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헌터 종주국이라 불리는 한국.
실력지상주의를 표방하는 가온 아카데미는 그렇게 경쟁이 치열한 한국에서도 언제나 1등을 유지했다.
“근데 아무리 너희가 잘나도~ 그렇게 가온만 띄워주면 우리가 들러리 같잖아. 안 그래?”
이노 아카데미의 나지혜.
오늘을 위해 칼을 갈고 닦아온 나지혜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누구보다 당당한 자세로 말했다.
“그래서 너흴 위해 이 자리를 준비했단 말씀! 하핫! 아델라 너 다음엔 신유성이야!”
우르르!
아델라를 둘러싼 11명의 학생들.
아델라는 감정 없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선발전에 참가했다는 건 각자의 아카데미에서 손꼽히는 수재라는 뜻.
“왜 항복할래?”
나지혜가 뿌듯한 얼굴로 묻자. 아델라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숫자가 늘어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저런 건방…….”
한 남학생이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내밀자. 나지혜는 남학생의 옷을 잡아당겼다.
“바보야. 말려들지 마.”
덩치가 작은 나지혜의 손에 붙잡히자. 남학생은 꼼작하지 않고 행동을 멈췄다. 아무래도 타도 가온 연합의 리더는 나지혜인 모양이었다.
“흐흥! 아주 자신만만하네!? 감히 11명을 상대로 말이야!”
나지혜가 검지로 허공에 선을 긋자. 노란빛의 배리어가 아델라를 가뒀다.
빠져나갈 수 없는 사각의 감옥.
자신을 보호하는 대신 나지혜는 아델라를 가두었다.
“모두 준비!”
우렁찬 나지혜의 신호에 학생들은 각자 최고의 무기를 준비했다.
불을 붙인 폭탄.
시위를 당기는 활.
특성으로 만들어낸 불꽃.
쇠사슬에 달린 거대한 철퇴.
모든 게 스치기라도 하면 치명상인 공격들.
나지혜는 당당하게 웃었다.
“흐핫! 우리가 널 잡으려고 얼마나 준비를 한 줄 알아?”
11명의 타도 가온 연합은 매일 대련장에 모여 3시간씩 훈련했다.
각자 아카데미도 다르고, 포탈비가 없어 지하철을 타고 도착하는 학생도 있었지만. 모두 아델라를 이긴다는 생각으로 꿈에 부풀어 있었다.
무려 한 달을 연습한 타이밍.
“쏴!”
나지혜가 손을 내리며 우렁차게 외치자. 준비된 공격이 아델라를 향해 일제하게 쏟아졌다.
사아악.
헌터들은 강한 기술을 사용할수록 준비시간이 길게 필요했지만 아델라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재능 중 하나는 타고난 마나 컨트롤. 나지혜가 배리어로 시간을 끈 건 그런 아델라와 동일한 조건을 만들기 위한 장치였다.
“이건 못 피하겠지!?”
파앗!
아델라를 가둬둔 배리어가 사라졌다. 남은 건 사방에서 아델라를 향해 몰아치는 공격.
“당신들의 공격은…….”
아델라가 손을 뻗었다.
나지혜를 바라보는 무감한 표정에 어렴풋이 경멸이 서렸다.
“무의미합니다.”
콰악!
허공을 움켜쥐는 아델라.
파앙!
아델라에게서 터져 나온 하얀색의 마나는 주위의 모든 물체를 집어삼켰다.
사아앗.
하얀색 연기가 사라지고, 드러나는 신비로운 풍경. 푸른 초목은 얼음으로 뒤덮였고, 상대방의 공격들은 시간이 정지된 듯 얼어붙었다.
“어, 어라?”
멀뚱멀뚱.
나지혜는 아델라를 바라보더니 꿀꺽 침을 삼켰다.
“……이게 아닌데?”
비장의 공격이 막혀버린 상황.
눈치를 살피던 11명의 학생들은 서로를 버리고 부리나케 흩어지려고 했다.
“미친…….”
“저, 저딴 걸 어떻게 이겨!”
“난 빠질래!”
하지만 아델라는 그들의 도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쩌어억!!
순식간에 퍼져 나간 한기가 주변의 땅을 얼려버렸다. 배리어 능력자인 나지혜를 제외한 모두의 발이 땅에 붙어버린 상태.
“으, 으윽!”
“발이 안 떨어져!”
“제발 뭐라도 좀 해봐!”
아비규환이 된 초원 위에서 아델라는 나지혜에게 보란 듯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강한 사람은 무리를 짓지 않아요.”
아델라의 멍한 눈이 나지혜는 오늘만큼은 너무나도 섬뜩했다.
“윽, 으으…….”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말을 끝낸 아델라는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쐐애액! 파악!
땅에 박혀 있던 얼음 조각이 학생 중 하나를 꿰뚫었다.
“크헉!”
순식간에 푸른빛이 되어 흩어지는 탈락자. 현실의 감각과 비슷하다는 건 고통도 마찬가지. 발이 묶인 학생들은 모두 공포에 떨었다.
“하, 항복! 기권할래!”
“저도! 저도! 기권하겠습니다!
“꺄악! 저도요! 빨리!”
[남은 인원은 21명입니다.]
항복 처리가 되어 포탈 밖으로 퇴출되는 학생들. 아델라는 멍한 눈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봤다.
아직 손가락을 하나 밖에 접지 않았지만 나지혜를 제외한 학생들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당신만 남았군요.”
아델라의 공허한 눈빛.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배리어를 펼친 나지혜의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아델라가 강한 건. 나도 알고 있었어.’
모를 리가 없었다.
나지혜에게 아델라는 어린 시절부터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탈리아에서 9살 때부터 현역 헌터들과 공략을 다닌 방송도. 가온의 입학시험도 모두 챙겨봤다.
그런 아델라를 목표로 했으니까.
나지혜는 선발전의 대표까지 닿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차원이 달랐다.
아델라에겐 재능이란 말로도 부족한 압도적인 강함이 있었다.
저벅저벅.
“기억났습니다. ……당신. 제 라이벌이 되고 싶다고 말했던 그 사람이군요.”
“기, 기억…….”
교외 활동에서 홧김에 했던 이야기. 나지혜는 아델라가 자신을 기억해줬다는 사실이 기쁜 모양이었다.
“……해준 거야?”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아델라에게 감히 라이벌을 칭한 건 나지혜가 처음이었으니까. 나지혜는 기쁜 마음에 콧등이 붉어졌지만 아델라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좋습니다. 그럼 라이벌로 대우해드리죠. ……당신은 얼마나 버틸까요?”
아델라의 말과 동시에 나지혜는 온몸의 털이 쭈뼛거렸다.
“흐익…….”
숨을 뱉는 순간. 보이는 하얀 김.
발밑부터 서늘한 감각이 몰려오자. 무언가 잘못 되고 있다는 걸 나지혜는 직감했다.
쩌억.
발끝에서 시작된 한기는 스멀스멀 올라와 다리를 굳혔다.
‘내. 배리어가, 뚫렸어…….’
패배를 인정하기 싫었지만 나지혜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하, 하…… 항…….”
뒤늦게 항복을 외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나를 유지하던 나지혜의 손이 얼어붙자.
쨍그랑!
배리어는 유리조각처럼 산산이 깨져나갔다.
화아아악!
나지혜를 향해 눈보라처럼 몰아치는 아델라의 한기. 아델라는 얼음동상으로 변해버린 나지혜의 이마를 검지로 툭- 건드렸다.
파스스!
몸이 무너지며 나지혜의 머리가 추락했다. 얼어붙어 조각난 몸에 감각은 없었지만 잔인하게도 아직 나지혜의 시야는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역시. 무리였나.’
곧 다른 학생들처럼 푸른빛으로 변해 사라지는 나지혜. 무려 12명의 학생이 아델라 단 한명에게 리타이어 됐다.
[남은 인원이 20명으로 줄게 되어 다음 이벤트가 진행됩니다.]
안내를 위해 포켓에서 뿜어져 나온 홀로그램.
구구구궁!
맵 전체가 흔들리는 매서운 진동 소리와 함께 섬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줄어든 인원수에 맞게 일부 지역이 맵에서 삭제되었습니다.]
[잠겨 있던 히든 이벤트(징표 쟁탈전)가 시작됩니다.]
[보스몹에게서 징표를 쟁취한 사람이 결승전으로 진출합니다.]
아델라를 포함한 모든 참가자의 포켓에 보스몹의 위치가 표시됐다.
[사르니아 산-???(4급)]
[사르니아 동굴-???(4급)]
아델라가 가야할 곳은 초원에서 가까운 동굴. 길었던 선발전도 점점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사르니아 산-???(4급)]
[사르니아 동굴-???(4급)]
갑자기 진행된 히든 이벤트.
신유성이 홀로그램으로 정보를 확인하고 있을 때, 에이미는 메세지로 호들갑을 떨었다.
[Amy♥:와! 진짜 대박!]
[Amy♥:보스몹! 징표! 이거 엄청 드물게 하는 이벤트에요! 헤헤, 대충… 주기를 계산하면 5년에 한 번?]
“그래?”
신유성이 고지를 향해 올라가며 말했다. 에이미가 알려준 대로 서바이벌로 결승전의 출전자가 뽑힐 줄 알았지만 협회는 히든 이벤트를 시작했다.
“조건이 뭔데?”
[Amy♥:흠, 보통 최소 2명 정도는 넉넉하게~ 4급을 잡을 수 있겠다? 그렇게 생각이 들면 진행하죠!]
이해를 마친 신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발전은 대표를 뽑는 것 이외에도 목표가 있었다. 선발전의 내용을 통해 국력을 자랑하는 것.
이번 히든 이벤트는 그 연장선으로 보였다.
‘큰 상관은 없겠지.’
보스몹의 징표를 얻은 2명은 결국 마지막 결승전에서 우승자를 뽑아낸다. 만약 비겁한 행동과 운 좋게 기회를 따내도 그런 참가자는 투표를 통해 걸러질게 뻔했다.
보스몹의 목적지만 겹치지만 않으면 되는 상태.
[Amy♥:근데 파티장님은 동굴이랑 산 중에 어디로 가실건가요?]
궁금해 하는 에이미의 메시지에 신유성은 생각했다.
“음…….”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신유성의 위치는 강가의 근처. 사르니아 산과 아주 가까웠다.
“역시 가까운 산이 좋겠지.”
목적지는 이미 정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