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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88/434)

제88화

그 잠깐의 사이에 김은아와 약속이 생겨버린 신유성.

“아, 여, 역시 그렇죠!? 파티장님은 당연히 약속이…… 있으시겠죠?”

말로는 최대한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스미레의 얼굴은 실망한 티가 역력했다. 하루종일 기회만 엿보던 스미레는 정작 기회를 놓친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

‘더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난 바보야…….’

신유성은 스미레의 반응에 괜히 기분이 미안해졌다.

“미안. 오후 6시 이후로 갑자기 생겼어.”

신유성의 약속시간은 오후 6시.

그 이야기를 들은 스미레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그럼…… 그 전은 괜찮으신 건가요?”

“그렇지?”

신유성의 대답에 스미레는 생각에 빠졌다. 굳이 밤이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엣! 유성 씨! 그럼! 점심을 먹는 12시, 아, 아니지! 오전 9시부터 쭉……. 제가 같이 있어도 괜찮을까요? 아침도! 제가 해드릴게요!”

실망에서 기대로 표정이 변한 스미레. 신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하자.”

흔쾌한 대답에 스미레는 기쁨으로 입술을 우물거렸다.

‘너, 너무 좋아!’

오후가 아니라 아침부터 신유성을 만날 수 있다니, 오히려 스미레의 입장에서 이건 더 좋은 기회였다.

*     *      *

헌터명가. 신오가문.

이곳은 그들이 가진 십수 개의 대저택 중 하나였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5개의 사자상이 입에서 물을 뿜어내는 사치스러운 분수대.

리조트를 방불케 하는 오션뷰.

일류 정원사가 직접 조성한 정원.

고급 투톤 인공 잔디가 깔린 거대한 부지. 이건 각종 특급 의뢰의 독점은 물론이고, 매스컴과도 결탁을 한 힘이었다. 신성그룹의 회장과도 서로를 도우며 모종의 커미션이 있는 관계. 한국에서 그들이 누리는 권력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을 구축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실력지상주의와 엘리트지상주의. 신오가문이 믿는 건 오직 힘이었고, 그들의 목표도 그 힘을 통해 현재의 실력과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지금 일원들을 모이게 한 가문 회의는 그 힘을 유치하기 위한 의례.

“……시작부터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가주님의 안목에 신뢰가 금이 가는 건 사실이군요.”

박병준이 말했다.

그는 잘 훈련된 마나 때문인지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이제 스물 후반으로 보이는 고수였다. 헌터의 급수도 국가에서 손에 꼽힌다는 6급.

신오가문에서도 입지가 상당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가 의심을 표한 대상은 신오가문의 가주. 신강윤.

“……재밌는 이야기군.”

신강윤은 고요하지만 예리한 기운을 시선에 눌러 담은 채, 박병준을 노려보았다.

‘기껏해야 데릴사위로 들어온 놈이. 감히 주인 행세를…….’

하지만 신강윤은 속마음을 입으로 내뱉진 않았다. 신오가문의 가주 자리는 철저하게 실력을 통한 투표제로 운영되는 자리. 마음에 들진 않지만 박병준도 표를 가지고 있었다.

“말해보게. 무엇이 나를 향한 매부의 신뢰에 금이 가도록 만들었지?”

신강윤이 인자한 웃음과 함께 박병준에게 질문을 하자. 옆에 있던 미모의 여성이 부채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후훗, 그건 오라버니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신미향.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동안.

하지만 그녀는 신강윤보다 4살밖에 어리지 않은 여동생이었다.

탁!

신미향은 솜씨 좋게 부채를 접더니 품 안에 넣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신미향은 싱긋 웃었다.

“당연히 둘째. ……유성이의 이야기입니다. 소문은 오라버니도 들으시지 않았습니까?”

신유성의 이름이 언급되자.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신강윤의 얼굴도 살짝 구겨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

신강윤은 다시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들었지. 가온에서 꽤나 활약하고 있다고 하더군.”

신강윤의 이야기에 신미향은 다시 부채를 펼쳐 입을 가렸다.

“흐흣, 꽤나라니……. 정말이지 오라버니도 솔직하시지 못하시군요.”

박병준도 신강윤의 대답이 우스운 모양이었다.

“가주님에겐 헌터계의 모든 소식 들어갈 텐데. 하하! 그런 눈 가리기 식의 평가 절하는…….”

남편인 박병준이 운을 띄우자 신미향도 기세를 올렸다.

“흐흣, 어디 보자…… 제가 기억나는 것만. 잠시 세어 볼까요? 리벨리온의 체포……. 선발전의 대표. 그리고 최근에는 5급 던전까지 공략했다더군요?”

신미향의 이야기가 끝나자. 박병준은 다시 운을 띄웠다.

“그것도 일본에 있는 던전이었지. 원정 공략은 협회에서 밀어주는 학생이라는 증거인데 말이야.”

“그 아이가 신오가문의 출신이라는 게, 매스컴을 타고 세간에 알려지게 되면. 어떨까요? 벌써 반응들이 그려지는군요.”

신미향이 본론을 꺼내자. 신오가문의 일원들은 모두 긴장했다. 6급 이하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회의에서 발언권조차 없었지만. 신미향의 의견에는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권왕은 알아챈 보물을. 신오가문은 알아채지 못했다. 이건 다이아를 쓰레기장에 던져버린 격. 정말이지 창피한 일 아닌가요?”

신미향의 직구에 신강윤은 다시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번에는 포커페이스에 강한 신강윤도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모두의 반응들을 보아하니. 이 이야기에 꽤나 동의하는가 보군?”

스물에 가까운 인원이 모였지만 서로가 눈치를 살피며 이어지는 정적. 신강윤은 피식 웃었다.

“……내 아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야기를 꺼낸 것 하며. 참으로 주도면밀해.”

“오라버니. 저흰 그냥 생각을 말했을 뿐입니다. 아직은 후훗, 염려에 불과할 뿐이죠.”

싱긋 웃는 신미향의 눈이 휘어졌다. 신미향 그녀도 국가급 헌터인 6급의 실력을 가진 고수. 신강윤은 동생이지만 허투루 대할 수 없었다.

“그래. 모두 듣게. 만약 그 염려가 현실이 되면 어쩔 생각이지?”

그런데도 신강윤은 신미향을 노려보았다. 순간 신강윤이 뿜어낸 마나가 힘으로 신미향을 짓눌렀다.

“윽…….”

숨을 쉬기 힘든 압박감.

신강윤은 모여있는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난 신오가문에서 유일하게 7급을 달성한 헌터다. 힘을 추구하는 신오가문에서 ……누가 나보다 가주의 자리에 어울리지?”

여러 안건을 꺼내기 전부터 이미 살벌해진 회의장의 분위기.

그때 신오가문에서도 유독 돋보이는 미형의 청년이 입을 열었다.

“세 분 모두.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로, 신오가문에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유월. 27세의 나이로 가문에서 최연소 6급 헌터가 된 사나이. 그는 신유성의 어머니인 유민서를 대신해 회의에 참가했다. 즉 지금 회의에선 가주 다음의 권력자. 유월의 이야기에 신미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작은 도련님 말이 맞습니다. 그저 저희는 모두의 염려를 전해드린 것뿐. ……그러니 오라버니도 너무 노여워 마세요?”

꽈악!

주먹을 쥐는 신강윤.

하지만 그는 안으로 분노를 삭일 뿐이었다. 신미향과 박병준의 행동은 예상하고 있었다. 둘은 언제나 가주의 자리를 탐내고 있었으니까. 신유성에 관한 이야기도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그래도 생각하지 못한 결과인건 사실이다.’

5살에 측정 받은 F급 특성. 신강윤은 분명 신유성이 헌터로서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결과는 뭘까.

신유성은 누구보다 당당하게 실력을 증명해내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가주로서 신유성과 자리를 마련해보려는 신강윤. 그러기 위해선 가온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 신하윤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 아이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겠군.’

*     *      *

깔끔하게 잘 정리된 드레스 룸.

하지만 옷걸이에 진열된 백여 가지의 옷들은 모두 입이 벌어지는 가격의 명품이었다. 비록 평소의 김은아라면 거추장스럽다며 티셔츠에 자켓을 입겠지만 내일은 아니었다.

“……이, 이 드레스는 어때?”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나온 김은아가 부끄러운 얼굴로 묻자. 이수현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흐음, 예쁘긴 한데 아가씨한테 레드컬러는 좀…….”

“아, 좀 안 어울려?”

김은아의 질문에 이수현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일단 아가씨에겐 파란색 같은? 청순한 색이 어울릴 거 같아요. 퍼플이나 레드처럼 도발적이고 매혹적인 색은. 좀 더 어른이 되면…….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어? 응, 알 거 같아.”

김은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김은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오프숄더 드레스는 끈 처리가 중요하다고.”

“어, 으응. 그, 그랬지?”

“이런 건 너무 서투시다니까요. 이리 가까이 와보세요.”

뒤로 다가온 이수현은 다시 붉은색 어깨끈의 위치를 만져주었다. 그 다음 이수현의 손은 김은아의 허리로 향했다.

“야, 뭐해! 간지럽게!”

“예전보다 좀 살이 잡히시네요? 이러면 밑이 풍성한 A라인 드레스도 고려해봐야 하는데…….”

이수현은 심각한 얼굴로 김은아의 배를 만지작거렸다. 배를 만져지고 있다는 묘한 수치심과 살이 쪘다는 창피함에 점점 얼굴이 빨개지는 김은아.

“자, 자꾸 병원에 있으니까. 못 움직여서 그래!”

“알죠. 제가 평소에 아가씨 스케줄 관리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요. 근데…… 좀 잡히는 거 같긴 해요.”

말캉.

김은아의 하얀 배를 계속 만져대는 이수현. 결국 김은아의 인내심은 터지고 말았다.

“아 그래! 좀 쪘다! 그만 만져! 내 배가 찰흙이야? 뭘 그렇게! 주물럭거려!?”

겨우 운동을 일주일 쉬었다고 이런 수모를 당하니. 김은아는 억울했다.

“다시 저기 앉아있어. 파란색 드레스로 입고 나올 테니까!”

그래도 이제 김은아는 진심으로 이수현에게 화를 내진 않았다. 그걸 알고 있는 이수현에겐 김은아의 행동은 그저 투정으로 보였다.

‘……파티에 들어가고 하는 행동이, 점점 귀여워진단 말이지. 아니면 김준혁이 깨어나서 그런가?‘

여동생이 생긴 기분으로 흐뭇하게 바라보는 이수현.

부스럭 부스럭.

옷을 갈아입는 소리와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김은아가 걸어나왔다.

시원해 보이는 파란색과 검은색 포인트가 인상적인 세련된 드레스.

“역시…….”

이수현은 뿌듯해하며 김은아에게 엄지를 올렸다.

“……완벽하십니다.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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