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무신산.
신유성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장소. 하지만 신유성의 굳은 표정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 짹짹, 짹짹!
숲 속에서 지저귀는 새의 소리.
바스락. 바스락. 파작!
발로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 신유성은 마치 정글 같은 풀숲을 천천히 걸어나갔다.
‘……절대 긴장을 풀면. 안 돼.’
지금 신유성은 모든 감각은 끌어 올린 상태였다.
쿵!
뒤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발돋움 소리. 신유성의 반응속도는 섬광처럼 빨랐다.
하지만 뒤로 고개를 돌린 순간, 신유성은 깨달았다.
‘속임수다!’
신유성은 재빠르게 몸 안의 모든 감각을 끌어올렸다. 집중력이 강화되며 계속해서 가속되는 머릿속의 사고. 신유성의 세상은 시간이 멈춰버린 듯 느렸다.
‘어디지?’
신유성은 기척을 살피려고 애썼다.
그리고 일순, 예리한 공포감이 시야의 사각에서 밀려 들어왔다. 마치 잘 벼려진 칼날과 같은 살기.
상대는 기척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콰아아앙!!
양팔을 교차해 주먹을 받아낸 신유성. 하지만 미처 막아내지 못한 엄청난 파워에 바닥을 구르며 뒤로 날아갔다.
콰아아앙!!
하산을 한 이후, 엄청나게 실력이 늘어난 신유성도 상대의 강함에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윽……. 역시 아직은 무리인가.’
뭉게뭉게.
바닥에서 피어난 흙먼지가 점점 걷히며 상대의 모습이 드러났다.
“크하하하! 내 힘의 2할이나 담은 주먹을 막아내다니! 역시 나의 제자구나!”
권왕 유원학.
신유성은 스승이 기뻐하는 웃음소리를 들으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제 부탁에 직접 찾아와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스승님.”
신유성이 비틀거리며 인사를 올리자. 유원학은 신유성이 5살이었던 그때처럼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놈! 그렇게까지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다! 안 본 사이 실력이 제법 늘었더구나. ……직접 4장을 깨우치다니 말이야.”
흐뭇해 보이는 유원학의 표정에 신유성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모두 스승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오랜만에 유원학을 만난 신유성은 기뻐 보였다. 평소보다 밝아 보이는 표정이 그 증거.
“그래도 대결을 보니. 아직은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더구나.”
유원학은 신유성과 아델라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그 결과 신유성이 사용한 흑룡강신의 문제점을 바로 찾아냈다.
스윽-
유원학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크흠! 여긴 설명하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니, 일단 걷자꾸나!”
“네! 알겠습니다!”
싱글싱글 웃으며 유원학의 뒤를 따르는 신유성.
터덕터덕.
“스승님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동료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잘 보여주지 않는 들뜬 얼굴로 신유성이 이야기를 하자. 유원학은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 그러기 위해선 많은 수련이 필요할 게다.”
그리곤 유원학은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 뜻은 헌터들이 바라는 가장 높은 곳.
“적어도 탑의 20층까진 닿아야. 내가 관심을 가져줄 테니 말이다!”
아카데미의 1학년에 불과한 신유성에게 탑의 20층을 돌파하라니. 일반인의 상식으론 상상조차 못할 이야기. 하지만 신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주십시오. 스승님.”
* * *
주말의 헌터부.
대부분의 학생들은 주말을 즐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신하윤은 휴일조차 일을 했다.
“……졸업반이랑, 2학년들 의뢰는 전부 정리했고. 1학년 들은?”
눈을 가늘게 뜬 신하윤의 질문에 이혁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게, 성혁이가…… 아직 복귀를 못했나봐. 공략이 하루 정도 더 걸릴 거 같다고…….”
“……S반이 그 정도 공략에 쩔쩔매다니.”
신하윤 차가운 시선으로 나머지 서류들을 훑어보았다. S반의 1학년인 민성혁에게 관심이 사라졌다는 증거. 이혁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 기분이 나쁜 모양이네.’
신하윤은 톡톡- 책상을 두드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정말 특성으로 학생들의 실력을 분류하는 건. 구시대적 발상일지도 모르겠어.”
그건 신하윤이 신유성을 보며 바뀐 생각이었다. 신하윤의 기준에서 특성은 무의미했다. 상대가 강하기만 하다면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신유성은 F급의 특성으로 엄청난 실력을 보여줬다.
처음 보는 이레귤러의 존재.
신하윤은 꽤 깊은 감명을 받은 상태였다.
“……물론. 어떤 F반 학생도 내 동생만큼 강하지는 못하겠지만 말이야.”
스윽.
신하윤은 모든 서류를 칼같이 정리하더니. 이혁에게 물었다.
“그래서 내가 부탁한 자료는?”
“자, 여기 있어.”
이혁이 내민 건 1학년들의 명단이었다. 정확히는 신유성의 파티에 소속된 1학년들의 명단.
“대표 출전자는 스……미레. 김은아. 이 두 명이라는 거지?”
이혁은 신하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니 서류의 밑을 가리켰다.
“응. 그리고 밑에 적힌 두명은 2군인 거 같아. 아마 비상시에 사용할 교체 멤버겠지.”
“……이시우. 에이미. 뭐 나머지는 됐어. ……후훗, 어차피 세븐넘버도 아니잖아?”
신하윤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훑더니 누군가의 이름에서 시선이 멈췄다.
[이름: 김은아]
[특이사항: 재벌 후계자/반장]
[반: 1학년 A]
[특성: 전기]
‘흐응……. 그러고 보니…… 신성그룹의 후계자라. ……이전에 꽤, 재밌는 소문을 들은 거 같은데.’
신하윤은 헌터명가인 신오가문의 출신. 재벌인 신성그룹의 소식은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후훗, 아~ 알겠다~”
신하윤은 재밌다는 얼굴로 이혁을 보더니 비릿하게 웃었다.
“뭐, 뭐가?”
당황한 이혁이 되묻자.
신하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 별 거 아니야. 그냥 장난?”
* * *
질겅질겅.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풀을 뜯어 먹는 토끼들.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크기의 호수.
유원학은 당당한 얼굴로 신유성에게 소리쳤다.
“자! 유성아! 이 호수를 보아라!”
“네! 스승님!”
오랜만의 수련에도 싱글싱글 웃는 신유성. 유원학은 당당하게 팔짱을 끼더니 굵은 검지를 올렸다.
“자, 너는 흑룡강신의 파동이 어떤 형태라 생각하느냐?”
“……파동의 형태, 말입니까?”
유원학의 질문에 신유성은 고민에 빠졌다. 지금까지 흑룡강신을 유지하는 일에만 신경을 썼지. 형태에 관해선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마, 이런 느낌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르륵!
신유성이 마나를 손바닥에 피어 올렸다. 이리저리 거세게 방출되며 사라지는 마나의 흔적. 신유성의 손에서 흩어진 마나는 흑룡강신이 보여준 폭발적인 기세와 닮아 있었다.
유원학은 신유성이 보여준 마나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혀를 찼다.
“쯧쯧, 이놈아. 그런 식의 방출은 아무리 강하더라도 의미가 없는 힘이다! 자 보거라!”
위이이잉!!
유원학은 손바닥에 마나를 모았다.
그 다음 무언가를 밀쳐내듯 호수를 향해 손바닥을 뻗는 유원학.
팡! 탓!
순수한 마나의 파동이 호수에 닿자. 운석이 크레이터를 만들 듯 호수에는 거대한 여파를 만들어냈다.
쿠콰콰콰쾅!!
호수에서 치솟는 엄청난 양의 물.
“이것이. 네가 마나를 방출한 사용방법이다. 마나는 많이 사용하지만. 실질적인 파괴력은 높지 않지.”
권왕이 보여준 힘은 충분히 파괴적이었다. 일반인은 스치기만 해도 먼지가 되어 사라질 위력.
신유성은 진지한 얼굴로 유원학의 설명을 집중해서 경청했다. 유원학은 신유성의 그런 모습에 픽- 하고 웃었다.
“좋은 동료가 많아졌다더니. 안 본 사이에 표정이 꽤나 다양해졌구나. 자 그럼 어디 집중해서 보거라!”
쐐애액!
유원학은 마나를 실어 호수를 향해 수도를 내려쳤다. 손이 보이지 않는 쾌속. 엄청난 소리를 내며 날아간 파동은 호수를 움푹 파냈다.
처엉!
내부의 물이 양옆으로 걷히며 반으로 갈라지는 호수. 투자한 마나의 양은 적지만 파괴력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보았느냐? 마나는 어떤 형태인지에 따라 용도가 다른 법! 이제 너의 흑룡강신에 접목해보아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끄덕.
고개를 움직인 신유성은 천천히 마나를 끌어 올렸다.
‘……형태에 따라. 용도가 다르다.’
집중력을 극대화하며 유원학의 말을 되새겨 보는 신유성.
‘그럼 흑룡강신에 어울리는 방출의 형태는 무엇일까?’
최선의 결과를 만들기 위한 고민.
신유성의 특성인 집중력은 특히 이런 부분에서 통찰을 발휘했다.
‘생각하자.’
아델라와 치렀던 전투에서 흑룡강신의 가장 큰 문제점은 빠른 마나소모였다. 기술을 지속시키려면 무엇보다 적정량의 마나를 사용하는 게 중요했다.
‘……효과를 떨어트리지 않으면서. 소모되는 마나를 줄여야 해.’
고민을 끝낸 신유성은 순식간에 몸 안의 마나를 끌어올려 흑룡강신을 사용했다.
츠츠츠츳!!
처음처럼 이리저리 주변을 향해 분산되는 마나. 신유성은 차분하게 뿜어지는 마나를 몸쪽으로 압축시키려 애썼다.
츳! 츠츠츳!
점점 멎어가는 마나의 소리.
즈즈즛.
흑룡강신의 기운은 잘 벼려진 흑요석처럼 정돈된 빛깔을 뿜어냈다.
“……그게 네가 생각한 최적의 형태더냐?”
유원학이 진지한 얼굴로 웃자. 신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승님.”
그러자 유원학은 씨익- 이를 드러내며 만족한 듯 웃었다.
“훌륭하구나.”
청출어람.
신유성은 권왕이라 불리는 유원학보다도 잠재력이 높았다. 그렇기에 유원학은 생각했다.
‘역시 유성이는…….’
어쩌면 자신의 제자인 신유성은 정말로 유원학이 염원했던 탑의 끝에 도달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성아. 나는 그날이 기다려져 한순간도 참을 수가 없구나!’
유원학은 속마음을 뱉는 대신 신유성을 바라보며 그저 크하하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