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3화 (73/434)

제73화

이른 아침의 부실.

투둑. 투두두둑!

밖에선 비가 내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해가 가려진 탓에 푸른빛이 감도는 풍경. 의자에 앉은 신유성은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비 오는 날의 풍경.

하지만 오늘 신유성이 느끼는 감정은 사뭇 달랐다.

‘듣기 좋은 소리인걸.’

물이 어딘가에 부딪치며 내는 청아한 소리. 신유성이 빗소리에 집중하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신유성은 빗소리를 싫어했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비 오는 날이 싫었다.

축축해 보이는 어두운 하늘.

투둑투둑- 쏟아지는 빗소리는 항상 신유성에게 기분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차피 F등급 특성으로는 신오일가에서 버틸 수 없을 거다.]

아버지.

[차라리 헌터를 포기하고 평범하게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어머니.

[유성아. ……불량품으로 사는 기분은 어때? ……응? 나한테도 말해줘. 어떤 기분이야?]

누나.

[과한 처사라고 느끼지만 어쩔 수 없겠군요. 가문에서 추방하는 건 찬성입니다.]

[그 하이에나 같은 놈들에게 놀림거리 밖에 더 되겠습니까?]

[저도 동감입니다.]

[그나저나 저 아이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신기한 일이군. 어떻게 그 둘의 사이에서 저런 불량품이…….]

그리고 가문의 사람들.

기억이란 건 신기하다. 전부 잊었다고 생각했을 때, 사소한 계기를 핑계로 다시 잠에서 깨어난다.

그런 기억들은 한동안 신유성의 마음을 헤집어 놓았다.

그건 무신산에서 수련을 할 때도 신유성이 유독 비 오는 날을 싫어한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린 시절에는 귀를 막고 싶었던 빗소리가 지금은 그저 듣기 좋은 소리에 불과했다. 신유성은 옅게 웃으며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았다.

콕.

‘어쩌면…….’

신유성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할 대상은 외부에만 있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활약을 거듭하고, 노력과 재능을 증명해 나갈수록 신유성은 점점 자신을 믿고 있었다.

‘바뀌고 있는 건, 나인가.’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

무신산을 벗어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신유성은 차츰차츰 무언가를 배워나갔다.

이제 신유성은 더 이상 수련으로 자신을 몰아세우지 않았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은, 이렇게 여유롭게 쉬는 법을 배웠다.

세상에는 맛있는 음식이 많이 있다는 것도.

강해보이는 사람도 고민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약해보이는 사람도 마음속엔 강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모두 누군가를 만나며 경험을 통해 알게 됐다.

주으읍.

입에 퍼지는 바나나의 향과 달달한 맛. 신유성이 바나나 우유를 음미하고 있을 때 누군가 부실의 문을 열었다.

바스. 바스슥!

비닐봉투가 내는 소리.

“春に為ったら~ 花見!(봄이 되면~ 꽃놀이!)”

일본어로 동요를 흥얼거리는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

“秋に為ったら~ 月見!(가을이 되면~ 달맞이!)

기분 좋게 흥얼흥얼 거리던 동요가 신유성의 근처에서 뚝 끊겼다.

“헉.”

신유성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키는 스미레. 주말인데다 이른 시각이라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한 모양이었다.

“그, 그, 벌써……. 계, 계셨네요? 엄청 이른 시간인데…….”

민망해진 스미레는 헛기침을 하며 검지로 볼을 긁적거렸다.

“그건?”

신유성이 봉투에 관심을 보이자 스미레는 바닥에 주저앉아 재료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아, 이번 메뉴는 스키야키에요! 이건 실곤약……. 스키야키 소스. 무랑 대파. 버섯……. 그리고 고기는 소고기!”

설명을 끝낸 스미레는 슬쩍 신유성을 올려다보았다.

“……주, 주말이라 파티원 분들이 많이 오실 줄 알고, 준비한 메뉴인데. 그, 저희…… 둘 밖에 없네요.”

“그러네.”

에이미는 원래 방송의 스케줄로 늘 바빴으니 주말에 없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말의 대부분을 놀며 보내는 김은아도 이번에는 김준혁이 깨어나며 부실에 없었다.

“이, 이시우 씨는…… 갑자기 집안에 일이 생기셨다고 했고……. 아쉽네요. 신유성 씨의 우승을 기념해서 준비한 음식인데…….”

스미레는 어린 시절부터 특별한 날은 가족들과 전골을 먹었다. 특히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많은 사람이 같이 먹어야 전골이 맛있다고 가르쳤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그건 버릇이 됐다.

“워, 원래는…… 일어나시면 천천히 준비 하려고 했는데……. 그, 지금 바로 준비할까요? 아침으로 스키야키는 거창하지만…….”

“난 좋아. 마침 배도 고프던 참이야. 고마워 스미레.”

“네!? 아, 아니에요! 시, 신유성 씨가 저에게 도와주신 게! 훨씬 많고……. 재료도 전부 지원금으로 산거고…… 세븐넘버가 된 건, 전부 신유성 씨 덕분이니까요!”

스미레는 신유성의 감사에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스미레는 남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건 익숙하지만. 듣는 건 아직 어색했다.

그 상대가 신유성이라면 더더욱.

일본에서 벌어진 ‘그 사건’ 이후,  스미레에게 가장 어두운 시기에 신유성은 손을 뻗어주었다.

그래서 설령 언젠가 자신이 빛나게 되더라도. 누구도 그 자리를 대신 할 수 없었다. 스미레에게 신유성은 특별했다.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

“……제, 제가, 신유성씨에게 도움이 되고 보답할 수 있는 건. 이런 요리 정도니까요…….”

그렇게 말한 스미레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스미레는 신유성과 하는 식사가 제일 즐거웠다. 자신이 한 요리를 먹어 줄때는 특히 더욱 기뻤다.

툭.

하지만 신유성은 스미레를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틀렸어.”

“……네?”

스미레의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스미레는 그런 와중에도 혹시 자신이 신유성의 기분을 나쁘게 한 건 아닐까 표정을 살폈다.

“스미레. 우린 같은 파티야. 네가 널 파티원으로 택한 건. 너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야.”

톡. 타닥. 타다닥.

창밖의 빗소리는 멎지 않았다. 떨어지는 빗소리와 신유성의 목소리는 잘 어울렸다.

“절망의 묘지에서 해낸 더블 공략도. 반 대항전의 승리도. 네 활약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어.”

스미레에게 신유성은 늘 동경의 대상. 신유성은 F급 특성에도 어떤 일이든 가뿐히 해내고. 포기하지 않으며. 언제나 의지가 됐다.

“제, 제가 정말로 도움이…….”

자신이 신유성에게 도움이 됐다니 스미레는 기분이 이상했다.

“응. 도움이 됐어. 스미레.”

하지만 신유성은 단호했다.

그 누구도 모든 일을 혼자 잘 해낼 순 없다. 혼자 살아갈 순 없다. 신유성은 그렇게 느꼈다.

자신이 무신산의 수련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도.

권왕의 밑에서도 사용하지 못한 투신류의 4장을 깨우친 것도.

권왕과 동료. 그리고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계속 서로를 돕자. 우린 파티니까.”

신유성의 입장에선 솔직한 감상.

하지만 스미레가 느끼는 감정은 사뭇 달랐다.

“우, 우으……, 신유성 씨…….”

어느새 울상이 된 스미레.

감동을 한 스미레는 울먹거리며 계속 중얼거렸다.

“네! 제, 제가…… 계속 노력해서…… 더, 더! 도움이 될게요! 능력도 강해지고……, 요, 요리도 더 맛있게 할 거에요…….”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보글보글.

테이블 위에는 버너에 올려둔 전골이 끓고 있었다. 점점 색이 진해지며 소고기가 익어가자. 스미레는 설명을 시작했다.

“젓가락으로 이렇게 집어서…… 풀어둔 날달걀에 적셔 드시면 되요.”

처음 보는 음식에 기대한 신유성은 곧장 따라해 보았다. 진한 스키야키 양념이 벤 고기와 고소한 날계란의 조화로운 맛.

“엄청 맛있어.”

신유성이 맛있게 식사를 하자. 스미레는 신유성의 앞 접시에 두부와 소고기를 덜어주었다.

어딘가 뿌듯해 보이는 얼굴.

스미레는 헤실헤실- 웃었다.

“……이, 일본에서 자주 만들어봤거든요! 보통 스키야키는……. 가족들이랑 먹는 음식이에요.”

“……가족들이랑?”

신기해하는 신유성의 물음에 스미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에…… 둘러앉아서 다 같이 먹곤 해요. 소소한…… 이야기들도 같이 나누고요.”

스미레에게 전골은 추억이 많이 깃든 음식이었다. 물론 동생들이 서로 먹겠다며 싸우는 통에 고기는 집어보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맛있었다.

“그, 그러고 보니…… 가족들을 본지도 정말 오래됐네요.”

그렇게 말한 스미레는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었다. 날계란을 묻혀 입안에 넣고 우물우물.

전골은 충분히 맛있었지만 집에서 먹은 맛과는 뭔가 달랐다.

“가족들이랑 함께 먹으면……. 되게 맛있는데.”

“그렇구나.”

가족들과 먹는 음식.

‘……가족이라.’

신유성은 다시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었다. 스미레가 말한 가족은 자신에게 누구일까.

5살이었던 자신을 버린 신오가문의 일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절대 신유성의 가족이 아니었다.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권왕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스미레는 유학을 온 이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상태. 신유성도 스미레가 느끼는 기분이 어렴풋이 이해가 됐다.

“그럼. 잘됐네. 이번이 기회에 보러가자.”

신유성의 말에 스미레는 양손을 다급하게 휘저었다.

“네, 네? 아? 아뇨!? 마음은 기쁘지만 가족들은 일본에…….”

“말하지 않았어? 다음 공략은 일본으로 갈 예정이라고.”

그 말과 함께 아무렇지 않게 고기를 집는 신유성. 스미레의 눈은 동그랗게 변했다.

“네, 에에!? 이, 일본!?”

당황한 모습의 스미레.

신유성은 포켓을 조작해 공략의 정보를 홀로그램으로 펼쳐보였다.

[보스 공략 의뢰]

[출몰 지역: 몽환의 성]

[보스 이름: 서큐버스 퀸]

[난이도: 5급]

[참가인원 2명]

[시간제한: X]

“……음. 참가인원은 최대한 회의로 정하려고 했지만. 몽환의 성에는 언데드 몬스터가 많으니까. 스미레 네가 좋을 거 같아.”

최강의 전력 중 하나인 김은아는 혼수상태인 오빠가 깨어나 자리를 비울 수 없었고, 에이미는 일정으로 이시우는 가족의 일로 너무 바빴다.

“그, 그럼? ……저, 저랑 신유성씨만 같이…… 일본으로?”

스미레는 가족을 보러 본가로 향할 예정이니, 협회에서 제공해주는 숙소도 필요가 없었다.

“준비는 많이 해야겠지만. 어때?”

신유성의 이야기에 스미레는 못 참겠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신유성 씨가. 내 집에…….’

스미레는 얼른 가족들과 만나고. 신유성을 소개시켜주고 싶었다.

‘이, 이건 완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스미레는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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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하흐…… 흐히힛…….”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실실 웃음소리를 흘리는 스미레.

“네! 조, 좋아요! 무조건 제가 가고 싶어요! 가족들을 볼 수 있기도 하고…….”

“좋아. 그럼 정해졌네.”

신유성은 미소와 함께 바나나우유에 콕 빨대를 꽂아 넣었다. 그저 기쁜 스미레는 그런 신유성을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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