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7개의 별이 뜬다는 EA 스타가든.
사실 별이 가리키는 진짜 의미는 사치스러운 7개의 홀이었다.
김은아가 있는 곳은 7개의 홀 중에서도 최고의 VIP만 입장 할 수 있다는 알카이드(Alkaid) 홀.
이곳에 입장하는 건 연회에 초대받은 상류층들에게 가장 큰 영예였다.
하지만 김은아는 지금처럼 사교계라 불리는 모임들이 질색이었다.
‘……지루하고. 시시하고. 뻔해.’
연회의 목적은 친목을 빙자해 결속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 알카이드 홀에 모이는 사람들은 일면식도 없는 김은아에게 친근하게 접근했다.
“……은아 양. 헌터를 지망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저와 같은 나이인데도 대단하시군요.”
10대의 나이에도 억 소리 나는 명품들로 치장한 남학생.
하지만 김은아에게 남학생의 재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김은아는 그냥 자신을 향한 모든 관심이 귀찮았다.
“그냥 뭐 그렇지.”
김은아가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하자. 남학생은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헌터들의 생활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이리도 아름다운 미모에. 강인한 정신까지 갖추시다니. ……정말이지 동경하게 되는군요."
남학생이 화사하게 웃자.
“……그, 그래?”
김은아는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표정 관리를 했다.
‘생으로 버터를 집어 먹었나. 말투가 왜 이래…….’
그래도 저 미소를 보니 이름이 떠오를 듯했다.
‘……이름이 양, 한석…… 이랬나?’
이수현에게 미리 듣기론 이미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다고 했다.
후계자의 자리를 질색하는 김은아 자신과 달리 재계에 어울리는 인물. 하지만 편견일지 몰라도 김은아는 이런 사람들에게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저희 그룹은 기껏해야 자동차 업계에서나 이름을 날리는 곳인데. 신성그룹의 후계자인 은아 양과 이렇게 자리를 가지게 되다니…….”
양한석은 알카이드 홀에 초대된 게 기쁜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신성그룹의 회장인 김석한의 기준. 김은아의 생각과는 하등 상관없었다.
‘……대체 이깟 자리가 뭐가 그리 대단한데?’
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화려한 알카이드 홀은 김은아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이곳에 초대된 한국은 물론 세계를 쥐락펴락한다는 대부호들도 마찬가지였다.
김은아에게 이들은 그냥 지루한 사람들. 김은아를 즐겁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도시의 카페.
텐트의 숙박.
손수 만든 카레.
부실의 청소 당번을 정하기 위한 가위바위보 따위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진 하찮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에는 이토록이나 즐거운 것들이 가득했다.
“아, 은아 양. 혹시 시간이 나신다면. 저희 모임에 참석하시지 않겠습니까? 사교 모임 중에서도 엄선을 거친…….”
양한석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본 순간. 김은아는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인간 김은아가 아닌, 신성그룹의 후계자인 김은아를 원하는 사람. 자신의 ‘급’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타인을 재단하는 사람.
정작 김은아 자신도 과거에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 잣대에 질려버렸다.
‘……대체 언제 오는 거야.’
한숨을 쉬며 알카이드 홀을 찬찬히 둘러보는 김은아. 양한석은 자신의 사교 모임에 대한 어필을 멈추지 않았다.
“은아 양이 와주신다면. 멤버들도 분명 기뻐할…….”
“어!”
그때 김은아는 기쁜 얼굴로 갑자기 홱- 손을 들었다.
“유성아! 여기! 여기!”
체면도 잊고 어딘가를 향해 손을 흔드는 김은아. 그 시선의 끝에는 정장 차림의 신유성이 있었다.
연회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김은아의 환대에 신유성을 향해 집중되는 시선.
“으, 은아 양?”
먼저 말을 걸었던 양한석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불렀지만 김은아는 안중에도 없이 가볍게 무시했다.
“뭘 이렇게 늦게 오냐? 한참 기다렸네! 엄마랑 할아버지가 얼마나 찾았는데!”
김은아의 이야기에 양한석은 그만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회, 회장님이 찾으셨다고!?’
회장인 김석한은 후계자인 김은아와 차원이 달랐다. 직접 권력을 휘두르는 인물. 거기다 김은아의 엄마라면 신성그룹의 대표이사인 김윤하. 두 거물이 일개 학생에 불과한 신유성을 찾았다니.
그 모든 과정이 가리키는 결과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냥 재미 삼아 평민들이랑 어울려주는 줄 알았더니. 그, 그게 아니었나?’
신유성과 김은아의 부모님이 상견례를 가진다고 오해해버린 양한석.
김은아는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신유성의 옆에서 신이 난 얼굴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내가 너 달달한 거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잔뜩 벨라 초콜릿을 시켰다니까?”
“벨라 초콜릿?”
“응. 원래는 한정수량만 나오는 엄청 비싼 건데 아예 퐁듀를 분수처럼…….”
양한석은 가까워 보이는 김은아와 신유성의 모습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저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신유성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보자. 양한석은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알카이드 홀은 연예인조차 잘 거들떠보지 않는 높은 콧대의 여학생들이 모인 곳.
하지만 사교계에 익숙한 여학생들조차 신유성의 독보적인 미모에는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결국 양한석은 신유성을 보며 인상을 썼다.
‘얼굴만 반반한 가난뱅이 주제에 신성그룹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질투.
신성그룹의 후계자인 김은아는 현대의 왕족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만약 김은아와 약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양한석은 그 사실만으로 같이 자신과 경영권을 경쟁하는 형제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김은아는 재벌인 양한석에게조차 로또 같은 건 비교도 안 되는 대박. 하지만 양한석은 오히려 너무 거물이라 김은아를 탐내지 않았다.
양한석이 원한 사이는 그냥 김은아와 안면을 익히고 친해지는 정도.
그런데 김은아는 해맑은 표정으로 신유성에게 웃어주고 있었다.
“얼른 보러 가자! 초콜릿이 분수처럼 나오는데. 너 보여주려고 산 거나 마찬가지야.”
일개 헌터.
그것도 자신과 같은 학생에 불과한 신유성이 김은아의 총애를 받는다고 생각하자. 양한석은 부러움과 질투가 밀려왔다.
‘기껏해야 길드 밑에서 헌터질이나 할 놈 주제에……. 국가 대항전에 나간 것도 전부. 스승을 잘 만난 덕이겠지.’
툭.
그때 누군가 양한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무슨 기분인지는 아는데. 그냥 관둬.”
양현석은 결국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건 마치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의 박수현.
“당신은…….”
스윽.
박수현은 중지로 자신의 안경을 추켜올리더니 경험 어린 충고를 해주었다.
“……저 녀석이랑은 안 얽히는 게 백배 나아.”
* * *
물이 아닌 초콜릿을 뿜어내는 거대한 분수대.
주르르르륵.
스테인리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조형물의 꼭대기에서 초콜릿이 흘러내리자, 신유성은 진지한 얼굴로 초콜릿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초콜릿이 폭포처럼…….”
이제 신유성은 이시우의 도움으로 배달음식 정도는 맛보았지만. 돈으로 무장한 스타가든의 초콜릿 분수대는 아예 새로운 영역이었다.
“어때? 이런 건~ 처음 봤지?”
김은아는 신유성의 반응에 뿌듯해하더니 막대과자를 집어 분수대의 초콜릿을 묻혔다.
돌돌돌. 와작.
“이러케 머그면 대.(이렇게 먹으면 돼.)”
친절하게 김은아가 직접 시범까지 보여주자 신유성도 분수대의 옆에서 마시멜로우가 꽂힌 막대 과자를 하나 집었다.
돌돌돌.
기다란 손가락으로 막대과자를 돌리자 마시멜로우 위로 감기는 뜨끈한 초콜릿.
신유성은 신중하게 최대한 초콜릿을 묻혀 막대과자를 입에 넣었다.
와그작.
입 안 가득 퍼지는 마시멜로우의 단맛. 알프스 우유와 최고급 카카오버터로 만들어진 초콜릿의 풍미. 고소한 막대과자.
김은아가 준비한 초콜릿 분수대 퐁듀는 사치 극치였다.
“……마, 맛있어.”
놀란 나머지 평소보다 동그랗게 눈이 커진 신유성. 12년의 길었던 산 속 생활에 비해 신유성의 도시 생활은 너무나 짧았다.
국가대항전을 준비하느라 쌓였던 피로가 한 번에 사르르 녹아버리는 황홀한 단맛.
‘……역시. 아직도 난 모르는 것투성이야.’
초콜릿 분수대를 바라보는 진지한 표정의 신유성. 김은아는 감동한 신유성의 옆에서 계속 미식(美食)을 거들었다.
“흐흐~ 아주 눈이 커져서는~ 맛있지~? 신기하지!? 아 맞다. 저기 캐비어 크래커도 되게 맛있는데!”
그렇게 김은아가 신유성을 이끌고 새로운 맛을 대접하려 할 때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분수대에서 계속 초콜릿이…….
- 반응 참~ 촌스럽긴! 이게 퐁듀라는 거야~ 나는 이미 방송국에서 먹어 봤지롱~
절대로 헷갈릴 수가 없는 두 명의 목소리.
“이 목소리는…….”
김은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분수대 너머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분수대 너머에 있는 건 스미레와 에이미.
“어!?”
“으, 은아 씨?”
뒤늦게 신유성과 김은아를 확인한 에이미는 세차게 손을 흔들었다.
“파티장님! 은아야! 보고 싶었어!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저, 저도! 유성 씨가 보고 싶었어요.”
스미레는 소심한 말투와는 다르게 과감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드레스에 달린 라플라스의 장식을 보아. 스미레의 옷이 누구의 취향인지는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찾을 건 뭐가 있어. 그냥 집인데.”
“에이, 아니……. 보통 10만 평짜리 건물을 집이라고 부르진 않지.”
확실히 티격태격해도 같은 A반이라 그런지 김은아와 에이미의 사이는 친해 보였다.
반면 오직 신유성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스미레.
“저, 유, 유성 씨…….”
스미레는 수줍은 마음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신유성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결국 용기를 냈다.
“……저, 저랑 이야기 좀 하실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