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저벅저벅.
사쿠라가 불렀던 장소에 도착한 세이지. 하지만 부상을 당했다던 사쿠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쿠라? 어디야?”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확인하는 세이지.
쐐애액!!
그때 어딘가에서 세이지의 머리를 노리고 화살이 날아왔다.
“읏!!”
파앗!
세이지는 재빠르게 고개를 숙여 화살을 피했다. 아찔하게 머리 위를 스쳐지나가는 화살. 만약 피하지 못했다면 결과는 뻔했다.
세이지가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다. 거기에 서있는 건 무표정한 얼굴의 사쿠라였다.
“너……. 사, 사쿠라?”
상상하지도 못한 전개에 세이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사쿠라는 개의치 않고 다시 화살을 시위에 장전했다.
파아앙!!
바람의 힘을 담아 엄청난 속도로 쏘아진 화살. 사쿠라는 화살을 보며 작게 읊조렸다.
“흩어져라.”
하나에 불과했던 화살은 초록빛으로 변해 수십 갈래로 나뉘었다. 단순히 쳐내는 건 불가능한 숫자. 그러나 상대는 선발전의 우승자인 세이지였다.
“사쿠라! 대체 왜!?”
의문을 표한 세이지가 발로 바닥을 내려치자. 그림자로 만들어진 벽이 땅에서 솟았다.
구구궁!
그림자 벽에 꽂히는 무수한 바람 화살. 사쿠라는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한 가지 말을 되풀이했다.
“침입자는…… 죽인다. 주인님을 위해서 널…… 죽여야 해. 어떻게든 내 손으로…….”
사쿠라가 손에 마나를 장전했다.
화아악!!
그와 동시에 주위에 일어나는 돌풍. 사쿠라의 벚꽃빛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흩날리고, 교복이 힘차게 펄럭였다.
“Zephyros(제피로스).”
사쿠라의 읊조림에 세이지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분명…… 조종당하고 있어! 최면? 아니면 환각인가!?’
[제피로스]는 사쿠라가 가진 모든 스킬 중 가장 높은 살상력을 가진 스킬. 사쿠라는 늘 비장의 한수라며 아껴두었다. 그래서 목숨이 위험한 정도의 위기가 아니라면 사쿠라는 [제피로스]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사쿠라는 그런 기술을 세이지에게 사용하고 있었다.
화아악! 쐐애애액!!
사쿠라를 중심으로 일어난 살인적인 돌풍은 마치 믹서기처럼 주위의 모든 물체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파공음.
세이지는 자신의 그림자로 몸을 감쌌다.
‘나마저 쓰러지면…….’
세이지는 주먹을 꽉 쥐었다. 파티원인 사쿠라는 조종당하고 있다. 자신마저 쓰러진다면 공략의 기회는 한없이 멀어진다. 최악의 경우는 세이지와 사쿠라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었다.
[Only!No.1!:도와줘]
세이지는 포켓으로 다급하게 메시지를 남겼다. 도와달라는 짧은 한마디. 바깥에서 몰아쳐오는 [제피로스]의 힘에 그 이상의 메시지는 남길 수 없었다.
쌔애애액!!
사쿠라의 바람에 점점 찢어져가는 세이지의 그림자.
‘이, 이대로는…….’
세이지는 입술까지 질근 깨물며 버텨냈다. 갑자기 엄청난 마나를 끌어 쓴 탓에 몸이 반발을 일으켰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화아악!
점점 멎어가는 사쿠라의 돌풍.
세이지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그림자의 안에서 걸어 나왔다.
“……정말 위험했다고. 사쿠라.”
숨을 고르는 세이지의 말에 사쿠라는 대답대신 활을 겨눴다.
파앙!
사쿠라의 화살은 동체시력으론 쫓아가지도 못할만큼 빠른 속력을 자랑했다. 그건 모두 화살에 깃들게 한 바람의 힘 덕분. 하지만 세이지의 그림자는 그런 화살을 잡아냈다.
“잠깐 쉬고 있어줘.”
그렇게 말한 세이지가 손을 뻗자. 바닥에서 치솟은 그림자가 사쿠라의 팔다리를 속박했다.
“으윽! 크으으! 이거 놔!”
이까지 드러내며 거칠게 반항하는 사쿠라. 역시 평소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역시 서큐버스의 농간인가?’
세이지는 공격을 당한 상황에서도 파티원인 사쿠라를 걱정했다.
‘어떻게 해야. 사쿠라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지?’
사쿠라는 사나운 들개처럼 이를 드러내고 그림자를 물어뜯었다. 사쿠라의 의미 없는 발악에 세이지는 죄책감이 들었다.
‘역시 아직 5급 던전은……. 무리였나?’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서큐버스를 처치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 세이지는 열혈이라고 불리는 성격답게 다시 의지를 불태웠다.
‘그래도 일단 한국 팀만 도착하면! 분명 해결책이 나올 거야’
하지만 상대는 지능을 가진 5급 보스. 세이지의 작전에 가만히 기다리지 않았다.
“……묶어둔다고? 후훗, 안일하긴.”
부우웅-!
뒤에서 나타난 서큐버스는 세이지에게 낫을 내려쳤다. 사쿠라를 리타이어 시켰다면 그림자를 회수할 수 있었지만. 세이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안일한 선택이 결국 승패를 결정지었다.
촤아아악!
등에서 분수처럼 치솟는 피.
“큭-!”
세이지는 뒤늦게 뒤로 물러났다.
속박했던 사쿠라까지 풀려나며 상황은 누가 봐도 절망적이었다.
“……역시 네 동료를 다치게 하는 건 못하겠니?”
서큐버스는 피를 흘리는 세이지를 보며 즐겁게 웃었다.
“어리석구나. 후후훗! 걱정하지 마. 너도 곧 저 아이처럼 귀여운 인형으로…….”
서큐버스가 제 자리에서 낫을 한번 회전시키자. 채찍으로 변하는 낫. 서큐버스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더니 세이지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변할 테니까!
휘리릭!
채찍이 노린 건 세이지의 손목.
서큐버스는 세이지에게 채찍을 휘감아 행동을 제약할 생각이었다. 성공만한다면 분명 사쿠라의 화살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꽈악!
“크윽!”
손목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
세이지는 서큐버스의 채찍에 손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문제는 그다음. 서큐버스는 채찍으로 마나 드레인을 사용했다.
세이지의 몸에서 채찍을 타고 서큐버스에게 흘러들어가는 마나. 서큐버스는 입술을 잘근 물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아, 하아아……. 느껴져. 네 마나……. 흐흣, 알겠다. 알겠어. 정말이지 고결하고……. 올곧은……. 그런 유형의 아이구나?”
서큐버스의 허리에서 날개 한 쌍이 자라났다. 그녀의 컨디션이 최고조라는 증거. 반면 마나를 빨린 세이지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사쿠라!”
세이지가 불러도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는 사쿠라. 서큐버스는 사쿠라와 세이지를 느릿한 시선으로 번갈아 훑었다.
“그 아이를 조종하는 건 너무 쉬웠어. 겉으로 강한 척 구는 애들은 실은 속마음은 누구보다 연약하거든. 잠깐만 흔들어도……. 후훗, 알지?”
하지만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세이지는 눈을 빛냈다.
“……내 파티원들은 누구도 약하지 않아.”
그렇게 중얼거린 세이지는 번뜩이는 눈으로 서큐버스를 노려보며 힘차게 소리쳤다.
“설령 흔들리고, 쓰러지더라도. 우린 끝까지 다시 일어난다! 그게 우리가 가진 헌터로서의 마음가짐이다!”
서큐버스는 그저 차갑게 조소했다.
“걱정하지 마. 그렇게 열심히 짖지 않아도. 네 고결함은 내가 느긋하게…… 전부 더럽혀줄 테니까.”
서큐버스가 검지로 신호를 보내자, 사쿠라는 시위에 화살을 장전했다. 팔을 묶이고, 마나를 빼앗긴 상황. 아무리 세이지라도 이젠 피할 수 없었다.
파앙!!
바람의 힘을 싣고 쏟아진 화살이 세이지의 코앞까지 도달 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러나 입구에서 쏘아진 검은 섬광이 화살을 낚아챘다.
“넌!”
서큐버스는 고운 미간을 좁히며 상대를 노려봤다. 시선의 끝에 서 있는 건 흑룡포를 입고 검은색 마나를 뿜어내는 신유성.
세이지는 신유성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유성! 지금 사쿠라는 조종당하고 있어!”
“상관없어.”
츠츠츳!
신유성은 몸에서 검은 기운을 이리저리 뿜어내더니 일순 사라졌다.
탓!
순식간에 서큐버스의 뒤에서 나타난 신유성.
콰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서큐버스는 뒤로 나가 떨어졌다.
“꺄아악! 나, 나의 심복아! 빨리! 빨리! 활을 쏴라!”
벽에 처박힌 채 시끄럽게 소리치는 서큐버스. 사쿠라가 멍한 눈으로 시위를 신유성에게 조준하려고 하자. 세이지는 사쿠라를 막아섰다.
“멈춰! 사쿠라!”
세이지가 사쿠라의 오른손을 붙잡자. 사쿠라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놔!!”
세이지는 여전히 사쿠라의 오른손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사쿠라는 서큐버스의 명령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이거 놔아아아!!”
미친 듯 소리를 지르더니 왼손으로 화살을 잡아채 휘두르는 사쿠라. 세이지는 이번에도 맨손으로 화살을 잡아챘다.
주르르륵.
손에선 피가 흐르고, 몸에는 마나가 부족해 정신이 흐릿했지만. 세이지는 단호했다.
“아니, 사쿠라! 네가 어떤 짓을 해도 난 널 절대 놓지 않아!”
세이지의 이야기에 사쿠라는 잠시 행동을 멈췄다. 세이지는 그런 사쿠라를 보며 여유롭게 웃었다.
“네가 나를 잊어버려도. 공격을 해도. 배신을 해도. 그 어떤 상황에도 너와 잇신은 내 파티원이야.”
사쿠라는 세이지의 이야기에 계속 움직임을 멈칫거렸다. 어쩌면 사쿠라는 계속 서큐버스의 세뇌와 싸우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거, 이거 놔……. 나는…….”
“아니, 난 이미 정했어. 난 너희와 함께 일본을 넘어서 세계의 정상이 될 거야.”
세이지는 바보처럼 웃더니 사쿠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이 손은 놓지 않을 거야.”
세이지의 이야기에 움직임을 멈춘 사쿠라. 신유성은 그 사이에 서큐버스를 완전히 끝내려고 했다.
츠츠츳!
“……이걸로 끝이다.”
신유성의 몸에서 요동친 검은색 기운이 손에 모여들자, 신유성은 간결한 동작으로 손을 뻗었다.
투신류 흑룡암쇄장(黑龍巖碎掌)
흑룡의 기운이 주변의 모든 것을 삼키며 생긴 잠깐의 정적.
콰아아앙!!
곧이어 터져 나온 폭음은 몽환의 성을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