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저벅. 저벅.
수련을 위한 던전 공략.
쵸텐에서 나온 잇신은 혼자서 길게 이어진 산맥을 무작정 걸었다.
“크르르…….”
“컹컹! 크르르!”
냄새를 맡고 몰려온 곰보다 거대한 크기의 들개.
파앗!
들개들이 잇신을 노리고 달려들자. 잇신은 칼집에서 손을 올렸다.
“크렁!”
콰악!
들개의 이빨에 잇신의 팔이 물렸다. 하지만 그건 실체가 아니었다.
화아악!
잔상으로 흩어지는 잇신의 몸. 거대한 들개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제야 보이는 잇신의 몸.
촤악!
들개들이 반으로 갈라지며 이리저리 피가 튀겼다. 잇신은 차가운 시선으로 쓰러진 들개들을 바라보더니 칼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쯧.”
잇신은 혀를 차더니 가까운 바위에 앉았다. 이상한 기분. 잇신은 오늘따라 수련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하나지마. 이게 다 그 멍청한 여자 때문에…….’
생각해보면 중등부 시절.
스미레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랬다. 조용하고, 소극적인데다 주변에 이용을 당해도 바보처럼 웃고 마는 성격. 스미레를 향한 잇신의 평가는 그저 ‘짜증나는 여자’였다.
그래서일까.
시험 때문에 우연히 파트너로 뽑혔을 때는 화가 솟구칠 정도였다. 중등부 시절의 잇신은 그래서 스미레를 더욱 쌀쌀맞게 대했다.
[……왜 하필 너 같은 게.]
[역시 글렀군. ……너 같이 멍청하고. 답답한 여자는 질색이다.]
하지만 정작 시험에서 실수를 한 건 잇신이었다. 조잡한 트랩을 밟아 옆에서 쏘아진 화살. 다행이 화살은 잇신의 팔뚝을 스쳤었다.
뚝뚝.
팔뚝에서 흐르는 피.
중등부 시절이었지만 잇신은 한 평생을 강한 헌터가 되기 위해 살아왔다. 그러니 피를 보고 놀랄 정도로 미숙하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상처에 호들갑을 떠는 건 스미레였다.
[키, 키리시마 씨! 피, 피가!]
[……이까짓 상처. 상관없어.]
[그, 그건 안 돼요!]
처음 본 스미레의 화난 모습.
스미레는 잇신이 모욕을 하던 때에도 가만히 참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 화내는 순간이 자신의 부상이라니. 어이가 없어진 잇신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좋아. 그래서 어쩔 셈이지? 이정도 상처로 포기라도 할 셈인가?]
[아뇨! 치, 치료할 거예요! 응급키트도 가져왔으니까요!]
스미레는 그 자리에 앉아 잇신에게 응급처치를 해주었다. 흐르는 피를 말끔히 닦아주고, 알코올에 적신 솜으로 꼼꼼히 소독해주었다.
거기다 연고를 바른 거즈를 상처에 대고 지혈을 위해 탄력붕대까지 꼼꼼히 감아주는 스미레.
그렇게 모든 조치를 끝내자.
진지한 표정이 풀리며 스미레는 평소처럼 웃었다.
[끝났어요!]
잇신은 그런 스미레가 바보 같았다. 멍청하다고 모욕까지 했던 자신을 대체 왜 걱정하고, 치료를 하기 위해 화까지 내는 걸까.
잇신은 절대 스미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너. 정말 이상한 녀석이군.]
시험은 그렇게 끝.
반이 다른 잇신과 스미레는 그렇게 접점이 많지도 않았다. 하지만 잇신은 스미레가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왜 학교에 핀 제비꽃을 보며 헤실헤실 웃는 건지.
왜 비가 오는 날은 한참이나 멍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는 건지.
왜 하기 싫은 일도 주변에게 떠넘겨져 바보처럼 이용만 당하는 건지.
잇신은 스미레를 보고 있으면 화가 났다. 답답하고 바보 같았다. 이유는 자신도 모르지만 그래서 잇신은 변덕을 부렸다.
[하나지마. 내 파티에 들어와라.]
[……네가 시험을 볼 땐 머리카락도 빌려주지.]
[학교의 누구도 널 섣불리 건드리지 못할 거다. 그건 나에 대한 도전이니까.]
잇신의 제안에 스미레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미레는 잇신이 자신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왜 잇신이 자신을 초대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승낙을 한 이유는 들어갈 파티가 없었기 때문. 스미레는 도움으로 잇신의 도움으로 조금씩 강해졌다.
‘……하나지마. 그런 나에게 한마디도 없이. 한국으로 도망쳐?’
잇신은 빠득- 이를 갈았다. 쵸텐으로 진학하며 세이지와 사쿠라라는 최고의 파티원을 얻었지만. 잇신은 여전히 화가 났다.
잇신은 그 이유가 당연히 스미레 따위가 자신을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얼핏 떠오르는 신유성의 얼굴.
‘……한국의 신유성.’
마침 한국은 대진표에서 일본팀과 국가대항전의 첫 상대로 배정된 국가. 잇신은 인상을 찡그리며 칼집에 칼을 집어넣었다.
* * *
오키나와 섬의 구니가미 군.
자신의 집 앞에 도착한 스미레는 신유성을 힐끔거렸다.
“여, 역시…… 포탈! 금방 도착 했네요?”
좀 낡긴 했지만 어디에서나 볼법한 평범한 2층짜리 주택. 스미레는 호출 벨을 누르기 전 심호흡을 했다.
“조, 좋아!”
갑자기 다짐을 하며 벨을 누르는 스미레.
딩동.
벨소리가 울려 퍼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의 창문이 열렸다.
“来た!(왔다!)”
“お姉ちゃんだ!(언니다!)”
창문에서 일본어로 스미레를 반기는 동생들. 스미레는 평소와 달리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곧 바로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는 현관문. 집 안에서 나온 여성이 웃으며 손을 흔들자. 스미레는 여성을 향해 해맑은 얼굴로 달렸다.
“엄마-!”
의문의 여성은 스미레의 어머니. 하나지마 스이카.
“후훗. 어서 오렴.”
서로의 손을 붙잡고 시선을 맞추는 스이카와 스미레. 신유성은 마치 둘에게서 따뜻한 온기가 퍼져 나오는 것 같았다.
“신유성 씨…… 맞죠?”
스이카는 신유성을 바라보며 한국어로 말했다. 신유성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하나지마 스이카라고 합니다. 저희 아이가 신세를 지고 있네요. 후훗, 이 아이. 제 어린 시절을 꼭 닮아서~ 숫기가 없거든요. 가끔 전화를 해도 신유성씨의 이야기만 얼마나 해대는 지! 정말~”
스이카의 이어지는 수다에 스미레는 점점 귀가 붉어졌다.
“그, 그만! 그런 이야기는……. 저희! 집에 들어가서 해요!”
스이카는 그런 스미레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후훗, 그럼 신유성 씨 모쪼록…… 우리 아이를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스이카가 입을 가린 채 웃자. 스미레는 부끄러워하며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파, 파티장님은…… 이미 저한테 과분할 정도로 잘 대해주세요…….”
그렇게 말을 하고 슬쩍 신유성을 향해 시선을 흘기는 스미레.
“어머~? 정말?”
스이카는 상냥한 눈으로 마냥 웃고 있지만 어딘가 압도되는 기세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스미레를 어떻게 잘 대해주시는지. 엄마도 참 궁금한 걸? 그럼 그 이야기는 나중에 식탁에서 천천히~ 들어볼까?”
스이카는 식사 준비를 위해 신유성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한 차례 지나간 폭풍. 스미레는 가족들을 소개하는 게 멋쩍은 모양이었다.
“좀, ……북적북적하죠?”
“그래서 좋은 거 같아.”
신유성의 대답은 빈말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신유성은 무신산에서 수련을 하며 사람과 거리를 두고 지냈다. 물론 5살이 되기 전에도 신오가문에선 따뜻한 가족의 모습은 본적이 없었다.
신오가문의 철칙은 오직 경쟁.
부모님과 누나인 신하윤. 그리고 신오가문의 친척들은 모두 스미레의 가정과 분위기가 정반대였다.
언제나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
신오가문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다. 모든 일에서 완벽을 원했다. 가주인 아버지는 늘 소수의 엘리트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말했다.
그때 신유성의 나이는 겨우 4살.
지금 생각하면 상식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반면 여긴…….’
천천히 집으로 들어가는 신유성.
이제 5살이 된 남동생. 스고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お兄ちゃんは、……誰?(형아는 ……누구야?)”
그 모습에 9살이 된 여동생. 스구하는 신유성을 확인하자마자 한국어로 말했다.
“바보! 이쪽은 언니가 데려온 한국인 애인이잖아.”
아직 5살인 스고로가 이해했을지는 모를 일. 대신 이제 12살이 된 다른 남동생, 스이토는 2층 계단에서 현관을 향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えっ!?お姉ちゃんボーイフレンド連れて来た?!(에에!? 누나가 남자친구를 데려와!?)”
갑자기 애인 사이로 의심 받는 상황. 얼굴이 달아오른 스미레는 재빨리 양손을 휘저었다.
“에? 아, 아니야! 유성 씨는 그, 그…… 그냥……. 파티장님이야! 집에 오신 건 어디까지나 파티원으로서…….”
스미레가 말을 더듬자. 스구하는 9살답지 않게 능글맞게 웃었다.
“언니 귀여워~”
“그러네. 우리 누나 귀여워~”
기류에 편승해 같이 한국어로 놀리기 시작하는 스이토. 장녀인 스미레는 나름 무섭게 미간에 힘을 줬다.
“너, 너희! 연상을 놀려먹으면! 혼난다!?”
“우와~ 누나 무서워!”
“언니 무서워~”
히죽거리는 스이토.
킥킥거리는 스구하.
스미레의 겁주기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유성 씨? 이, 이제 그럼……. 제 방을 소개 시켜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스미레는 자신이 지냈던 방으로 데려왔다. 제법 큰 방이지만 검소한 가구. 아주 오랜만에 스미레가 찾아왔음에도 방은 잘 정돈 되어 있었다.
꼼지락.
스미레는 자신의 손을 허벅지 부분에 두고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를 했다.
“고, 공략까지. 짧은 기간이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고 하면 긴 일본 생활. 이건 신유성이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 신유성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나도 잘 부탁해. 스미레.”
인사를 끝내고 서로를 마주본 신유성과 스미레는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