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95화 (95/434)

제95화

무도회의 바깥.

밤이 다가오며 푸른 하늘은 점점 검게 물들고 있었다. 아직은 비교적 하늘이 밝은데도 보이는 달.

김은아는 벤치에 앉아있는 신유성에게 이온음료를 건네주었다.

“자 너도 한잔하셔.”

“고마워.”

딸칵. 벌컥벌컥.

마치 합이라도 맞춘 듯 매끄럽게 목을 넘어가는 이온음료.

“흐음.”

이온음료를 다 마신 김은아는 신유성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넌 참 신기하네.”

어쩐지 평소보다 진지한 분위기.

김은아는 한결 차분해진 눈으로 신유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처음으로 같이 간 카페, 김준혁을 구해준 병원, 텐트에서 숙영을 했던 에버라인 산.

“바보 같다가도. 진지하고…….”

김은아는 기억 속 신유성의 모습들을 짚어가며 하나씩 말을 뱉어냈다.

“……가끔은 단순한데. 어떨 때는 엄청 복잡하고.”

김은아가 지켜본 신유성은 그 어떤 순간에도 의지가 되는 사람.

“겉으론 순진해 보이는데, 역시 속마음은 모르겠고…….”

하지만 신유성은 자신의 감정을 잘 내비치지 않았다.

어쩌면 무감했던 무신산의 생활 속에서 혹은, 너무 슬펐던 5살의 기억 속에서 신유성의 감정은 모두 닳아버린 걸지도 몰랐다.

김은아는 그런 신유성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 보였다.

눈을 마주친 채, 씁쓸하게 웃는 김은아.

“그래서 궁금하더라. ……괜찮냐?”

신유성은 말없이 김은아를 마주보았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김은아는 그런 신유성의 반응마저 예상한 모양이었다.

“……너 남은 잘 위로하는 주제에 위로받는 건 완전 초보잖아.”

본인이 말을 뱉어놓고 김은아는 무안함에 검지로 뒷목을 긁었다.

“뭔가…… 말이 없으니까. 엄청 민망하네.”

신유성은 신오가문. 그리고 신하윤의 일로 생각이 복잡했던 참이었다. 김은아는 그런 기색을 눈치 챈 모양. 신유성은 대답 대신 옅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은 거 같아. 누구에게나 고민은 있으니까. ……거기다 난 동료인 너희가 있잖아?”

진지한 신유성의 모습에 김은아는 쯧- 혀를 차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근데, 고민이 있으면 너도 좀 털어놔. 끙끙 앓지 말고…….”

김은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휘익- 음료 캔을 솜씨 좋게 분리수거 통에 던져 넣었다.

“오예. 다트는 못 맞춰도 내가 캔은 잘 넣는다니까.”

김은아는 피식 웃더니 다시 손을 건넸다. 자연스럽게 그 손을 맞잡는 신유성. 김은아가 신유성을 조용한 곳으로 데려온 건 지금의 가르침을 위함이었다.

“초보자니까. 시작은 느릿하게, 상대 움직임을 봐.”

5살부터 온갖 엘리트 교육을 받아온 김은아는 춤에도 능숙했다. 초보자인 신유성의 손을 맞잡은 채로 김은아는 느릿한 발걸음으로 리듬을 주고 있었다.

“초보자는 서투니까. 처음 시작은 느리게 하는 거야.”

김은아는 부드럽게 신유성의 손을 잡아끌었다. 풀어둔 긴 생머리가 짧은 동작에 흔들릴 때마다 좋은 향기가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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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김은아의 흐름에 이끌려 가는 신유성. 김은아는 신유성을 위해 쉬운 포크 댄스로 하나씩 박자를 새겨주었다.

“알아가는 거지. 상대가 원하는 리듬은 빠른지, 아니면 느린지.”

간단한 동작이지만 절도 있게 신유성을 이끌어가는 김은아.

“……같이 춤을 추면. 상대방의 기운을 알 수 있거든.”

점점 하늘이 어두워지며 달빛이 밝아지자. 김은아의 검은 생머리는 조금씩 푸른빛을 머금었다.

동작을 따라 하늘거리는 파란색의 드레스. 역시 동료들과 겪게 되는 경험은 온통 처음이었다.

‘카페도……. 무도회도…….’

신유성은 동료들과 경험을 쌓아가는 지금이 기뻤다. 매 순간이 새로운 경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은아가 아니었다면 상상도 못 했겠지.’

처음으로 얻은 친구도, 그토록 원했던 단란한 가족의 삶을 느끼게 된 것도, 도시에서 겪는 새로운 생활도.

지금 보면 모두 동료들이 곁에 있었다. 모두 혼자서는 알 수 없는 것들.

“이거 봐. 너, 생각에 빠졌지?”

느릿해진 춤 동작에 김은아는 신유성을 향해 씨익- 웃었다.

“……기분을 알 수 있다더니. 정말이네?”

“고민이 많으면 동작이 느려지거든. 기분에 따라 동작이 부드러워지기도 하고, 격해지기도 해.”

김은아의 진지한 모습.

연회 때문인지 김은아는 신유성에게 춤에 대해 확실히 가르쳐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같이 춤을 추는 순간.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니까. 흐름을 맞추는 거지.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무도회에서 들려오는 음악이 서서히 끝이 나자. 김은아는 멋들어진 자세로 춤을 멈췄다.

“짠. 어때 멋있음?”

파닥파닥.

드레스의 끝을 아기새의 날개처럼 파닥거리는 김은아. 신유성은 김은아를 바라보는 와중에 묘한 기척을 느꼈다.

‘……누군가 쳐다보는 느낌인데.’

하지만 축제로 시끄러워진 교내는 신유성의 감각으로도 기척을 다 잡아낼 수 없었다.

‘기분 탓인가.’

*     *      *

까딱- 까딱-

어스름한 달빛이 비추고 있는 밤.

신하윤은 높은 강당에서 김은아와 신유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후훗. 아~ 정말이지 질투가 나는걸? 유성아…… 그래서야 쟤네들이 네 가족 같잖아?”

신하윤의 싸늘한 시선.

지금 신하윤이 느끼는 감정은 귀여운 질투 같은 게 아니었다. 신오가문의 후계자인 신하윤에게 실력이 좋은 신유성은 꽤나 좋은 카드.

그러니 신하윤은 어떻게든 소유하고 싶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로막는 걸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아쉽게 됐어. 차라리 혼자였다면 구슬리기 편했을 텐데…….”

작게 중얼거리던 신하윤은 무언가 떠오른 듯 드레스를 파닥거리는 김은아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아니 오히려 다행인가?’

신하윤이 본 신유성은 파티원들이 각별해보였다. 어쩌면 신유성 자신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존재.

‘……내 밑으로 데려오기엔 차라리 지금이 좋을지도 모르겠어.’

신하윤이 신유성을 원하는 건 좋은 카드로서의 소유욕. 어떤 이유가 됐든 일단 가지는 게 중요했다.

‘그럼…… 그때까진. 얼마나 크는지 지켜보도록 할까?’

신하윤이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자.

이혁은 축제기간에도 신하윤의 옆에 남아 보고를 했다.

“……아까 신성그룹의 관계자가 연회장에 왔어. 학생들을 스카웃하러 온 거 같은데. 어떻게 할까?”

“괜찮아. 내버려둬.”

“그래?”

“내가 학생회장인 이상. 우리가 점찍어둔 건 전부 우리 카드야.”

신하윤의 여유로운 미소에 이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혁은 단 한 순간도 신하윤의 수완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학생의 신분으로 헌터부와 길드 간의 커넥션을 만들고, 기업의 의뢰까지 따올 수 있도록 발전시킨 지금.

신하윤은 가온의 학생회장 신분까지 얻었다.

‘……신하윤이라면 지금보다 헌터부를 몇 배로 키워내겠지.’

이미 신하윤이 만들어낸 파벌은 단순한 학생이 아니라 길드에 가까운 수준. 이혁은 계속 신하윤의 밑에 남고 싶었다.

‘내 감은 확실해. 신하윤은 언젠가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최강이 된다.’

그러니 이혁은 계속 신하윤을 보필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때까지 곁에 둘지는 오직 신하윤의 마음. 이혁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이용가치가 없는 사람은. 신하윤에게 쓰레기나 마찬가지니까.’

이혁은 고개를 들어 신하윤을 바라봤다. 태어나기를 군림하기 위해 태어난 고고한 여자.

“……무슨 생각해?”

옅은 웃음과 함께 신하윤이 긴장한 이혁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이혁은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답했다.

“어떻게 해야 안 버림받을까?”

신하윤은 이혁의 장난이 마음에 들었는지 큭큭- 웃었다.

“그건 잘 생각해봐. ……정답은 나도 모르니까.”

*     *      *

신성그룹의 회장실.

“이, 이런……. 내 이런! 허어, 참 이거…….”

김석한은 포켓의 메시지를 확인하며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상상도 못한 가시방석에 이수현은 입술만 씰룩거리고 있었다.

‘미치겠네. 얜 대체 왜 들켜가지고. 내가…….’

신유성과 김은아의 사이에 은근 도움을 줬던 이수현은 그 사실을 절대 김석한에게 들키지 않아야 했다.

“보상인 아티팩트를 선물할 때부터 내 알아봤지……. 세상에 남자는 다 똑같단 말일세! 지금 듣고 있나?”

“네. 드, 듣고 있습니다.”

“남자란 족속은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한텐. 절대 잘 해주지 않는단 말이야! 텐트니 뭐니, 어린 것이 여우마냥 술수를 쓰더니…….”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김석한의 잔소리 퍼레이드. 그걸 듣고 있는 이수현은 귀를 막고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김석한은 호통을 치며 메시지로 사진을 띄웠다.

거기엔 드레스를 아기새처럼 파닥거리는 김은아와 신유성이 있었다.

“이놈이 결국! 우리 은아를 홀려!? 어딜 감히!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절대 안 돼!”

다시 뒷목을 잡는 김석한.

이수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우리 순수한 은아가 축제에서 이런 여잔지 남잔지도 모를 놈한테 푸욱 빠져가지고……. 머리카락은 치렁치렁한 게. 마치 기생오라비…….”

김은아는 김석한이 공주처럼 금이야 옥이야 키운 손녀딸. 철혈이라 불린 김석한을 손녀 바보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한 일.

김석한은 괜히 이수현에게 엄포를 놓았다.

“하여간 이놈에 관해선 이 비서가 전부 나한테 보고하게! 은아한테 이 여우 같은 놈이 집적거리지 못하게 하고!”

김석한의 호통에 식은땀을 흘린 이수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그게……. 방금, 온 메시지인데. 아가씨가 신유성 학생을 연회에 초대하시겠다고…….”

깔끔한 마무리 펀치.

김석한은 이수현의 충격적인 이야기에 뒷목을 잡고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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