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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75/434)

제75화

벌레를 보는 듯한 경멸의 시선.

잇신은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로 스미레에게 말했다.

“……하나지마 스미레. 넌 정말이지 낯도 두껍군.”

스미레는 이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겁에 질려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런 모습은 더 잇신을 화나게 만들었다.

“……못 보던 사이. 벙어리가 된 건가? 입이 있으면 변명이라도 하지 그래?”

“저, 저는……. 전…….”

스미레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더욱 미간을 찡그리는 잇신.

툭.

잇신이 왼손의 검지로 스미레의 이마를 찔렀다.

“……그래. 할 수 있는 말이 없겠지. 파티원을 배신하고. 한국으로 도망친 너 같은 건 말이다.”

잇신을 지켜보던 사쿠라는 질린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풉. 또 저러네. 고등부가 됐는데 아직도 저런다니까?”

“어이! 잇신 그만둬! 손님이랑 싸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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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장인 세이지까지 말렸지만 잇신은 멈추지 않았다.

“……널 불쌍하게 여겨서 베푼 호의였다. 내 파티에 넣어준 것도. 네 기분 나쁜 능력에 머리카락을 빌려준 것도. ……전부.”

잇신이 노려보자. 스미레는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피했다. 잇신은 신유성과 스미레를 번갈아보더니 픽- 하고 웃었다.

“보아하니, 대항전에 나올 모양인 것 같은데. 설마. 하나지마. 그게…… 네 실력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잇신은 스미레에게 더욱 바짝 다가서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악담을 퍼부었다.

“……그렇게 불쌍한 척. 강한 사람에게 붙어먹는 게. 네 능력인가?”

“저, 저는…….”

고장난 오르골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스미레. 잇신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마치 기생충 같군. ……어이. 하나지마.”

잇신은 왼손의 검지로 다시 스미레의 이마를 건드렸다.

툭.

“일본.”

툭.

“한국.”

툭.

“다음은 어디지?”

잇신의 추궁에도 스미레는 말이 없었다. 울렁거리는 속. 역시 과거를 정면으로 맞이하는 건 괴로웠다.

유학을 오기 전 스미레는 모든 걸 버리고 불편한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저 그것뿐. 남겨진 파티원들의 입장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자신이 상처를 준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서 마주하고 버텨내기엔 스미레의 마음은 너무 나약했다.

“저, 저는…… 전, 그냥…….”

뚝뚝.

잇신의 추궁에 눈물을 흘리는 스미레. 잇신은 다시 검지로 스미레의 이마를 밀치려했다.

“묻는 거나 대답……. 윽!”

콰득.

하지만 신유성의 손에 붙잡힌 잇신의 검지. 신유성이 손에 꽈악- 힘을 주자 잇신은 표정이 일그러졌다.

“큭…….”

“그만둬.”

신유성은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기세만으로 주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네, 네가…… 뭘 안다고!”

잇신이 손을 떨쳐내며 물러났다.

잠깐 붙잡힌 것만으로 온몸이 저릿해지는 힘. 잇신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 우리 둘의…….”

신유성은 잇신을 무시한 채 스미레의 앞에 섰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담담하고 조용한 신유성의 어투.

스미레는 덜덜 손이 떨리는 와중에도 꾹- 신유성의 옷깃을 붙잡고 있었다. 그걸 본 잇신은 눈이 무섭게 가늘어졌다.

하지만 상대는 신유성.

“스미레는 한국의 대표로. 몽환의 성을 공략하기 위해 이곳에 왔어.”

신유성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고 잇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스미레를 향한 무례는 파티장인 내가 용납하지 않아.”

“한국의 대표이기 전에 하나지마는 일본……. 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잇신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며 스미레를 향해 쯧- 혀를 차더니 출구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어차피 배신자한테 등을 맡길 순 없으니까.”

잇신의 퇴장에 세이지는 다시 손을 뻗어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뒤에 있던 사쿠라가 세이지를 중재했다.

“잇신. 너 정말…….”

“됐어 세이지. 내가 참여할 테니 쟨 그냥 보내.”

당황한 세이지와 여유로운 사쿠라.

결국 잇신이 나가버리자 세이지는 신유성과 스미레에게 사과를 했다.

“……미안. 한국의 대표들에게 못난 꼴을 보였네. 특히 스미……. 아니, 하나지마 양에겐 더더욱. 내가 사과할게.”

세이지와 스미레는 중등부 시절에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둘의 접점은 당연히 잇신. 스미레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제 잘못이……. 맞는 걸요. ……파티원에게 아무 말도 없이 일본에서 도망쳤으니까…….”

“흐으음…… 모처럼 잘생긴 남자가 왔는데. 저 밉상 때문에 분위기가 참……. 에휴.”

사쿠라가 한숨을 쉬자. 세이지는 익숙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넷이서 파티를 맺는 걸로 하자!”

“맞아. 서로 작전을 짤 기분도 아닌 거 같고. ……오늘은! 이야기 나눈 걸로~ 만족할게?”

그렇게 말한 사쿠라는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쵸텐의 학생들이 나가버리자 남은 건 신유성과 스미레.

“죄, 죄송해요……. 신유성 씨……. 괜히 저 때문에…….”

스미레는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무릎을 끌어안고 주저앉아 있었다.

처음 일본에서 보여줬던 들뜬 모습과 달리 확연히 기가 죽은 모습.

“……여, 역시, 저 같은 건, 차라리 일본에 오지 않았던 편이…….”

씁쓸하게 웃는 스미레.

신유성은 그제야 왜 처음 만났던 스미레의 자존감이 바닥을 쳤는지 알 수 있었다. 중등부 시절의 과거는 스미레의 마음속 깊이 새겨진 상처였다.

“괜찮아.”

“에, 네?”

“우리가 일본에 온 건 몽환의 성을 공략하기 위해서야. 바뀐 건 없어.”

냉철인 신유성의 말에 스미레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장인 신유성은 이런 상황에서도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이게 신유성 나름의 위로.

털썩.

신유성이 스미레의 옆에 주저앉았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 당황한 스미레는 꿀꺽 침을 삼켰다.

“……시, 신유성 씨?”

신유성을 곁눈질로 흘기는 스미레의 윗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잠깐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자. 무슨 이유인지 점점 붉어지는 스미레의 얼굴.

“그, 저……, 저는?”

갑자기 말을 더듬으며 고장 난 스미레에게 신유성은 담담하게 말했다.

“스미레. 부실에서 네가 했던 말. 기억해?”

신유성의 말에 퍼뜩 정신이 돌아온 스미레. 바로 일본에 오기 전의 일. 스미레는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었다.

“부실이라면……. 스키야키를 먹은 날인가요?”

스미레에게 스키야키는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 스미레는 신유성에게 가족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보낼 때 스키야키가 더 맛있다고 소개했다.

“맞아.”

신유성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동료들에게 도움을 받고 무언가를 배워나가는 건, 신유성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무신산에서 지낸 12년의 수련.

가족이 없던 신유성은 절대 알 수 없던 무언가를 스미레는 같이 식사를 하며 가르쳐주었다.

사람은 사람에 의해 바뀌기 마련.

신유성은 작은 것부터 하나씩 동료들의 영향을 받아가고 있었다. 같이 지내고나서야 혼자보다 여럿이 즐겁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 생각했어. 만약, 다시 그 음식을 먹는다면. 누구와 먹어야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신유성에게 가족이라고 말할 사람은 권왕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같이 식사를 하며 하산 이후 벌어진 일들을 이야기하면 정말 즐거울 게 분명했다.

하지만 기껏해야. 두 명.

만약 그 다음으로 가족을 꼽는다면 누구일까?

자신을 버린 부모님?

친 누나인 신하윤?

그게 아니면 신오가문?

그들은 분명 피가 섞여 있지만 신유성의 기준에선 절대 가족이 아니었다. 신유성이 생각하고 꿈꾸는 가족은 절대 특성 따위를 이유로 일원을 버리지 않았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밖엔 떠오르지 않았어.”

“네!? 그, 그럼, 저, 저희는…….”

신유성의 이야기에 당황한 스미레는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틀린 이야기는 없었다. 가족이 없는 신유성에게 가장 가까운 건 스승인 권왕과 동료인 파티원들이었다.

그러나 스미레는 그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였다.

‘시, 신유성 씨가 내…… 가족?’

스미레는 최대한 차분해지려 애썼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스미레는 폭주하는 망상 속에서 이미 아들과 딸의 이름까지 정해둔 상태였다.

이미 잇신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스미레. 신유성은 행복한 웃음을 참는 스미레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맞아. 내게 파티원과 동료는 그 정도의 의미가 있으니까.”

신유성과 마주보는 스미레.

스미레의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두근거리는 와중에도 신유성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그 정도 일로. 스미레 너에게 실망하지도. 널 한국으로 돌려보내지도 않아.”

어떤 일이 벌어져도 곁에 머물러주는 완전한 내 편. 어쩌면 이건 신유성이 원했던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이었다.

“……가족은 그런 거잖아?”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신유성의 미소. 스미레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러니 계속 서로를 돕자. 우린 파티니까.]

그 날.

스미레에게 도움이 됐다고 말해준 신유성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건 비단 던전의 공략이나 반 대항전의 활약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뚝뚝.

스미레는 어린 시절부터 울보라는 놀림을 달고 살았지만 오늘만큼은 억울했다. 자신이 동경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됐다니, 그런 기쁜 상황이라면 누구나 울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흘리는 건 분명 평소와는 다른 감격의 눈물.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벌리려던 스미레는 다시 입술을 물었다.

꾸욱.

입술을 지그시 깨문 스미레는 신유성을 바라봤다. 스미레가 지켜본 신유성은 올곧으며 누구에게나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건 절대 자신만을 향한 호의가 아닌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훌쩍.

스미레는 소리가 나도록 코를 훌쩍이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런 저라도 흑, 괜찮으시다면…….”

비록 울고 있지만 어쩐지 기뻐 보이는 스미레의 얼굴. 그제야 신유성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훌쩍! 그, 그리고…… 유성 씨한테는 저희 가족들도 소개 시켜드릴게요! 모처럼…… 스키야키도 준비해주셨다고 했으니까.”

퉁퉁 부어 붉어진 눈으로 배시시 웃는 스미레. 신유성도 스미레를 따라 배시시 웃어주었다.

‘……기대되네. 스키야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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