생각해보면 신유성은 카페에 가게 됐을 땐 꼭 티라미수를 시켰다.
‘커피는 쓰다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커피 케이크는 좋아하고.’
김은아가 지켜본 결과 그중에서도 신유성이 제일 좋아하는 건 달달한 음식.
‘대체 누가 카페에서 바나나우유랑 티라미수를 먹는다고…….’
우물.
‘바보. 세상에 티라미수랑 바나나우유 말고도……. 맛있는 디저트가 얼마나 많은데…….’
깨작- 깨작-
한숨을 쉰 김은아는 분풀이를 하더니 포크로 느릿하게 티라미수를 퍼먹었다.
* * *
밤하늘의 정경이 보이는 알카이드 홀의 테라스. 스미레는 새삼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더니 신유성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 온 메시지인데 꼭 유성 씨에게 보여드려야 할 것 같았어요.”
“메시지?”
신유성이 의아해하자.
스미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포켓을 터치했다.
팟!
그러자 포켓에선 홀로그램이 펼쳐지며 익숙한 이름이 신유성의 눈앞에 보였다.
[동아리 가입 신청서]
[동아리 명-헌터부]
[부장-2학년 S반 신하윤]
신하윤.
신청서에 적힌 3글자에 신유성은 저절로 인상을 쓰게 됐다. 심지어 가온 아카데미에선 스미레가 신유성의 파티에서 활동 중인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신하윤은 굳이 이런 신청서를 보냈다.
도발이라기엔 질이 낮은 장난.
심지어 추가로 보낸 계약서에는 신하윤의 속셈이 뻔히 보였다.
[헌터 정규 의뢰 계약서]
[의뢰자-신하윤]
[대상자-하나지마 스미레]
[상세 내용-관리자인 신하윤은 총 6달에 걸쳐 1달마다 의뢰 대상자인 하나지마 스미레에게 계약금 1억(100,000,000)원을 지급.]
[상세 내용2- 계약 성사시 의뢰자는 대상자에 한하여 (4급 난이도 이하 의뢰) 1달에 9번 이하의 의뢰(출동) 명령을 가짐]
재력에 한해선 말이 필요 없는 김은아와 비교적 부유한 에이미에 비해서 여유가 없는 스미레를 노린 신하윤의 계약서.
엄청난 수완을 가진 신하윤과 실력이 늘어난 스미레라면 1달 안에 계약금 이상의 의뢰비를 벌어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신하윤의 진짜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1달 안에 9번의 출동 명령을 가진다는 건 정식 의뢰를 통해 신유성의 파티에서 스미레를 빼내 학생회에 귀속시키겠다는 뜻.
“이건…….”
계약서를 모두 읽은 신유성의 표정이 굳었다. 1달마다 1억. 6달 동안 6억. 이 정도 규모의 금액은 길드 단위에서나 지급할 돈이었다.
합법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운영. 신하윤은 학생의 신분에도 자본의 논리로 신유성을 압박하고 있었다.
막 하산했던 신유성은 돈의 무게에 대해서 무지했었지만 지금의 신유성은 그 무게를 알고 있었다.
1억이라는 돈은 가족들을 부양하고 있는 스미레에겐 절대 거절하기 힘든 커다란 유혹.
하지만 스미레는 살짝 신유성의 소매 끝을 잡았다.
“저어. ……유성 씨?”
스미레는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신유성에게 전해야 할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스미레에게 기교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정면으로 승부했다.
“……유성 씨와 학생회장님과의 관계…… 들었어요.”
그 사건 이후, 자존감이 낮았던 생활 때문일까. 이런 면에서 스미레는 눈치가 빨랐다.
“……사이가 안 좋으신 거죠? 그래서 학생회장님은 저를…….”
스미레가 조심스럽게 말을 하자. 신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 사람은 나와 너흴 떼어놓고 싶어 하니까.”
신하윤은 분명히 신유성을 가지겠다고 말했다. 최고의 대우를 해줄 테니 자신의 밑으로. 가문으로 돌아오라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신유성에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 신유성이 수련을 하고 강해진 건 가문으로 돌아가기 위함도. 신하윤의 밑으로 들어가기 위함도 아니었다.
권왕 유원학의 제자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헌터로서 자신이 가진 가치와 한계를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목표는 언제나 최강의 자리. 어떤 조건이라도 누군가의 밑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신유성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감돌자. 스미레는 양손으로 신유성의 오른손을 감싸주었다.
꼬옥-
예전의 스미레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 신유성은 스미레의 의외의 행동에 짐짓 놀랐다.
“……스미레?”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 오는 온기.
스미레는 똑바로 신유성을 마주한 채 입을 열었다.
“유성 씨.”
너무나도 진지한 스미레의 눈빛.
스미레가 신유성에게 이런 표정을 보여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힘드신 일이 있을 때는 저한테도……. 좀 더, 의지해주세요.”
신하윤으로 생긴 고민들을 신유성은 혼자 끌어안고 해결하려고 했다. 사실 그걸 제외하더라도 신유성은 스미레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스미레에게 신유성은 언제나 강하고. 올곧은 동경의 대상.
“저는…… 유성 씨처럼 강하지도 않고……. 똑똑하지도 않아서…….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스미레는 용기를 내어 또박또박 말을 했다.
“그래도 유성 씨와…… 같은 고민을 공유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을 바라보는 신유성의 시선이 의식되자. 스미레는 점점 얼굴이 붉어졌다.
“그, 저흰…… 파, 파티니까요!”
결국 급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손을 떼는 스미레.
“응. 고마워 스미레.”
신유성은 그런 스미레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그 모습에 스미레는 멍해진 표정으로 신유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3초간의 정적.
뒤늦게 정신을 차린 스미레는 화들짝 놀라며 다급하게 말했다.
“헛! ……저, 저는! 저는 쭉- 유성 씨의 파티에 남고 싶어요!”
갑작스런 스미레의 급발진.
그러나 그런 솔직한 스미레의 모습은 신유성이 가지고 있던 일말의 걱정을 한 번에 날려주었다.
“일억이 아닌, 수십억을 줘도……. 다른 파티가 아닌…… 이곳에 남고 싶어요. 여긴…….”
갑자기 말을 멈추고 신유성의 얼굴을 바라보던 스미레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러니까…… 이번 제안은 걱정하지 말아주세요.”
가슴을 누르던 무거운 짐이 사라지며 홀가분해진 기분. 신유성이 스미레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려 하던 그 순간.
드르륵-
뒤에서 테라스의 문이 열렸다.
타닥! 다닥!
종종거리며 달려오는 들뜬 발걸음.
“헤에…… 흐히.”
갑자기 신유성의 뒤에선 이상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파악!
누군가 신유성을 껴안았다.
“우리~ 유성이~ 요기 이썼네?”
“으, 은아 씨!?”
당황한 스미레의 눈이 커졌지만 티라미수에 취한 김은아는 딸꾹- 소리만 낼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으, 은아야?”
그 모습에 당황한 신유성.
이미 취해버린 김은아는 뒤에서 폴짝! 뛰더니 주욱- 신유성의 볼을 잡아당겼다.
“요요요- 귀염둥이~ 나만 두고 어디 갓섰서?”
그렇게 말을 하며 소악마처럼 웃는 김은아는 정통 티라미수에 취한 연회장 최초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