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 달맞이 산 -]
홀로그램에 떠오른 글자를 읽더니 스미레를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비치는 밝은 달과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꽃밭.
‘……내 전력을 다하는 거야.’
신유성이 원하는 우승.
이건 그 결과가 달린 전투였다. 자신의 승패에 따라 신유성이 실망을 할 수도 기뻐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스미레는 방심할 수 없었다.
사아아아!
“어둠은…… 태양을 가려라!”
파아앙!
스미레의 손에 껴져있던 반지가 보라색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동시에 하늘을 뒤덮는 검은 구름.
스미레의 주변에 퍼진 마나는 곧이어 해골이나 구울 같은 언데드의 형체로 바뀌었다.
이제 스미레는 더 이상 F반의 열등생이 아니었다. 라플라스의 편린과 아티팩트의 시너지를 가진 스미레의 힘은 엄청났다.
“주인, 님에게 전쟁의 승리를! 적, 에게 파멸을!”
갑옷을 입은 데스나이트.
“사역마 릴리스. ……주인님을 보필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요염하게 미소를 짓는 릴리스.
스미레는 진지한 표정으로 단 하나의 명령을 내렸다.
“……모두.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해주세요.”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함성을 지르는 데스나이트.
“주,인님의 적에,게 파멸을-!”
해골들은 일제히 무기로 삼은 뼛조각을 위로 들었다.
따닥! 따다닥!
지옥의 합창과 함께 전진하는 언데드 군단. 잇신은 인상을 쓰더니 검을 들었다.
“물량전? ……하나지마. 내 특성을 잊은 건 아니겠지?”
츠츠츳!!
잇신이 발도술의 자세를 취하자.
검에서 소용돌이치는 붉은 검기.
촤아악!
잇신의 검이 반월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그에 따라 아름답게 흩어지는 붉은 검기.
쩌저저적!!
해골들은 가루로 변해 산산이 흩어졌다. 해골들의 뼛가루는 마나로 변했고, 잇신의 검은 블랙홀처럼 흩어진 마나를 모두 빨아들였다.
더욱 붉어진 잇신의 검기.
이게 바로 잇신의 S급 특성.
귀기(鬼氣)였다.
효과는 단순히 적을 벨수록 강해지고, 그 힘을 흡수하는 게 전부.
하지만 근접전을 펼치는 검사에게 이보다 강력한 효과는 없었다.
잇신은 자신이 상대보다 강하다는 전제하에 적의 숫자가 많아도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적들을 먹이삼아 강해질 수 있었다.
촤아아악!!
잇신의 검이 언데드를 베어나갈수록 짙어지는 귀기. 그럴수록 잇신의 검신은 점점 붉은색 빛이 차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후훗, 어딜!”
릴리스가 눈을 빛내자. 잇신의 몸은 뻣뻣하게 굳었다. 릴리스의 스킬인 [석화의 시선]의 효과.
그러나 잇신은 몸에 효과가 퍼지기전에 망설임 없이 자신의 허벅지에 검을 찔러 넣었다.
파아악!
실드가 부서지고 허공에 튀기는 붉은 피.
[배리어가 22% 파괴되었습니다.]
[남은 배리어 78%]
홀로그램이 경고를 했지만 잇신은 피를 흘리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이것이 정보의 차이.
잇신은 스미레가 릴리스를 사역마로 다루게 되었다는 사실도. 릴리스의 스킬인 [석화의 시선]도 모두 알고 있었다.
“크윽! 너! 이런 무모한!”
놀란 릴리스가 뒤로 물러나자, 데스나이트가 몸을 날려 잇신에게 돌진했다.
콰앙! 쩌엉!
하지만 귀기를 두른 잇신의 검에 부서지는 갑옷의 파편.
파앙!
검신이 모두 붉게 물들자. 잇신의 검은 오히려 하얀 빛으로 변했다. 잇신이 흡수한 귀기가 한계치까지 차올랐다는 증거.
스윽. 척.
잇신은 칼집에 검을 집어넣으며 슬픈 목소리로 속삭였다.
“……백귀야행(百鬼夜行).”
츠츠츠츳!!
부웅-!
잇신이 칼을 뽑아내며 발도술을 펼치자. 모아둔 귀기가 파동처럼 방사됐다. 모두가 멈춘 정적의 1초.
파도처럼 밀려들던 언데드들은 반으로 잘려 쓰러졌다.
갑옷에 금이 간 데스나이트.
배리어가 부서진 릴리스.
매혹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릴리스는 5급 보스치곤 전투에 약했다.
반면 잇신은 다수를 상대론 일본 최강의 전투력을 가진 학생.
사아아-!
베어버린 언데드들은 다시 마나가 되어 잇신의 검에 흡수 됐다.
그야말로 순환의 연속.
“모두, 끝,까지 덤벼라! 주인님을 위해! 적에게, 파멸,을!”
데스나이트가 크게 소리를 쳤지만 승기는 잇신에게 기운 듯 보였다.
하지만 스미레가 지금까지 보여준 라플라스의 힘은 일부에 불과했다.
- 이제 내 힘이 필요한 차례구나.
재앙이라 불린 7급 보스.
역병의 마녀 라플라스의 속삭임.
라플라스는 스미레의 머릿속에서 달콤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 ……귀여운 아이. 네가 진심으로 염원하는 순간은 늘 그 사람을 위해서구나?
라플라스의 목소리에 스미레는 결의에 찬 눈으로 힘을 다해 말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게 힘을 빌려주세요!”
절박한 스미레의 부탁.
- 후훗, 그래. 빌려주도록 하마.
라플라스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 ……나를 닮은 아이야. 나는 너를 편애한단다. 원하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어리광을 부리렴.
화아아악!
멈춰버린 세상.
스미레의 시야는 검은색 구름에 휩싸였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눈앞. 곧이어 구름이 걷히자 달맞이 산의 풍경은 라플라스의 성으로 변해 있었다.
- ……너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한없이 쌓여있지만.
왕좌에 앉은 라플라스는 스미레를 내려다보며 마녀다운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 후훗, 오늘은 선물을 건네주는 걸로 만족하마.
스미레가 진지한 표정으로 눈에 힘을 주고 끄덕 고개를 움직이자. 라플라스는 이리오라는 손짓을 했다.
- 자 여기 앉아보렴.
라플라스가 안내해준 자리는 그녀의 왕좌.
“이건…….”
천천히 다가온 스미레가 왕좌를 바라보자. 라플라스는 직접 스미레를 왕좌에 앉혀주었다.
- 나의 왕좌란다. 그리고 이건 나의 장신구지.
톡. 스윽.
라플라스는 자신의 머리에 달려있던 꽃모양 장신구를 스미레에게 달아주었다.
- 역시 잘 어울리는 구나.
미소를 지으며 웃어주는 라플라스.
그녀는 마지막 인사를 스미레의 귓가에 속삭였다.
- 자 그럼…… 나의 아이야. 네 힘을 온 세상에 보여주도록 하렴.
왕좌에 앉은 스미레의 표정은 점점 변해가고 있었다. 눈은 여유로움이 감돌며 나른하게 웃고 있었고, 입은 빙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콰앙! 처엉!
잇신은 악귀처럼 언데드들을 베어나갔다.
사악!
조금만 더.
서걱! 츠아악!
조금만 더.
콰앙!
상대의 마나는 유한하고.
귀기를 가진 자신의 힘은 무한하다. 그러니까 잇신은 눈앞의 모든 적을 베어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분명 승기는 자신에게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고오오오.
하늘에 떠있는 밝은 달을 검은색 구름이 가려버렸다.
주변을 휩쓰는 불길한 기운.
온몸이 따끔거리는 기묘한 감각.
잇신은 구울에게 검을 박아 넣으며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걷히는 검은색 구름.
그러자 드러나는 붉은 달.
검은색 구름은 너무나도 불길한 기운을 풍기며 달맞이 산의 정상에 내려앉았다.
사아아-
정상에 머문 구름은 다시 걷히기 시작했다. 이번에 드러난 건, 정체불명의 왕좌. 그리고 미소를 짓는 스미레.
처억! 척!
구울.
해골.
데스나이트.
릴리스.
여왕을 경배하기 위해 언데드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다. 스미레는 그 모든 광경이 당연한 듯 여유롭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나지마. 너.”
당황한 표정의 잇신.
스미레는 평소와 다르게 고혹적인 목소리로 말을 했다.
“……울부짖어라.”
여왕의 목소리와 함께 포효하는 언데드들. 해골들은 무기가 생기고, 구울은 손톱이 붉어졌으며, 데스나이트는 검기와 안광을 내뿜었다. 심지어 릴리스에겐 아티팩트로 보이는 채찍이 주어졌다.
이것이 바로 7급 보스.
역병의 마녀 라플라스의 힘.
“……키리시마 씨. 저는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절대 질 수 없어요. 제가 가진 모든 힘을 사용해서라도 이길 거예요.”
스미레의 입에서 소중한 사람이란 단어가 나오자 잇신의 눈썹은 자신도 모르게 꿈틀거렸다.
“그럼 2회전을 시작할까요?”
스미레의 여유로운 미소.
잇신은 그런 스미레의 모습에 동요하고 있었다.
“하나지마-!!”
결국 기합을 내지르며 스미레에게 달려드는 잇신.
타앗-!
구울의 손톱에 상처가 나고.
해골의 머리를 밟아 뛰어넘고.
“난!”
릴리스의 채찍에 다리에 두른 배리어가 박살났지만 멈추지 않았다. 섬광 같은 움직임으로 데스나이트의 대검을 쳐내버리는 잇신.
쿠웅!
귀기를 두른 잇신은 쏟아지는 언데드 군세를 헤쳐 나갔다.
“분명, 네가 돌아 올 거라고-!”
절규와도 같은 외침.
매섭게 몰아치던 잇신은 이제 몸 전체가 귀기에 휩싸였다. 악귀처럼 붉게 빛나는 눈.
타앗!
강화된 잇신의 신체는 인간의 범주를 뛰어 넘은 속도였다.
검의 목표는 왕좌에 앉은 스미레.
하지만 스미레는 잇신에게 반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흰색의 제비꽃.
그 꽃을 바라 볼 때와 같은 눈빛.
“윽…….”
스미레를 마주하자.
멈칫.
잇신의 악귀처럼 붉어진 눈이 흔들렸다. 스미레는 그제야 보여준 적 없는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역시 키리시마 씨는 정에 약하시네요.”
사악.
스미레가 손을 뻗었다.
퍼어억-!
동시에 검은색 기운으로 꿰뚫려버린 잇신의 가슴.
[배리어가 모두 파괴되셨습니다.]
[남은 배리어 0%]
스미레의 일격에 잇신은 추락해 쓰러졌다. 망설임을 가진 순간 정해져버린 잇신의 패배.
“……졌군.”
스미레는 강했다.
이제 스미레는 잇신에게 의지 할 필요도 없었고,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건 오직 신유성뿐이었다.
“…하나지마. 난, 난 너에게 뭐였지?”
잇신의 쓸쓸한 질문에 스미레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아마, 동료였겠죠?”
그렇게 말을 하는 스미레의 모습은 잇신이 알던 스미레가 아니었다.
“하지만…… 키리시마 씨는 와주시지 않으셨잖아요?”
너무나도 고혹적인 목소리.
“제가 외롭고 힘들 때……. 곁을 지켜주시고, 용기를 불어넣어주신 건 키리시마 씨가 아닌 걸요?”
스미레의 말투는 잇신에게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계속해서 뛰는 가슴.
스미레의 입이 다시 움직였다.
“그래도 키리시마 씨에겐 고마워요. 덕분에……. 유성 씨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말을 하며 부끄러움에 볼을 붉히는 스미레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지금까지 잇신에겐 절대 보여준 적 없는 표정.
그 표정은 어떤 모진 말보다 잇신의 마음 속에 아픈 쐐기를 박아 넣었다.
사아아.
홀로그램의 파편으로 변해 사라지는 잇신의 몸.
‘만약, 만약 내가…… 하나지마를, 만나러 갔다면.’
잇신은 스미레를 올려다보며 이미 늦어버린 일을 되새겼다.
‘……그랬다면. 바뀌었을까?’
잇신의 입가에 남은 건 그저 씁쓸한 미소.
‘역시 하나지마, 난 너를…….’
세계가 무너지며 변해가는 눈앞의 시야. 잇신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