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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59/434)

제59화

정적만이 흐르는 고요한 텐트.

김은아는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점점 잠에 깨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여전히 몽롱한 정신.

‘……으응?’

몸을 뒤척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뒤에서 누군가 김은아를 껴안고 있었다.

‘이, 이거, 뭐야?’

김은아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설마……. 시, 신유성! 여, 역시!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김은아는 몸이 점점 굳었다.

‘어, 어떻게 하지!? 근데 이거 고의는 맞나? 실수 아냐!? 잘 때는 누군가를 껴안는 버릇이 있다던가!?’

반면 머리에서는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 김은아. 뒤에서 다가온 누군가는 김은아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쭈뼛!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감각.

도저히 실수라고는 볼 수 없는 행동에 얼굴이 새빨개진 김은아는 분노로 부르르- 주먹을 떨었다.

‘진짜로, 진짜……. 죽여 버릴 거야…….’

아무리 오빠의 은인이라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 김은아가 팔을 뿌리치고 소리를 치려는 순간.

귓가에 누군가의 희미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흐윽……. 흑! 우물우물……. 제 카라, 아게가 더 맛있어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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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의 정체는 스미레였다.

심지어 스미레는 김은아의 귀를 음식처럼 우물우물- 거렸다.

“아니! 이게 미쳤나…….”

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이 새빨개진 채 씩씩거리는 김은아.

“야! 얌전히 안 자!?”

화가 난 김은아가 발로 스미레를 굴려버렸다.

“……흐으에에.”

스미레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텐트의 구석으로 저만치 멀어졌다. 포켓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귀에 묻은 스미레의 침을 닦아내는 김은아.

“아으! 더럽게 진짜…….”

한참을 투덜거린 김은아는 구석에 박힌 스미레를 째려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김은아는 결국 신경이 쓰였는지 내팽겨 쳐진 이불을 스미레에게 덮어주었다.

즈으윽.

김은아가 텐트의 지퍼를 내리고 밖으로 나왔다. 새벽의 숲은 신기하게도 특유의 냄새가 있었다. 가슴이 뻥 뚫리는 신선한 공기.

김은아는 허리를 곧게 펴고 숲의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좀 있으면 해가 뜨겠네.’

어림잡아 남은 시각을 계산하면 1시간에서 2시간.

‘……어차피 여울룡은 신유성이 잡겠지?’

그렇게 생각한 김은아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자신은 강하다고, 전기 특성은 대한민국의 제일이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정작 이런 상황에선 도움이 되지 않았다.

속성의 상성.

전기가 통하지 않는 상대니 어쩔 수 없긴 했다. 하지만 김은아는 자신이 핑계를 대고 도망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근데 어쩔 수 없잖아. 전기가 통하지 않는데…….’

인상이 굳은 채로 고민에 빠진 김은아. 그때 텐트의 지퍼가 내려갔다.

즈으윽.

언제 준비를 마쳤는지 텐트에서 걸어 나오는 신유성.

“은아야. 일찍 일어났네?”

“너야말로.”

“이제 슬슬 트랩을 준비할 시간이거든.”

“트랩?”

김은아는 처음 듣는 트랩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신유성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포켓에서 어제 채취해둔 풀과 도구를 꺼냈다.

“이 약초를 돌로 천천히 갈아서 만드는 거야.”

신유성이 꺼낸 약초는 점성초와 스티러스였다.

즈윽! 스윽!

돌로 점성초를 갈자 끈끈한 진액이 나왔고, 그 후 스티러스를 함께 갈자 진액은 회색빛으로 변했다.

“뭐야 이건?”

“여울룡은 아침이 되면 호수에서 나와 가장 큰 바위에 누워.”

“대충 네가 하는 말을 듣긴 했는데…….”

김은아는 신유성이 포탈존에서 했던 말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만약 그 바위에 이 진액을 발라두면 어떻게 될까?”

회색빛의 진액은 바위와 색깔이 비슷하고 끈끈해 보였다. 김은아는 흐음- 하고 생각에 빠지더니 진액을 가까이서 바라봤다.

“……그렇게 덩치가 큰데 효과가 있을까?”

“비늘의 물기가 닿으면 점성초의 접착력은 더 강해지거든. 그리고 부피가 크면 면적도 넓어지니까.”

신유성의 상세한 설명에 김은아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김은아는 신유성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넌 참 대단하네.”

비꼬는 게 아닌 순수한 감탄.

신유성은 F급 특성으로 태어났지만 12년 간 무신산에서 수련에 매진했고, 버림받았지만 포기하지 않았으며, 강한 능력을 가졌음에도 자만하지 않았다.

여울룡을 잡는데도 트랩까지 준비하며 늘 최선을 다하는 게 그 증거.

김은아는 입맛이 씁쓸했다.

‘……생각해보니까. 그 녀석들 말이 다 맞네.’

흘려들었던 누군가의 뒷담처럼.

‘그냥 난 운이 좋았을 뿐이잖아.’

아름다운 외모.

엄청난 배경의 집안.

잠재력이 손에 꼽히는 특성.

생각해보면 김은아는 무엇 하나 스스로 이룬 게 없었다.

‘……괴수를 상대로도 상성 탓이나 하고. ……바보 같아.’

꾸욱.

김은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난…….’

김은아는 약초를 갈고 있는 신유성을 바라봤다. 신유성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노력했고, 자신은 운이 좋았음에도 무언가를 탓하기만 했다. 어쩌면 자신이 오빠를 구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야.”

고민이 깊던 김은아가 신유성을 불렀다. 신유성이 고개를 돌리자 김은아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좀, 그러니까…… 이상한 부탁일수도 있는데…….”

마침 밖으로 나와 눈을 비비며 다가오는 스미레.

“으으움……. 저, 저도, 일어났어요오…….”

김은아는 다가오는 스미레를 확인하고 말을 멈췄다. 신유성은 그런 김은아를 올려다보았다.

“은아야?”

“좀 있다. 말할게.”

김은아는 단둘이 있을 때 말하고 싶은 모양. 어쩔 수 없이 신유성은 진액이 담긴 샘플 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바위를 향해 걸어가 샘플 통을 열었다.

스으윽.

나뭇잎에 진액을 묻혀 커다란 바위에 바르는 신유성.

“이제 해가 뜨기 전에. 모두 몸을 숨기자.”

트랩을 설치한 신유성이 만족을 하지 못하고 풀까지 엮어서 가져오자. 김은아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숨자며? 근데 그건 뭐냐?”

“숨으려면 위장을 해야지. 일단 다들 머리에 진흙부터 바를까?”

신유성은 김은아의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네, 네?! 지, 진흙요?”

“자, 장난이지?”

스미레는 꿀꺽 침을 삼키고 김은아는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신유성은 진지했다.

자신보다 약한 몬스터를 상대할 때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 만반의 준비를 한다. 그게 신유성의 방식이었다.

*     *      *

하늘에 떠오르는 해.

신유성. 김은아. 스미레. 3인의 파티는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처럼 조용한 숲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에 풀을 엮어 두른 김은아는 이미 울상이 되어 있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고.’

물론 김은아가 박박 우긴 덕에 진흙을 바르는 건 피했지만 이미 셋은 자연의 풀숲과 동화되어 버렸다.

점점 흘러가는 시간.

김은아도 점점 따뜻해지는 날씨에 몸이 나른해지고 있을 때 멀리서 소리가 들려왔다.

쿠웅! 쿵!

거대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여울룡이 뭍으로 걸어 나왔다.

“크릉……. 카아아악!”

그리곤 하늘을 바라보며 지르는 정체불명의 포효.

푸드득!

소리에 놀란 새들이 나무에서 모두 날아갔다. 에버라인 산의 제왕. 호수의 주인. 여울룡은 자신에게 붙은 여러 아명들처럼 당당한 걸음으로 바위에 다가갔다.

털썩!

“……크릉?”

그리고 누웠다. 하지만 그건 실수였다. 바위에 발려있는 건 점성초의 진액. 여울룡은 진액이 찐득하게 달라붙자 바위에서 떨어지려 발버둥 쳤다.

쿠웅!

균형을 잃고 바위에서 떨어진 여울룡. 기회를 보던 스미레는 숲속을 향해 크게 소리를 쳤다.

“데스나이트 씨!”

“주, 인님의 명령이시다……. 모두 공, 격해라!”

우르르르!

해골마를 탄 데스나이트와 여러 종류의 해골병사들이 여울룡을 향해 달려 나갔다.

휘리릭!

여울룡을 막기 위해 그물을 던지는 해골병사. 화가 난 여울룡은 거대한 앞발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여울룡의 앞발에 박살이 나며 금방 역소환이 되는 해골병사들. 어차피 해골들은 시간을 끄는 미끼에 불과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김은아와 신유성.

시선이 마주치자 김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고맙다.”

그 후 김은아는 여울룡을 향해 달려 나갔다. 반면 가만히 멈춰있는 신유성. 이건 모두 아까 전에 맺은 약속 때문이었다.

[……야, 유성아. 여울룡은 우리끼리만 잡아도 되냐?]

[네, 네에엣!? 신유성 씨 없이…… 으, 은아 씨와 저, 저희만 말인가요?]

김은아도 자신의 부탁이 억지인 건 알고 있었다. 대련이 아닌 위험한 실전. 정석이라면 신유성의 강함을 이용해 최대한 빠르게 공략에 성공해야 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진지한 김은아의 눈. 김은아에게 지금의 시도는 중요한 도전이었다.

상성을 탓하며 변명한다고.

주어진 상황이 불리하다고 포기한다면 바뀌는 건 없다. 이미 김은아는 너무 많은 상황을 회피해왔다.

이용당하는 게 두려워서.

배신당하는 게 두려워서.

자신의 오빠처럼 마음을 준 사람을 잃게 되는 게 두려워서. 김은아는 사람과의 만남을 피해왔다.

만남이 없으면 이별도 없다.

기쁨이 없으면 상처도 없다.

그래서 여러 가지 변명으로 도망치며 마음에 벽을 쳤다. 하지만 김은아는 신유성을 보며 알게 됐다.

‘……내가.’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바뀌지도 않는다. 그저 가만히 정체될 뿐이다. 고여 버린 물처럼 썩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김은아는 그렇게 되기 싫었다.

김은아는 주변의 기대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도망쳐버린 사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리 피해도. 해결 되는 건 없어.’

지금의 김은아에게 필요한 건 다른 게 아닌 용기. 도전을 하고, 스스로를 바꿀 용기였다. 신유성은 다짐하는 김은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은아 넌 강하구나?”

신유성은 김은아의 눈을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역시 자신의 감은 틀리지 않았다. 김은아는 권왕의 이야기처럼 ‘잠재력이 뛰어난 헌터’였다.

쩌렁!

“크오오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울부짖기 시작하는 여울룡.

짜악! 파지직!

김은아는 박수를 쳐 온몸에 전기를 두르더니 자신감 여유 넘치는 미소로 신유성에게 답했다.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타닥!

그 말과 함께 김은아가 달려 나갔다. 상성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 하지만 신유성은 자리에 곧게 선 채, 가만히 공략을 지켜봤다.

신유성은 파티원을 믿었고,

김은아는 어느 때보다 자신이 바뀌길 원했다. 그러니 공략의 효율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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