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국가대항전의 결과는 현재까지 1대1.
3라운드의 결과로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자존심이 걸린 승부가 결정지어진다.
그 모든 짐을 짊어지게 된 건 3라운드의 출전자인 스미레.
‘내, 내 승패에…… 대항전의 결과가 걸렸어.’
꿀꺽 침을 삼키는 스미레.
이번 대항전은 스미레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파티에서 2위의 전력인 김은아의 부재.
그리고 상대는 ‘그 사건’과 연루된 일본팀의 잇신.
심지어 라운드는 1대1.
이 모든 건 스미레에게 엄청난 부담이었다.
“……미안. 스미레. 네 어깨만 무겁게 만들었네.”
하지만 풀이 죽은 이시우의 모습.
스미레는 그 모습에서 한 장면을 떠올렸다.
[아니 스미레. 넌 엄청나게 공략을 단축시켰어. ……그러니까 이번 대회에선 네 활약이 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위로해주고 응원해준 신유성. 스미레는 이시우를 보며 웃어주었다.
“……괜찮아요! ……그렇게 시우 씨가 풀 죽으실 필요 없어요.”
분명하게 변화한 스미레의 모습. 스미레는 부담감에 짓눌린 상황에도 오히려 담담했다.
“저는, 저를 바보 같고 둔하다고 생각해서…… 믿지 못하지만…….”
눈을 똑바로 마주 보진 못하지만 스미레는 분명 신유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성 씨가 저를 믿어주셨으니까. ……그러니까! 저도 저를 믿을 수 있어요!”
그렇게 말을 하며 환하게 웃는 스미레. 지금의 말은 절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신유성을 위해 이기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면 오른손에선 라플라스의 힘이 늘 요동쳤다.
사아아.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은은한 보랏빛을 뿜어내는 오른손.
라플라스의 힘을 깨우는 가장 큰 마음은 강해지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스스로, 직접, 강함을 열망할 때 그 마음이 내재된 잠재력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스미레의 마음은 신유성을 위해 어느 때보다 강해지고 싶은 상태.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도 절대로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거예요. 꼭 제가 이길 거예요.”
단호할 정도로 의지를 다진 스미레의 모습. 신유성은 그런 스미레의 모습에 기분이 이상했다.
“……스미레.”
지금 스미레가 보여주는 의지는 처음 보여준 스미레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낮은 자존감.
그리고 두려움.
스미레의 마음은 여러 가지 일로 닳아 있었다. 마치 부모님에게 버림받고 상처를 입었던 5살의 신유성과 같았다.
그러나 신유성은 스미레에게 손을 뻗었다. 스승님이 그랬던 것처럼 스미레의 가치를 알아봐주었다.
지금 스미레가 가진 실력은 모두 신유성의 신뢰에서 비롯된 힘.
“……저는 유성 씨한테 어울리는 파티원이 되고 싶으니까요.”
그렇게 말을 하며 스미레가 웃자.
신유성은 마찬가지로 웃어주었다.
“스미레. 나는 널 믿어. 네가 진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아.”
신유성이 믿어주는 한, 스미레는 자신을 믿을 수 있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혼자서는 포기해버릴 상황도.
더 이상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저,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스미레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비장했다.
* * *
벽에 설치된 스크린.
메이린은 도도한 표정을 유지한 채 경기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런 겉모습과 다르게 그녀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라운드…….”
국가대항전 무대 자체도 큰 이벤트지만 이번에 걸린 보상은 무려 탑의 아티팩트. 천년옥.
내재된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만으로 신체와 마나를 몇 단계나 진화시킬 수 있는 보물이었다.
‘……천년옥은 강인한 신체가 없으면 힘을 흡수하기 힘든 물건이야. 이번 대회에서 천년옥을 다룰 수 있는 학생은 기껏해야 신유성과 류진 정도…….’
메이린의 입장에선 어떻게 해서든 스미레가 마지막 라운드를 이겨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기껏 준비한 50층의 보상인 천년옥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어떻게든 승리를 해줘야 할 텐데.’
의자에 앉은 메이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다리를 꼬았다. 하지만 아무리 걱정을 해도 이미 시작되어 버린 경기. 메이린은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 *
일본팀의 대기실.
3라운드의 확정으로 잇신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세이지는 하하- 하고 웃으며 응원을 했다.
“힘내! 잇신! 물론 파티장인 나는 보기 좋게 졌지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씨익 웃는 세이지. 기분이 좋아진 사쿠라는 평소의 분위기로 돌아와 있었다.
“뭐~ 성격은 바보 같지만. 잇신이 실력 하나는 확실하니까.”
세이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모두를 집중시키기 위해 검지를 들었다.
“그래도 조심하자! 스미레는 헌터 중에서 보기 드문 사령술사고. 아티팩트까지 보유하고 있어.”
“하긴…… 어떤 능력을 쓸지 예상도 안가.”
사쿠라가 맞장구를 치자. 세이지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이전에 같이 파티였던 학생과 붙게되다니……. 괜히 나 때문에 부담이 크겠는걸.”
스미레는 잇신의 파티원이자. 같은 반에서 공부를 했던 학생. 그리고 ‘그 사건’에 연루된 사연까지 있었다. 그러니 여러 가지 의미로 전투를 하기 꺼려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잇신은 눈을 가늘게 떴다.
“……상관없어. 배신자일 뿐이다.”
잇신의 단호한 목소리.
그때의 이상한 기분은 지금도 여전했지만 잇신은 최대한 가슴속 무언가를 억눌렀다.
자신의 기분 따위로 대회를 망칠 순 없었다. 하지만 잇신은 스미레를 볼 때마다 화가 났다.
자신을 한순간이라도 파티원이라고 생각했다면 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나 같은 건, 처음부터 안중에 없었다는 이야기겠지.’
저벅저벅.
잇신은 천천히 포탈이 있는 무대로 걸어나갔다. 건물을 벗어나자 환하게 쏟아지는 하늘의 빛.
관중들의 함성.
그 모든 중심에서 손을 모으고 자신을 기다리는 스미레.
두근두근.
잇신은 스미레를 확인하자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지금의 기분은 너무나 복잡했다.
늘 담담했던 마음이 좀처럼 안정이 되지 않고, 가슴은 짐을 얹은 듯이 한없이 무거웠다.
억지로 스미레를 외면하고 관중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잇신.
- 마지막 라운드의 출전자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승패가 걸린 국가 대항전의 마지막 라운드! 해설위원이신 쇼이치 님은……
시끄러운 유키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와중에. 스미레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잇신에게 말을 걸었다.
“……키리시마 씨.”
언제나 시선을 피하고 도망치던 스미레가 자신에게 말을 걸다니. 잇신은 믿기지 않는 상황에 인상을 쓰고 말았다. 애써 스미레의 말을 무시하려는 잇신.
하지만 그 다음 이어지는 스미레의 말은 더욱 믿기지 않았다.
“죄송해요.”
진지한 스미레의 목소리.
그건 잇신이 처음 듣는 스미레의 목소리였다.
“너…….”
결국 참지 못한 잇신이 고개를 돌렸지만 스미레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정말 죄송해요.”
평소와 다르게 스미레는 떨지 않았다. 오히려 겁에 질린 쪽은 잇신이었다.
“너! 대체 무슨…….”
“……저 하나 때문에 모두에게 피해를 입힌 게, 너무 무서웠어요. 다치신 분들이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전부 무서웠어요.”
왜 하필.
이 사과를 듣는 게 왜 하필 지금일까. 잇신은 손이 떨려왔다. 마음은 미친 듯이 동요하고 있었다.
“……전 이기적이에요. 혹시 키리시마 씨가 말리실까 봐.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혹시, 일본에 남게 되면…….”
말을 내뱉을수록.
아팠던 과거와 마주할수록 스미레는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오히려 두려움이 사라지고 떨림이 멎고 있었다.
“……제 잘못과 계속 마주해야 하니까. 그래서 그냥 말도 없이 도망친 거예요. 키리시마 씨가 말리면. 전, 한국으로…… 떠나지 못할 것 같았거든요.”
스미레의 목소리는 유키의 스피커 소리에 비하면 한없이 작았다.
하지만 잇신은 스미레의 옅은 호흡까지도 모두 또렷이 들려왔다.
“너, 대체 왜……. 그걸 왜 지금!”
한없이 동요하는 잇신의 마음.
잇신이 떨리는 눈으로 소리치자. 스미레는 결의에 찬 눈으로 잇신을 마주보았다.
“이걸 말씀드려야. 전력을 다할 수 있을 거 같았어요.”
“뭐라고? 넌…… 넌 끝까지 이기적이다! 네가 지금 사과를 한다고 내가 용서할 거 같아?”
며칠 전의 산책 때처럼.
잇신의 머리는 계속 지끈거려왔다.
“우린, 아니……, 나는 계속 기다렸다. 네가 돌아올 거라고 믿고. 파티의 남아있는 자리는……. 그건.”
잇신은 그건 스미레 너의 자리였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끝내 잇신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잇신은 수련을 통해 검술과 평정심을 갈고 닦았다. 하지만 오늘 스미레의 사과는 그 모든 노력을 허사로 바꾸었다.
불규칙한 호흡. 뛰는 가슴. 진정이 되지 않는 머릿속.
잇신에게 스미레는 끝까지 잔인하고 이기적이었다.
“……전 돌아가지 않아요.”
단호한 스미레의 목소리.
잇신이 이를 꽉- 깨물고 스미레를 내려다보자. 스미레는 결의에 찬 눈으로 잇신을 마주보았다.
“……전 지금의 파티가 더 소중해요. 전, 이기적이니까.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스미레가 내뱉는 한마디마다 산산이 부서지는 잇신의 마음.
“지금이 너무 기쁘고 행복하니까. 후회하지도…… 않아요.”
그렇게 말한 스미레는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아 넣었다.
“……제 파티장은 유성 씨에요.”
파르르 떨리는 잇신의 눈가.
- 자 그럼 대회의 시작에 앞서 모두! 포탈 앞에 준비해주세요!
유키의 시끄러운 안내가 잇신은 들리지도 않았다.
“나, 나도…… 아니 난.”
복잡한 머릿속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이마를 짚는 잇신.
둘은 결국 포탈의 앞에 섰다.
둘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늘 무표정한 얼굴이었던 잇신은 복잡한 눈빛으로 스미레를 흘겼고.
스미레는 평소의 소심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결의에 찬 눈으로 포탈을 바라보았다.
완벽하게 역전된 둘의 모습.
- 그럼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유키의 목소리와 함께.
사아아!!
포탈이 빛을 내뿜으며 시작한 경기. 스미레는 잇신을 두고 포탈의 빛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포탈의 빛에 스미레의 몸이 휩싸이자.
- 후훗, 네가 이리도 전략가인 줄은 몰랐거늘.
들려오는 라플라스의 목소리.
- 그래도 난 지금의 네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스미레가 빛에 휩싸여 얼떨떨한 와중에 라플라스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 그러니 너에게 상을 주마.
점점 쏟아지는 빛에 스미레는 결국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