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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화 (92/434)

제92화

잔디가 깔린 공원.

돗자리를 챙겨온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장소. 1학년 S반의 이벤트는 연극이었다.

가족들 단위로 볼 수 있는 소소한 공연. 거기에 음료와 음식을 파는 걸로 이벤트의 매출을 올리는 식. 스미레는 기대에 찬 얼굴로 신유성을 바라보았다.

“하, 학교에서 연극을 볼 수 있다니! 정말 기대 되요!”

신유성은 연극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 신유성의 관심은 오히려 연극보단 스미레가 가져온 도시락 쪽이었다.

“……튀김냄새. 아, 카라아게구나?”

“맞아요. 흐흐…… 이번에는 특제 소스랑 샌드위치도 준비해봤어요! 아, 아무래도 아침에는 가볍게 드셨으니까요.”

신유성과 함께 먹었던 아침 식사가 떠올랐는지, 귀가 붉어지는 스미레. 슬슬 연극이 시작하려고 하자. S반의 이채현이 다가왔다.

“자, 주문은? 뭘 챙겨오든 음료수 정도는 주문하는 게 매너야 알지?”

“아, 저 그럼, 레몬 에이드랑 바나나셰이크를…….”

“레몬 에이드 하나. 바나나셰이크 하나. 맞지?”

이채현이 주문을 확인하자. 스미레는 조심스럽게 조금 더 주문을 추가했다.

“아……. 저, 죄송한데. 밀크셰이크랑 딸기셰이크도 추가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 그래~ 마음껏 해. 많이 시키면 우리야 좋지. 근데 추가로 사람들이 오는 거야? 이거 양 많은데.”

스미레는 그냥 멋쩍게 웃었다.

스미레가 아는 신유성의 식욕이라면 이것도 모자랄 수도 있는 상황.

야외스피커의 커다란 음량과 함께 연극의 내레이션이 시작했다.

- 인류의 재앙인 아웃 브레이크. 지구는 다른 차원과 결합되며…….

헌터 아카데미인 가온의 연극 주제는 당연히 헌터들에 관한 이야기. 내레이터의 이야기는 이제 동화로도 만들어지는 유명한 스토리였다.

- 결국 우리들의 세상에는 나쁜 마녀들이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 얼어붙은 심장을 가진 겨울의 마녀 루이스. 역병을 퍼트린 사악의 마녀. 라플라스.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연극.

이야기에 심취한 스미레를 보며 신유성은 몽환의 성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라플라스. 스미레가 얻은 편린의 주인이군.’

신유성은 믿을 수 있는 협회장 강유찬에게만 스미레의 편린에 대해서 보고했다.

스미레가 얻은 건 7급 보스 중에서도 강력한 사악의 마녀.

세간에 이야기가 퍼지면 그 잠재력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생길지도 몰랐다.

‘물론 스미레는 그 잠재력에 큰 생각이 없는 모양이지만…….’

스미레가 가지게 된 힘은 확실히 위험했다.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 누군가를 구할 수도 있었고, 잘못 다루게 되어 폭주라도 하게 된다면 엄청난 피해를 초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미레가 파티에 엄청난 전력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스미레를 이끌어주는 건 파티장인 내 몫이겠지.’

신유성은 카라아게를 집어먹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스미레를 바라보았다. 결국 열띤 시선을 느낀 스미레.

‘유, 유성 씨가 나를 엄청나게 뚫어져라…….’

스미레는 차마 이유조차 묻지도 못한 채,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 사악하고 사악한 마녀 라플라스는 헌터들의 능력에 쓰러지며 크게 소리쳤습니다.

다시 흘러나오는 내레이션.

연극은 어느새 종막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S반의 여학생은 소리를 치며 라플라스를 연기했다.

“설렁 눈보라가 걷히고, 역병이 사라져도 우리 마녀는 죽지 않는다!”

스미레가 본 차분한 라플라스와는 많이 달랐지만. 스미레는 연극을 재밌게 본 모양이었다.

“라플라스 씨……. 엄청 미움 받고 있네요.”

“역병을 퍼트리는 재앙을 좋아할 사람은 없으니까.”

신유성의 말에 스미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스미레의 가슴에는 묘한 생각이 마음에 남았다.

사악의 마녀. 존재만으로 인간들에게 역병을 퍼트린 라플라스.

특성의 폭주로 옆에 있던 친구들을 상처 입게 만든 자신.

‘동화율이 높았던 건. 어쩌면…….’

스미레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신유성은 카라아게를 집으며 말했다.

“달라.”

“에, 네!?”

화들짝 놀란 스미레. 신유성은 담담하게 말했다.

“……스미레 너라면 라플라스의 힘을 타인에게 상처 주는 게 아니라, 지키는 일에 쓸 수 있을 거야.”

정확하게 스미레의 마음을 읽어버린 신유성의 위로. 눈시울이 붉어지려하자 스미레는 손등으로 눈가를 스윽- 닦더니, 대신 신유성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부, 분명 그렇겠죠?”

*     *      *

오후 5시 50분.

호화로운 A반의 카페.

이벤트에 사용된 의자와 각종 가구들은 학교 축제라곤 믿기지 않는 명품들이었다.

“이 의자 하나가 몇백만 원이래.”

“그럼 오늘 번 카페 매출의 몇 배인 거냐?”

“……글쎄. 같은 학생인데 이런 의자를 소품으로 쓰라고 사주다니.”

“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 거야?”

어마어마한 김은아의 스케일에 웅성거리는 학생들. 대신 김은아는 여왕처럼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벤트를 준비하는 건 A반의 몫.

하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눈을 감고 커피를 홀짝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김은아.

저벅저벅.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자. 김은아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왔네?”

“곧 6시니까.”

김은아의 맞은편에 앉는 신유성.

이제 김은아는 발소리로 신유성을 구분할 수 있었다. 김은아는 품위 있게 새끼손가락을 올린 채로 잔 안의 커피를 음미했다. 커피의 콩은 최고급 자메이칸 블루마운틴.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김은아가 A반에 지원해준 비품이었다.

“우리가 어디 갈 건지 알아?”

여유로운 자세로 묻는 김은아. 신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도회장이라는 건 알아.”

“근데 밤이 되려면 한참 남았으니까. 그때까지 같이 이야기라도 하는 건 어때?”

사실 오늘의 김은아는 신유성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신유성이라는 친구. 그래도 내가 한번은 만나보고 싶은데…….]

처음 이야기가 나온 건 병원에 누워있던 김준혁의 입이었다.

[오빠가 왜?]

[음,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잖아?]

[뭐…… 그렇긴 한데.]

[그리고 은아 네 파티장이잖아. 같이 식사라도 한번 하는 게 어떨까?]

듣고 보니 설득되는 김준혁의 말.

하지만 막상 이야기를 꺼내려니 김은아는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갑자기 집으로 부르면. 오해 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신유성은 심각해 보이는 김은아의 표정에 먼저 질문을 던졌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구나?”

생각을 정리하던 김은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김은아는 둘러말하는 일엔 재주가 없었다.

“……오, 오빠가 고맙대.”

검지로 빙글빙글 테이블을 만지는 김은아.

“그리고 나도 너한테 고맙고…….”

김은아는 신유성과 시선을 맞추려다가 슬쩍 눈을 잔으로 돌렸다. 역시 김은아는 진지한 감사 같은 간질간질한 이야기는 참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이야.”

담담하게 대답하는 신유성.

언제 시켰는지 신유성은 카라멜 마끼아또를 마시고 있었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상상도 못할 메뉴. 하지만 김은아와 함께 왔던 경험 덕분에 신유성은 카라멜 마끼아또가 얼마나 맛있는지 알 수 있었다. 혼자서도 카페에서 주문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린 파티니까.”

신유성이 카라멜 마끼아또를 흔들며 웃자. 김은아는 고맙다는 말 대신 피식하고 웃었다.

“……뭐,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한결이 마음이 편안해진 김은아는 이제 신유성을 정면으로 쳐다봤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신성그룹에서 여는 연회에 너도 와.”

“연회?”

무신산에 있던 신유성은 한 번도 연회에 가본 적이 없었다. 신성그룹의 연회는 정계는 물론 각 분야의 큰손들이 모이는 비밀스러운 파티. 그런데도 김은아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그냥, 별 거 없어. 맛있는 거 먹고. 인사하고. 시간 좀 보내는 게 전부야.”

어차피 연회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신성그룹의 회장인 김석한. 그의 손녀딸인 김은아는 늘 인기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김은아는 신성그룹의 연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배경을 보고 다가오는 사람들은 진절머리가 났다.

‘근데. 이 녀석은 다르니까…….’

신유성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김은아. 신유성은 티라미수를 학생에게 넘겨 받으며 말했다.

“난 그런 자리는 처음인데. 괜찮겠어?”

“우리 할아버지가 제일 짱인데. 안 괜찮을 건 뭐야? 그리고…….”

김은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툭- 하고 포켓을 건드렸다.

사아악!

푸른색의 입자가 김은아를 감싸며 교복은 어느새 드레스로 바뀌었다.

김은아는 신유성에게 손을 뻗으며 환하게 웃었다.

“내가 가르쳐줄 거니까 걱정 마.”

신유성의 원래 성격이라면 평생해보지 못했을 수도 있는 경험. 하지만 신유성에게 김은아가 있었다.

“자, 빨리 가자!”

김은아와 신유성이 향할 장소는 다름 아닌 연회의 꽃. 무도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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