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와아아-!
일본팀의 승리에 환호하는 관중들.
“2라운드는 사쿠라 학생의 승리입니다!
진행자인 유키가 마이크를 들고 소리치자. 응원을 위해 쏟아지던 박수 소리는 더욱 커졌다.
사아아!
환한 빛이 쏟아지며 포탈에서 걸어 나온 사쿠라는 이시우에게 말했다.
“너, 왜 쏘지 않았어?”
이시우는 멍한 얼굴로 관중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글쎄다. 실력이 녹슬었나보지.”
정확히는 망설임 때문이었다.
가혹한 훈련으로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준 권위적인 아버지. 반면 누구보다 자신의 아버지를 존경하는 사쿠라.
이시우는 자신의 어중간한 마음으로 그런 상대를 짓밟을 용기가 없었다. 평생 후회할 게 분명했다.
‘……꼭 이기려고 했는데.’
이시우는 여전히 떨리고 있는 손을 보며 인상을 썼다. 지금의 패배는 자신을 믿어준 신유성을 배반한 것과 같았다.
‘나에겐 파티에 남을 자격이 없어.’
하지만 이번 기회로 이시우는 마음을 다졌다.
‘활도 그만두고…….’
이시우는 사쿠라가 얼마나 궁술에 진지한지 직접 눈으로 보았다. 총을 피해 도망쳐온 자신의 어중간한 궁술로는 상대할 수 없었다.
‘뭐, 친해지고 싶긴 했지만……. 짐밖엔 되지 않는 것 같으니까.’
패자인 이시우는 홀가분하게 마음을 정리하고 있을 때, 사쿠라는 유키에게 마이크를 받고 있었다.
진행자인 유키는 해맑게 웃더니 승자인 사쿠라에게 인터뷰를 했다.
“사쿠라 학생은 한일전의 2라운드를 동점으로 만들어 주셨는데요! 혹시 활약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있나요?”
비밀이라며 귀를 쫑긋 거리는- 과장된 유키의 리액션. 사쿠라는 누군가를 발견하더니 복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최고의. 스승님 밑에서……. 궁술을…… 배웠거든요.”
사쿠라의 시선에 끝은 사쿠라와 전혀 닮지 않은 중년의 남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강직해보이는 눈에서 이시우는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인가.’
무심한 얼굴로 사쿠라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는 이시우.
자신의 어중간한 마음 때문에 파티에게 민폐를 끼쳐버렸다.
그 사실이 이시우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유성이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면 좋을까나.’
동료를 아끼는 신유성의 성격이라면 말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시우는 이미 선택을 내렸다.
* * *
비서 겸 6급 헌터 이수현.
신성그룹의 후계자 김은아.
둘의 갑작스런 등장에 일본 지부의 관계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아, 아가씨가 왜 여기에!?’
‘저 비서! 본사 사람 아닙니까?’
관계자들이 벌벌 떠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학생에 불과해도 김은아가 가진 권력에 밉보이면 절대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다.
김은아의 위에 있는 건 다름 아닌 신성그룹의 회장 김석한.
철혈의 사업가인 그가 유독 손녀 바보라는 사실은 업계 전체가 아는 사실이었다.
“나 바로 5층으로 올라가도 되지?”
김은아가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안내 데스크 앞에 서자. 여직원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 그게…… 따로 절차와 예약이 필요…….”
여직원이 힘겹게 말을 하자. 김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 몰라? 내가 엄마 만나러 간다는데. 허락을 안 해줘?”
너무나도 당당하게 나오는 김은아.
다른 사람이 이렇게 나오면 바로 시티가드를 불러 연행하겠지만 여직원은 울상이 된 얼굴로 상급자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요!?’
표정만 보아도 저절로 말이 들릴 지경. 상급자는 눈치를 보더니 결국 결정을 내렸다.
“5, 5층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일본 지부의 직원들까지 호들갑을 떨며 김은아를 안내해주는 모습.
지이잉.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이수현은 고개를 저으며 쯧쯧- 혀를 찼다.
“……으이그, 네 소문이 얼마나 안 좋으면. 여기 있는 직원들까지 벌벌 떠니?”
“내가 뭐?”
김은아는 직원들이 자신을 무서워한다는 자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뭐긴 뭐야. 까칠하게 굴지 말고. 나 너희 엄마한테 잘리면, 다음에 들어오는 사람한텐 좀 잘해주란 이야기야.”
이젠 마음 놓고 지적을 하는 이수현. 김은아는 흥- 하고 콧방귀를 끼더니 사무실을 지키는 경호원을 무시한 채 막무가내로 문을 열었다.
벌컥!
깔끔한 검정색 책상.
양 옆에 서있는 2명의 시티가드.
기껏해야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미모의 여성.
[신성그룹 일본 비즈니스 총괄]
[ 대표이사 - 김윤하(金潤河)]
그녀의 앞에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바로 기가 눌려버릴 명패.
하지만 김은아는 책상에 손을 짚으며 당당하게 소리쳤다.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이야!”
반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사무적인 눈으로 올려다보는 김윤하.
“은아.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니?”
김윤하의 한마디는 6급 헌터인 이수현도 오싹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김윤하 그녀의 권력은 재계는 물론 헌터들에게도 파급력이 엄청났다. 이수현조차 무서운 상대였다.
“이수현 비서. 은아가 대체 왜 여기에 있지?”
김윤하의 질문에 이수현은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음이 약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일처리를 이렇게 하다니. 정말 실망인걸.”
헌터도 아닌 김윤하의 기세에 이수현은 완벽하게 눌리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권력의 힘. 김은아는 인상을 썼다.
“왜 엄마는 이상한데 화풀이야? 국가대항전이 어떤 대회인지 알면서!”
“알고 있지. 그래서 더욱 이번 기회를 택한 거란다. 중요한 일정일수록. 파티원들이 대회를 망친 널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따박따박.
당당한 김윤하의 어투.
김윤하는 여전히 책상에 앉은 채 손에 깍지를 꼈다.
“은아야. 헌터가 하고 싶니?”
상상하지도 못한 의외의 질문.
김은아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연하잖아! 그러니까 입학…….”
“왜?”
김윤하는 가볍게 김은아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러자 김은아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건…….”
결국 말을 멈춘 김은아.
김윤하의 질문에 이상하게도 김은아는 목적이랄 게 떠오르지 않았다.
“……네가 정말 헌터가 되어야 하는 목표가 있니?”
차갑게 식은 분위기.
당장이라도 소리를 칠 것 같았던 김은아는 김윤하의 페이스에 말리고 말았다.
“난 너를 알고 있단다. 은아야. 돈. 명예. 희생정신. 넌 무엇 하나도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아.”
스윽.
김윤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김은아를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내리깔았다.
“그런 어중간한 마음으론 누구에게도 민폐일 뿐이야.”
너무나도 뼈아픈 지적.
김은아가 떨리는 입을 멈추기 위해 꾸욱- 다물자. 김윤하는 김은아에게 시선을 맞췄다.
“오빠를 보며 느낀 점이 없니? 지금처럼 학교에서 어울리는 정도야 괜찮지만……. 만약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김은아조차 이런 분위기로 변한 김윤하는 너무나도 무서웠다. 식은땀을 흘리는 김은아에게 싱긋. 웃어 주는 김윤하.
“은아야. 그건 민폐란다. 가온의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일이지. 누구도 네가 다치는 걸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아. ……넌 왕관을 써야할 몸이니까.”
김윤하는 김은아의 양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든. 넌 헌터가 될 수 없단다. 내가 허락하지 않을 거거든. ……과연 아버님은 어떨까? 네 편을 들어줄까?”
만약 김석한이라면 김윤하의 말을 들어줄 확률이 더 높았다. 회장인 김석한도 김은아가 위험에 빠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
“아, 아니야……. 나도…… 나도 목표가 있어!”
김은아가 고개를 젓자. 김윤하는 부드럽게 김은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응, 이 엄마는 알고 있단다. 네 그 소꿉놀이 말이지?”
하지만 김윤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사무적이었다.
“하지만 은아야. ……그건 신유성이라는 학생의 목표지. 네 목표가 아니잖아?”
김윤하의 말을 들었을 뿐인데 갑자기 뻣뻣해지는 몸. 김윤하의 통찰에 김은아는 몸은 물론 마음까지 전부 벗겨진 기분이었다.
“응, 파티원인 그 학생들이 좋은 거라면. 괜찮아. 네 곁에 두면 되지. 아무리 돈을 써서 지원해주더라도 엄마가 모두 허락해줄게.”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김은아는 부정하고 싶지만 김윤하의 말이 모두 맞았다. 무엇하나 부정할 수 없었다.
“난…….”
자신의 목표는 뭘까.
생각해보면 신유성을 따라 파티원이 됐고, 국가대항전에서 우승하겠다는 것도, 탑을 오르겠다는 것도, 모두 신유성의 목표였다.
김은아가 이루고 싶은 건 그냥 파티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 기껏해야 그게 전부. 김윤하의 통찰은 정확했다.
“은아야. 모든 사람에겐 자신의 분수가 있단다. 아무리 강한 척 허세를 부려도. 엄마는 모두 알아.”
속삭이듯 부드러운 목소리.
김은아는 점점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엇 하나 반박 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김윤하는 그런 김은아에게 쐐기를 박아 넣었다.
“넌 상처받고, 연약하고. 세심한 아이란다. 마치 온실의 화초처럼 말이야. ……네가 정말 헌터들이 겪는 좌절을 견뎌낼 수 있을까?”
김은아가 부들부들 몸을 떨자, 김윤하는 그런 김은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분명 넌 고장 나 버릴걸. 차라리 더 정이 들기 전에 파티에서 떠나는 게 어떻겠니?”
입을 꾹 다물고 울상이 된 김은아.
‘……아가씨!’
이수현은 그런 김은아를 눈빛으로 응원했다. 이수현은 김은아가 얼마나 파티원들을 좋아하는지, 헌터 일에 진지한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인물. 김은아는 용기를 내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