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저벅저벅.
주변에 퍼지는 발걸음 소리.
안경을 만지며 걷고 있는 건 대항전의 준비를 맡게 된 백명호였다.
“……이곳입니다.”
주위는 어둠과 정적만이 가득한 공간. 하지만 백명호의 신호와 함께 방안의 불이 모두 켜지자. 분위기는 반전됐다. 거대한 유리 진열장에 보관된 여러 가지 아티팩트.
강유찬은 흐뭇한 표정으로 진열장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좋은 아티팩트들이군. 아주 훌륭해.”
이번 대항전의 보상을 준비한 건 한국. 백명호는 강유찬을 향해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 쪽 지원이 컸습니다! 그리고 몇몇 길드가 스폰서가 되어 아티팩트를 기증을 해준 덕분에 좋은 물건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아, 껄껄! 그건 나도 들었지. 나중에 따로 내게 명단을 보내주도록 해. 내가 인사라도 전해야겠어.”
“네! 알겠습니다!”
백명호가 꾸벅 인사를 하자.
강유찬은 진열장의 아티팩트 중 하나를 가리켰다.
“근데 첫 경기의 아티팩트가 바로 저 별의 산호석이라고 했나?”
“맞습니다. 우승자의 요청에 따라 팔찌나 목걸이로 재가공해서 증정할 예정입니다.”
별의 산호.
원소 계열 특수 능력을 증폭시키는 신비의 광물. 강유찬은 차분한 눈으로 고민에 빠졌다.
“……일본 팀과 한국팀. 두 파티장 모두 별의 산호석과는 거리가 멀지 않나?”
“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번 아티팩트는 공정성을 위해 경기 순서에 따라 랜덤으로…….”
백명호는 협회장인 강유찬의 말에 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강유찬은 뒷짐을 지고 됐다며 웃었다.
“껄껄, 탓하는 게 아니니. 너무 그러지 말게. 실은 나도 나름의 제안을 준비 해두었거든.”
강유찬은 포켓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함에 담긴 건, 주황빛이 아름다운 구슬.
“……이건?”
“천년옥일세. 내가 유원학과 함께 탑을 공략했을 때…… 얻었던 물건이지. 껄껄! 세간에 공개조차 하지 않은 물건이야.”
강유찬의 이야기에 백명호는 꿀꺽 침을 삼켰다. 눈앞에 보이는 구슬은 무려 권왕 유원학과 협회장 강유찬이 탑의 공략으로 얻은 아티팩트.
백명호는 차마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타, 탑의 아티팩트라고 하시면 대체 몇 층의?”
“글쎄 한 50층 정도였나? 자 일단 받게.”
강유찬이 담담하게 천년옥을 건네주자. 백명호는 손이 벌벌 떨렸다.
“50층의 아티팩트…….”
천년옥은 지금까지 수많은 아티팩트를 관리해본 백명호도 본 적이 없는 보물이었다.
지금까지 상품으로 걸린 아티팩트 중 단연 최고.
“아, 알겠습니다! 첫 번째 경기의 상품으론 별의 산호석 대신 이 물건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백명호의 우렁찬 대답에 강유찬은 껄껄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백명호는 그 뒷모습을 보며 이전에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협회장님께서 이번에 참여한 신유성 학생의 뒤를 봐준다더니……. 소문이 사실이었군.’
그래도 피해를 입거나, 불공정한 조건은 아니었다. 50층의 아티팩트인 천년옥이라면 별의 산호석보다 훨씬 귀한 물건. 아티팩트를 제공하는 입장에선 나쁠 게 없었다.
스윽. 탁.
백명호는 천년옥이 담긴 함을 진열장에 넣으며 생각했다.
‘……첫 경기면 한국과 일본의 대진. 어느 쪽이 천년옥을 얻게 될지. 궁금한걸…….’
* * *
산책로의 벤치.
방송을 끈 에이미는 추욱- 녹초가 되어 벤치에 뻗어버렸다. 길어진 방송과 스미레가 만든 공포의 집 체험이 겹치며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상태.
“으으……. 내일 완전 몸살 날 것 같애애……. 흐흐, 그래도 구독자 엄청 늘었다.”
그간의 고생이 먹혔는지 늘어난 팬들의 숫자에 에이미는 절로 마음이 뿌듯해졌다.
“흐흐, 대항전까지 가면 얼마나 늘어나려나?”
기분이 좋아졌는지 헤실헤실 웃고 있는 에이미. 그런 에이미를 내려다보며 누군가 싱긋 웃었다.
“안녕?”
어디선가 들어본 여성의 목소리에 에이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 네! 안녕하세요!”
익숙한 얼굴의 정체는 이제 학생회의 전권을 맡게 된 신하윤. 에이미는 자신과 신하윤의 접점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후훗, 미안 너무 갑작스럽지?”
그렇게 말한 신하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옆자리에 앉자 에이미는 괜히 긴장을 했다.
“긴장할 거 없어. ……그냥 익숙한 얼굴이라 말을 걸어본 거야. 너, 방송하잖아? 그렇지?”
신하윤의 말에 에이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흐으응~ 내 팬이었구나~?’
어쩐지 뿌듯한 표정으로 신하윤을 보는 에이미. 신하윤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발전에서 중계를 맡았었잖아. 그렇지?”
“아, 네! 맞아요! 엄청 최근 방송인데! 그것도 보셨나보네요?”
에이미는 신하윤이 자신의 팬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유성의 파티원이고?”
“후후, 맞죠!”
에이미는 신하윤을 보며 능글맞게 눈썹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헤~ 내가 얼마나 좋으면. 조사까지 한 거야? 그래도 학생회장이 그런 짓을 하면 직권남용인데~’
에이미는 신하윤의 관심이 기분이 나쁘진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신하윤이 관심을 가진 대상은 에이미가 아니었다.
“그렇구나. 어때 파티 생활은?”
“아, 파티요? 저, 흐흐, 아무래도 방송일 때문에 꽤 바빠서요……. 많이 참여는 못 하고 있어요.”
에이미가 볼을 긁적이자. 신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좋은 파티장인 거 같던데?”
“헤헤, 그럼요! 좋죠! 저뿐만이 아니에요! 모두 파티장님을 따르는 걸요?”
에이미는 즐거운 얼굴로 신유성의 칭찬을 마구 퍼부었다.
“그렇구나. ……정말이지, 좋은 파티장이네? 그럼, 파티장에게도 너희가 소중한 거 같니?”
부드러운 신하윤의 질문에 에이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분명!”
눈까지 빛내는 순진한 에이미.
신유성이 파티원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에 에이미는 하나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신하윤은 순수해 보이는 에이미를 보며 싱긋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즐거웠어. 모쪼록 계속 파티장과 잘 지내길 바랄게.”
신하윤이 웃으며 일어나자. 에이미는 손을 흔들었다.
‘……학생회장님은 엄청 좋은 사람인 거 같은 느낌이야. 난 은근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하니까!’
머릿속에 꽃밭이 펼쳐진 에이미와 다르게 고개를 돌린 신하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 * *
강당 중 하나를 중세풍으로 꾸민 무도회장. 신유성과 김은아는 고풍스러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흐흐…….”
주변의 사교파티 같은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은아는 여전히 범고래 인형을 끌어안고 있었다.
“유성아. 이 범고래 인형 진짜 잘 만들지 않았냐? 이거 입도 벌어져.”
어마어마한 재벌인 탓에 천만 원 정도는 쉽게 생각하는 김은아가 인형을 소중히 하는 모습은 진귀한 광경이었다.
“입에 팔도 들어가겠는데?”
‘……엄청 마음에 들었나 보네.’
신유성은 별거 아닌 선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즐거워하는 김은아의 모습에 괜히 뿌듯해졌다.
스윽.
김은아는 범고래 인형을 양손으로 들더니 신유성의 팔에 가져다 댔다.
그 상태로 범고래 인형의 턱을 위아래로 움직여주는 김은아.
신유성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은아야. 뭐해?”
“오르카한테 밥 주는 중.”
말을 하는 김은아의 표정은 소악마처럼 장난스러웠다.
“그건 ……내 팔인데.”
“흐흐, 원래 범고래는 육식이야.”
신유성이 떨떠름하게 웃자. 김은아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처음 보였던 까칠함과는 거리가 먼 모습.
‘원래는 엄청 장난기가 많구나?’
평소의 까칠한 모습은 어쩌면 단단한 껍질. 오히려 지금의 모습이 김은아 본연의 성격과 비슷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껍질 속 모습을 보여준다는 건 김은아가 신유성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증거였다.
사아악.
포켓에 오르카를 넣은 김은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했다. 드레스는 물론 무도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김은아의 스트레칭.
“야. 유성아.”
김은아는 앉아 있는 신유성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 생각이 바뀌었어.”
스윽.
손을 잡자마자. 신유성은 김은아의 리드로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이밍 좋게 바뀌는 무도회의 곡. 신유성은 김은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무슨 생각?”
김은아는 병원에 있는 동안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보았다. 그리고 결국 인정했다.
“대항전이 끝나도. 파티에 남을래.”
김은아는 파티에서 겪은 경험이 즐거웠다. 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간간히 신유성과 파티원들이 떠올랐다.
[아,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세균이 들어가기 전에 소독을 하는 게 중요해요!]
자신의 상처를 위해 처음으로 화를 내준 스미레.
[네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자신의 감추고 싶었던 마음을 이해해준 신유성.
‘좀 시끄럽긴 하지만……. 에이미 그 녀석도 있고.’
지금의 기억들은 김은아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을 열지 않으려 애썼지만. 결국에는 실패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말인데, 나, 쭉 있어도 되냐?”
김은아가 자신을 바라보며 맞닿은 손을 흔들자. 신유성은 고개를 끄덕 움직였다.
“……얼마든지.”
접점이 없을 것처럼 보였던 신유성과 김은아. 하지만 둘은 동료라는 이름으로 점점 단단하게 결속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