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일본 간토 지방.
아름답기로 소문난 도치기 현의 국립공원에는 일본 제일의 아카데미가 있었다.
쵸텐(頂点)
모든 이의 정점에 서라는 이름처럼 일본의 각종 대회를 휩쓸고 있는 최고의 아카데미.
그리고 1학년 중 최강은 헌터부.
모든 학생들이 헌터로 이루어진 쵸텐에서 헌터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특이한 동아리.
쵸텐에서 헌터부에 소속된 학생은 단 9명에 불과했다. 즉 헌터부는 일본 최고의 정예. 하지만 세이지의 파티는 팀원 3명이 전부 헌터부에 소속된 엘리트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실패도 겪어보지 못한 일류. 하지만 한국의 대회에서 단신으로 출전한 아델라에게 3위로 밀려 기록으로 패배했다.
“신유성이라! 정말 대단한 걸! 그런 아델라를 F급 특성으로 꺾어버리다니!”
파티장인 세이지가 기사를 읽으며 호쾌하게 웃자. 책상에 앉은 사쿠라는 다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싱긋 웃었다.
“흐응, 실력은 못 봤는데. 얼굴은 대단하긴 하더라. 완전 내 스타일!”
사쿠라의 장난기 섞인 웃음에 잇신은 미간을 찌푸렸다.
“……진지하게 임해라. 사쿠라.”
사쿠라는 잇신의 뒤에서 엄지를 아래로 향했다. 일종의 반항.
“보인다.”
하지만 잇신의 한마디에 사쿠라는 슬쩍 손을 내렸다.
“근데 이번 기회에 실력을 봐둘 수 있으니까. 좋은 거 아냐? 같이 공략을 한다면 상대를 가까이서 볼 수 있으니까.”
진지하게 말을 하던 사쿠라는 잇신이 들으라는 듯 말을 덧붙였다.
“오해하지 마~ 실력 이야기야~ 얼굴 이야기 아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신경질적인 잇신.
파티장인 세이지는 둘 사이를 중재하며 웃었다.
“맞아. 대항전을 대비하기엔 좋은 기회지.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 일 테고!”
이야기를 듣던 사쿠라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손을 따라 하늘하늘 넘어가는 머리카락은 벚꽃과 닮아 있었다.
“재미없긴. 근데 같이 오는 다른 파티원은 누구래?”
사쿠라의 질문에 세이지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음, 소문으론 가온의 학년 랭킹 3위가 신유성의 파티에 합류 했다고 하던 걸?”
“흠, 역시 3위가 오려나. 근데 걘 여자애 아냐? 아~ 완전 실망~ 둘이서 핑크빛이겠네.”
떨떠름해진 얼굴의 사쿠라.
잇신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등을 맡길 정도의 실력만 있다면. 난 누구라도 상관없어.”
분위기를 잡고 읊조리는 잇신.
사쿠라는 뒤에서 그런 잇신을 입모양으로 흉내 냈다.
‘난~ 느그라드~ 상가넙서~’
결국 사쿠라를 보며 웃음이 터진 세이지.
“쿡!”
잇신은 아무 것도 없는 허리춤에 검집을 잡듯 손을 얹었다.
“보인다고 했을 텐데.”
슬쩍.
이번에도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며 새침을 떼는 사쿠라. 둘은 잡아먹을 듯 앙숙처럼 굴었다.
하지만 여기서 밸런스를 맞춰주는 게 파티장인 세이지.
“자 그럼! 빨리 손님들을 만나러 가볼까!”
세이지는 둘의 등을 토닥이며 환하게 웃었다.
* * *
일본 도치기 현.
포탈을 통과한 신유성과 스미레.
모처럼 일본으로 돌아온 스미레는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신유성씨! 이, 이거! 이 당고 정말 맛있어요!”
스미레가 든 건 일본식 떡꼬치. 당고. 스미레는 신유성에게 맛보여주기 위해 여러 가지 소스가 발린 당고를 양손 가득 들고 왔다.
“이 소스는 간장! 이건 미소! 이건 꿀이에요!”
목적지까지 걸어가며 신유성은 하나하나 당고를 맛보았다.
‘……떡을 구운 건가? 천재적이군.’
소소한 군것질 거리에도 마음속 깊이 만족하는 신유성. 들뜬 스미레는 이것저것 계속 음식을 가져왔다.
“여, 여기! 타코야끼도 있어요!”
1번.
“벼, 병아리 모양…… 만쥬! 이, 이런 건 귀여워서 못 먹겠죠?”
2번.
“저기 라멘집이!”
3번.
마른 몸에도 끝도 없이 음식을 먹는 신유성과 계속해서 음식을 추천하는 스미레. 둘의 조화는 가히 환상이었다.
즐겁게 걷다보니 도착한 국립공원.
신유성과 스미레는 나무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저, 너, 너무 들떴나 봐요. 더 이상은…… 못 먹겠어요.”
“재밌었어.”
초코 바나나를 쥔 신유성의 대답에 기분 좋게 배시시 웃는 스미레. 그건 신유성을 만나기 전의 스미레라면 절대 짓지 못했을 미소였다.
“……이, 일본에 오기 전에는. 걱정이 많았는데. 역시 괜한 생각이었나 봐요.”
“걱정?”
신유성의 물음에 생각에 빠진 스미레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냥…….”
하지만 자세하게 답을 할 순 없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스미레는 자신의 나약하고 못난 모습을 최대한 신유성에게 숨기고 싶었다.
“여, 여러 가지로요!”
그렇게 말하곤 억지로 웃는 스미레. 가족이 있는 일본은 스미레가 자란 모국이지만. 스미레를 많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난 ……일본에서 도망쳤어.’
[너 때문에! 괜히 선생님만!]
[망할! 너 같은 머저리 때문에 내가 병원 신세를 져야해?]
[대체…… 잇신은 무슨 생각이야? 왜 저딴…….]
생각해보면 반 친구들의 따돌림은 당연했다. 모든 게 자신의 폭주 때문에 벌어진 일. 피해를 준 스미레가 느낀 감정은 그저 미안함이었다.
신유성과 만나며 이번에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스미레에겐 마음한 구석에 무거운 짐이 있었다.
‘그런 내가 이렇게…… 행복해져도 되는 걸까?’
스미레는 자신이 아니라도 신유성은 좋은 파티원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강하고 올곧은 신유성이라면 그럴 자격이 있었으니까.
‘난……자격이 없는 게 아닐까?’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기뻤던 기분은 가라앉고, 익숙한 의문들이 스미레의 자존감을 깎아 놓았다.
“스미레?”
옆에서 들리는 신유성의 목소리. 스미레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네!?”
“이제 쵸텐으로 갈 시간이야.”
쵸텐의 이름에 스미레는 꾸욱 입술을 다물었다. 일본의 대표들이 기다리고 있는 쵸텐 아카데미. 스미레는 이제 도망쳤던 과거와 마주할 시간이었다.
* * *
메트로 병원의 병실.
마지막 치료를 위해 침대에 누워 있는 김준혁의 곁에서 김은아는 2년 동안 벌어진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려주었다.
“그래서 반대항전을 워터파크에서 했는데. 아, 설마 까먹은 거 아니지? 기억나지? 우리가 같이 갔던 거기.”
“그럼. 알지.”
김준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김은아는 시큰둥한 얼굴로 김준혁을 흘겼다.
“또 괜히 사람이 엄청~ 울적해지는 거야. 오빠가 그걸 알아?”
“……그거 참. 미안한걸.”
“그게 미안한 사람 표정이야?”
김은아가 눈을 가늘게 뜨자. 김준혁은 자신의 머리를 긁적거렸다.
“근데 은아야. 너무 궁금해서 그러는데…….”
“뭐가.”
뚱한 김은아의 표정에 김준혁은 멋쩍은 얼굴로 물었다.
“파티에 가입했다며?”
“아니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김은아는 파티에 관한 이야기는 쏙 빼놓은 참이었다. 하지만 김준혁은 누군가에게 듣고 말았다.
“하하, 이수현 씨가…….”
“……대체, 어디까지 들었어?”
“네 파티장이. 몸소 날 구해준 이야기까지?”
“그래?”
김은아가 흠- 하고 소리를 냈다.
‘하긴 그건 중요한 이야기니까.’
그렇게 담담하게 넘기려는 찰나. 김준혁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네가 텐트에서 숙박을 했다는 것도?”
“아니 그럼 다 들었잖아! 그, 그리고! 다른 여자애도 있었다고! 자꾸 걔는 왜 빼는데!”
얼굴이 붉어져서 길길이 날뛰는 김은아. 김준혁은 푸하하- 웃었다.
웃음이 끝나고 한결 차분해진 김준혁은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정말 고마운 학생이네. 학생의 신분으로 리벨리온과 맞서주다니.”
“뭐, ……그래서 가입했어. 빚은 갚아야 하잖아? 물론 대항전이 끝날 때까지지만…….”
침대에 상체를 엎드린 김은아.
김준혁은 천천히 김은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웃었다.
‘……역시 가족인가.’
김은아는 김준혁 자신을 너무 닮아 있었다. 마음은 약한 주제에 자존심은 강하고. 자신 쪽에서 먼저 표현하는 건 너무나도 서툰 점까지도.
“자 그럼 은아야?”
“엉?”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내가 직접 감사를 표하고 싶은데…….”
김준혁은 이번에는 오빠인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 파티장인. 신유성 학생은…… 지금 어디 있어?”
김준혁의 질문에 김은아의 대답은 심플했다.
“일본.”
생각보다 너무 먼 거리에 김준혁은 당황했다.
“……일본?”
“그래. 환자는 절대 못가니까. 얌전히 쉬어라?”
김은아의 살벌한 눈빛에 김준혁이 멋쩍게 웃었다. 공백의 2년. 안 본 사이에 동생인 김은아는 여러 의미로 너무 강해져 있었다.
* * *
쵸텐 아카데미의 외각.
헌터부의 3인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 보이는 상석에서 신유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약속한 시간이야.”
팔목의 포켓을 확인하며 세이지가 말을 하자. 사쿠라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잇신. 너 전처럼 괜히 일본어로 말하지 마. 한국말도 잘하면서 그러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잇신은 사쿠라가 마음에 안 드는지 쯧- 혀를 찼다.
지금은 포켓을 가지고 있으면 언어의 번역은 일도 아니었지만. 포켓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과거.
인류에겐 원활한 소통을 위해 [공용어]가 필요했다.
공용어를 택하는 과정은 단순했다.
해당 국가 가진 탑에서의 영향력. 덕분에 공용어의 국가로 선택 된 건 포켓에 사용되는 대부분의 기술을 발견한 한국이었다.
한국은 게이트와 던전이 많았다는 이유로 강한 헌터를 배출해냈고 탑을 선점할 수 있었다.
악재인 줄 알았던 저주받은 아웃브레이크의 재앙이 우연히도 국력을 강화해준 것이다.
현세대에 와선 다른 국가에도 탑을 공략한 헌터의 숫자가 늘어났지만 이미 한국어가 공용어로 완벽하게 굳혀진 상태였다.
“그래. 말할 줄 알면서. 괜히 상대를 따돌리는 건 좋지 않지. 우린 이제 같이 던전을 공략할 파티니까.”
세이지가 웃고 있을 때 멀리서 누군가 걸어왔다.
저벅저벅.
상대는 아니나 다를까 가온의 교복을 입은 신유성. 싱글싱글 웃던 사쿠라는 신유성의 옆에 서있는 스미레를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
생각해보면 협회의 대회에서 가온이 참가시킨 인원은 3명. 하지만 쵸텐 아카데미는 신유성과 아델라의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다.
“가온의 나머지 파티원이…….”
파티장인 세이지도 당황한 얼굴로 잇신을 흘겼다. 놀랄 만한 일이었다. 파티원이 일본인이었다니. 그것도 너무나 익숙한 얼굴.
“……뭐야.”
중얼거리는 잇신의 목소리에 약속이라도 한 듯 세이지와 사쿠라의 시선이 모였다.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쓰고 일어나는 잇신.
스미레는 이 모든 상황을 예상한 듯 꾹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저, 저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흐려지는 스미레의 목소리.
쾅!
잇신은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벽을 치더니. 경멸을 담은 눈으로 스미레를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