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세븐넘버의 기숙사.
밤이 다 된 시각이지만 스미레는 닭튀김 카레와 새하얀 쌀밥을 다시 그릇에 퍼주며 해맑게 웃었다.
“자 여기 있습니다!”
“흐아아악! 미쳤어! 대체 어떻게 이런 음식을 기숙사에서……. 스미레 넌 못하는 게 뭐야!?”
호들갑의 주인공은 레니아.
귀신의 집 담당을 끝내고 돌아가는 김에 마침 레니아는 스미레의 집에 들렀다. 저녁 시간에 집으로 온 손님을 절대 빈속에 돌려보낼 스미레가 아니었다.
“맞습니다. 주인님. 이 음식은 정말로 맛있습니다! 제 서큐버스 인생에서 가히…… 최고의 음식!”
같이 온 릴리스는 딱히 음식을 먹을 필요도 없으면서 스미레의 카레를 음미하고 있었다.
“……저, 정말요?”
“정말이냐고? 이건 말이지…….”
스푼으로 카레를 한입 잔뜩 머금은 레니아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호랑이랑 백상아리가 점프해서 하이파이브 치는 맛이야…….”
“아…… 아아!”
스미레는 레니아의 말을 이해한 듯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있으면 국가대항전이지? 흐으~ 너도 참 긴장 되겠다. 우물.”
“……그렇죠. 근데, 괜찮아요! 유성 씨도 은아 씨도 모두 강하시니까. 설령 제가 지더라도…….”
그렇게 말을 하며 스미레가 웃자.
레니아는 포크를 물더니 흠- 하고 소리를 냈다.
“하긴, 유성이가 지는 그림은 상상이 안가. 은아도 마찬가지고.”
“그렇죠?”
식사가 끝나고 레니아는 기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카레! 잘 먹었어! 내일 주말이겠다. 혹시 심심하면 불러~”
“조심히 들어가세요!”
현관에서 레니아를 배웅해준 스미레는 소파에 앉았다.
‘일본…….’
무릎을 껴안고 웅크리는 스미레.
‘……여전히, 나를 미워하시겠지?’
고민에 빠진 스미레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흘러갔다.
[너 같은 배신자가……. 왜 여길!]
자신을 내려다보던 잇신의 화난 눈동자. 스미레는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 한 편이 서늘했다.
[……그래. 할 수 있는 말이 없겠지. 파티원을 배신하고. 한국으로 도망친 너 같은 건 말이다.]
스미레는 손을 뻗어준 잇신과 파티원을 두고 일본을 떠났고.
[……널 불쌍하게 여겨서 베푼 호의였다. 내 파티에 넣어준 것도. 네 기분 나쁜 능력에 머리카락을 빌려준 것도. ……전부.]
잇신과 파티원은 배신감을 느꼈다.
‘……내가 또 상처 받은 사람을 만들어낸 거야. 그건, 틀림없이 전부…… 내 잘못이야.’
잇신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
스미레는 질끈 입술을 물었다.
‘그래도 난……. 이기고 싶어.
스미레는 쵸텐에서 잇신을 막아서주었던 신유성을 떠올렸다.
[더 이상. 스미레를 향한 무례는 파티장인 내가 용납하지 않아.]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너무 기뻤다. 스미레를 위해서 그렇게 나서준 사람은 신유성이 처음이었다.
‘유성 씨를 위해서라도……. 난 꼭 이길래. 어떻게 해서든 이길 거야.’
결심을 다진 얼굴로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는 스미레. 오른손은 마치 스미레의 감정에 반응하듯 보랏빛이 감돌고 있었다.
‘라플라스…….’
스미레는 새로이 얻게 된 편린의 이름을 되새겼다. 역병을 퍼트린 사악의 마녀. 하지만 7급 보스로 분류된 강한 존재.
‘내가…… 이 힘을. 많이 흡수할수록, 더 유성 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거야…….’
스미레는 마음속으로 결의를 다지더니. 포켓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스미레가 꺼낸 건 다름 아닌 라플라스의 일기장.
사아아아!
일기장은 스미레의 오른손처럼 똑같은 보라색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꿀꺽.
일기장의 위용에 긴장한 스미레는 침을 삼키더니. 천천히 일기장을 넘겼다.
[마녀는 재앙에서 태어난다.]
일기장에 적힌 건 누구도 알 수 없는 이계의 언어였지만, 탑의 기술로 만들어진 포켓은 가볍게 번역에 성공했다.
[……분노가 작열을. 슬픔이 냉기를. 괴로움이 역병을.]
하지만 번역이 되어 문자가 나오는것도 잠시.
[■라리 ■보단……. ■■■ ■■ 때, ■■는 비로소 ■■에서 태어난다. 난 ■■의 진■를 ■■…….]
지직! 지지직!
더 이상 포켓의 번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직 소리를 내더니 팟- 하고 꺼져버리는 포켓의 번역 기능.
‘이, 이건……’
당황한 스미레의 앞에서 일기장의 페이지는 빛을 내뿜었다.
‘날, 부르고 있어…….’
왜 자신이 알고 있는지 그것에 대한 이유는 스미레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편린을 가지고 있는 스미레는 확신했다.
‘여기에 손을 대면…….’
꿀꺽.
침을 삼킨 스미레가 손을 얹자마자 퍼지는 밝은 빛.
사아아악!!
보라색 빛은 스미레를 향해 엄청난 광채로 퍼져 나왔다.
* * *
축제에도 F반의 이벤트만 끝내고 금방 기숙사로 돌아온 이시우.
“흠, 에휴…….”
이시우는 신문지가 깔린 바닥에서 총기를 꺼내 손질하고 있었다. 한 손에 쥐어지는 권총. 기다란 크기의 저격총. 보편적인 돌격소총까지. 총의 종류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총들은 이시우의 손을 지나치자마자 분해가 되고 재조립되어 갔다.
‘난 대체 뭘 하고 있냐.’
이시우는 분명 총을 싫어했다.
어린 시절부터 주입된 엘리트 교육. 그저 총을 잡기만 해도 머리가 차가워지는 기분은 이질적이었다.
하지만 이시우는 총이란 물건과 너무나 긴 시간을 함께했다.
총을 빼버리면 가슴 속 무언가가 텅 비어버리는 느낌.
‘……굳이 말하자면. 애증이려나.’
이시우의 기분은 복잡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아버지가 바라는 삶 따윈 절대 살지 않을 거라고. 이시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스미레는 눈을 깜박거렸다.
빛이 덮친 공간은 기숙사가 아니었다. 이제 눈앞에 보이는 건 화려한 샹들리에와 테이블.
조르르륵.
그리고 찻잔에 차를 따르는 라플라스였다.
- 생각보다 금방 보게 되었군.
라플라스 턱 끝으로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아, 네!”
스미레가 퍼뜩 자리에 앉자. 라플라스는 찻잔을 건네며 웃었다.
- ……이 테이블과 찻잔. 정말 편리하더구나. 이게 다 네가 편린을 얻어준 덕이다.
비록 편린이지만 어느 정도 힘이 돌아온 덕분에 라플라스는 새로운 물건들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그게 진짜 라플라스의 성격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지금의 라플라스는 허상세계의 존재. 라플라스의 조각난 일부였다.
- 자, 나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테지?
라플라스의 질문에 스미레는 곰곰이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제일 처음 물어보고 싶은 건 역시 하나였다.
“가, 강해지고 싶어요!”
스미레의 질문에 라플라스는 찻잔을 홀짝이더니 뒤늦게 입을 열었다.
- ……그건 나의 전문이군. 좋아, 너는 얼마나 강해지고 싶지?
라플라스의 질문에 스미레는 신유성을 떠올렸다. 신유성의 옆에 머물기 위해선, 파티로서 도움이 되기 위해선 스미레는 더 강해져야 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킬 만큼, 강해지고 싶어요!”
스미레의 말에 라플라스는 입꼬리를 올렸다.
- 사악의 마녀에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힘을 달라고 하다니……. 후훗, 과연 내가…… 그런 부탁을 들어줄까?
스미레는 라플라스의 이야기에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주실 거 같아요.”
너무나 진지한 스미레의 모습.
라플라스의 눈은 어느 때보다 차가워졌다.
- ……좋아. 근거는?
살얼음판과 같은 분위기.
스미레는 평소보다 담담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저는…… 아카데미에서 아웃 브레이크 현상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어요.”
- ……그렇군. 시작은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구나.
“왜, 일어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게이트나 던전을 통해 다른 차원의 괴수가 쏟아지는 것…….”
스미레는 필기에 관해선 엄청난 우등생이었다. 시험 성적도 상위권인데다 개인적인 호기심도 꼭 답을 찾아야 했고, 늘 책을 가까이했다.
“그런데 일부, 지성이 있는. 존재들도 보스로 나타나면…… 꼭 인간들을 공격하죠.”
-재밌구나.
“……아, 아웃브레이크로 태어난 존재들의 진짜 무서움은……. 인간. 그리고 다른 차원에 대한 적개심.”
스미레는 라플라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적개심은 아웃브레이크 현상이 만들어 낸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펴, 편린 속의 라플라스 님의 성격이…….”
- 진짜 나의 모습이다?
라플라스는 인자한 얼굴로 스미레를 내려다보았다.
- 하지만 그건 모두 너의 상상일 뿐이다. 내 머리에는 다른 차원의 기억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
편린 속에 있는 라플라스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지성이 있었으며, 인간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의 말은 진실. 라플라스는 스미레에게 다가와 턱 끝을 잡아 올렸다.
- 하지만 확실히 너의 추리는 재미있구나.
라플라스는 스미레의 대답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 좋아. 후훗, 힌트를 주지.
여왕처럼 고압적인 자세로 스미레를 내려다보는 라플라스. 그녀는 스미레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 잘 들어라. 편린의 힘을 일깨우는 방법은……. ……너의 ■■하는 마음이다. 알겠지?
무언가에 가려져 도저히 들리지 않는 라플라스의 목소리. 당황한 스미레의 모습에 라플라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이 다 된 모양이군.”
스미레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라플라스가 만든 세계는 점점 무너지며 스미레의 기숙사로 변해가고 있었다.
-■ ■어라! 강해■■자 하는, ■■이 ■■수록. ■■…….
라플라스는 다시 소리쳤지만 이미 스미레의 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남은 건 텅 빈 세븐넘버의 기숙사.
스미레는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크, 큰일 났다.”
스미레는 퀴즈에 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