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가온의 접견실.
김윤하와 신유성은 책상 하나를 두고 마주 앉아있었다. 김은아와 닮았지만 확연히 다른 김윤하의 분위기.
“그럼 말을 놓을게?”
“네.”
김윤하의 눈웃음에 신유성을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김윤하는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은아가 신세를 많이 지고 있지?”
싱긋.
어른의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김윤하의 미소. 신유성은 고개를 저었다.
“도움을 받는 것은 오히려 제 쪽인걸요. 은아는 유능한 파티원이니까요.”
“정말? 후훗…… 내 아이 칭찬을 들으니 기쁘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엄마로서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나봐.”
휘이- 휘이-
홍차를 저을 때마다 점점 무거워지는 접견실의 분위기. 김윤하는 새끼손가락을 올리고 홍차를 맛보았다.
사소한 동작에서도 느껴지는 품위.
“……너도 알고 있지? 은아는 강한 척하지만 마음속은 실은 상처받기 쉬운 아이라는 걸.”
신유성은 김윤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마음을 열었을 때 얼핏 비치는 약한 모습도, 여울룡을 잡으며 보여준 강한 정신력도. 모두 김은아였다.
“그리고 오냐오냐 키워서 그런지 극심한 마이페이스인데다. 잘 상처 받는 주제에 자존심은 또 얼마나 강한지…….”
휘이- 휘- 탁.
홍차를 젓던 스푼이 멈췄다.
동시에 말을 멈춘 김윤하는 신유성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우리 가족은 모두 은아를 사랑한단다.”
신성그룹의 회장 김석한.
부모님인 김윤하와 김성한.
그리고 오빠인 김준혁에 이르기까지 신성그룹의 일가 대부분은 김은아를 좋아했다. 그 이유는 김은아가 신성그룹에서 특별한 존재기 때문이었다.
“은아는 우리 같은 속물들과 달리 아주 순수한 아이거든. 정말 신기한 일이야~ 이런 배경에서 저런 아이가 자란다는 건. 드물지 않겠니?”
김윤하는 복잡한 표정으로 한 동안 말이 없더니.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유성 학생. 이게 우리 가족이 생각하는 은아란다. 넌 은아를 어떻게 생각하니?”
김윤하의 질문에 신유성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김은아와 제대로 된 첫 만남은 교외 활동이었다. 기억 속의 김은아는 도도하고 자존심이 강한 재벌의 후계자.
하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신유성은 알게 됐다. 김은아도 자신과 다르지 않은 그저 평범한 17세의 학생이라는 걸.
남의 이야기에 분노를 느끼고, 자신의 과거에 슬픔을 느끼고, 빌런에게 맞설 정도로 강할 때도 있지만, 오빠를 향한 마음에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약하다는 걸.
“처음 파티원으로 정한 건, 은아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었습니다.”
1학년 중 세븐넘버의 2위.
팀의 화력을 보충해줄 전기특성 능력자. 신유성에게 김은아가 가지는 의미는 그 정도였다. 둘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그래?”
눈이 가늘어지며 홍차에 입가를 적시는 김윤하. 신유성은 김윤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김은아가 신유성에게 파티원으로서 소중한 건 단순히 능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더 강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더라도, 대체할 수 없었다.
“은아는 저희 파티에서…….”
“잠깐.”
김윤하는 손바닥을 뻗어 신유성의 말을 멈추더니. 다시 질문을 했다.
“……그건 파티원인 동료로서의 은아잖니. 정말 그게 전부니?”
약간 자존심이 상한 김윤하의 표정. 무신산에서 12년을 보낸 신유성은 김윤하의 포인트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그렇지만. 날 닮아서…… 우리 은아 좀…… 예쁘지 않니?”
신유성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었다.
김윤하는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성인이 될 때까지 사적인 감정이 있으면 좀 접어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예 없었다니 오히려 김윤하는 자존심이 상했다.
‘이건…….’
김은아가 일본에서 보여준 눈물.
그리고 지금 신유성의 표정을 확인한 결과. 김윤하는 판단을 내렸다.
아직 김은아는 모르고 있었지만 어머니인 김윤하는 김은아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우리 은아 쪽에서 더…….’
알 수 없는 패배감.
김윤하는 자신의 딸인 김은아가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게 참을 수가 없었다. 좋아해도 상대가 더 좋아하고, 매달려도 상대가 매달려야 하는데.
이건 그 반대.
“신유성 학생? 은아한테 듣기론 신성그룹의 연회에 오기로 했지?”
김윤하는 신유성이 김은아를 파티원으로서 소중히 여기는 걸론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네.”
“네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진 알았으니까. 꼭 와주렴. ……꼭.”
자존심이 상해 두 번이나 강조하는 김윤하. 신유성은 김윤하의 심경에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하고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좋아! 유성 학생. 앞으로도 우리 은아를 잘 부탁한다?”
같이 웃고 있지만 김윤하는 이미 묘한 승부욕에 불타고 있었다.
* * *
소동이 끝난 부실.
김은아는 신유성이 들어오자 팡팡! 소파를 때렸다.
“여기 여기!”
자신의 옆에 앉으라는 행동.
신유성이 옆에 앉자 김은아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우리 엄마가 무슨 말 했어? 또 이상한 말 했지? 뭐, 겁줘? 아님 파티에서 내쫓으래?”
“아니 널 잘 부탁한다고 하셨어.”
“……잘 부탁? 진짜? 이상하다 엄마가 그럴 리가 없는데.”
생각에 빠졌던 김은아는 의심의 눈초리로 신유성을 훑어보았다.
“……진짜 거짓말 아니지?”
“절대.”
“흠…….”
한숨을 쉬더니 김은아는 팟- 하고 일어났다.
“그럼 다행이고! ……솔직히 우리 엄마면 몇 십억 줄 테니 날 쫓아내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거든.”
몇 십억이라니.
저런 말도 김은아가 하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설령 준다고 해도. 받지 않아. 나에겐 돈보다 파티원들이 더 소중한걸?”
신유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 말에 김은아는 귀가 붉어졌다.
“……됐고. 애들이랑 연회장 올 준비나 해!”
그 말을 끝으로 빠져나가는 김은아의 뒷모습. 신유성은 그런 김은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여러 가지 일로 귀찮았지만 뿌듯한 하루. 신유성은 푹신한 소파에 누워 밖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이만 쉴까.’
* * *
푸르른 달빛이 내리쬐는 밤.
정장을 입은 한 여성이 고층 건물의 위에서 아득한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겟을 확인했다.”
마나 사용의 여파로 빛나는 푸른 눈.
지금 그녀의 시야에는 암흑 속에서 걷고 있는 남성이 선명하게 보였다.
- 클로. 혼자 확보할 수 있겠어?
지직. 지지직!
여성이 쥔 건 아날로그 무전기.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음질이 나빴지만 상관없었다. 정부의 감시를 피하려면 허점을 노려 구시대의 물건들을 사용하는 게 오히려 좋았다.
“……상대의 강함은 5급 헌터 수준. 3분이면 충분하다.”
마스크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계음 섞인 목소리. 마스크에는 음성을 변조하는 기능이 있었다.
지직!
- 그래? 혼자 맡기려니 미안하지만. 잘 부탁해. 치트를 꺼내기 위해선 꼭 필요한 인질이니까.
무전기에서 들리는 남자의 다정한 어투에도 클로는 차가운 어투로 답했다.
“그런 머저리에게 또 기회를 주다니. 넌 대장이란 놈이 어설프군.”
- 너무 그러지 마. 우린 치트의 해킹 능력이 꼭 필요해. 알겠지 클로?
지직!
지금까지 말을 하던 남성의 목소리가 끊기더니. 어린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흥, 못 들어주겠군. 나이도 어린 것이. 괜히 투정 부리지 말도록.
그 말을 끝으로 조용해진 무전기.
목표물을 노려보는 클로의 눈은 매섭게 빛났다.
‘사냥은 목표물이 혼자서 남게 되었을 때.’
클로는 사냥의 순간을 기다리며 잠자코 기다렸다.
저벅. 저벅. 탁.
발걸음을 멈춘 남자가 혼자 남게 된 순간. 클로는 남자에게는 사형선고와도 같은 말을 무감한 어투로 통보했다.
“……확보를 시작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