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뭐어어어!!?”
쩌렁쩌렁.
숲을 가로지르는 김은아의 목소리.
“야! 테, 텐트는 네가 준비한다며! 근데 하나만 준비하면 어떻게 해!?”
당황한 김은아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신유성은 차분했다.
“이 텐트 4인용이니까. 충분해.”
“누, 누가 크기 말했어!? 텐트가 하나면……. 가, 같이 자야 하잖아!”
말까지 더듬으며 열변을 토하는 김은아.
“그게 이상해?”
하지만 신유성은 여전히 김은아의 행동이 의아한 모양이었다. 텐트가 여러 개면 괜찮고, 하나는 절대 안 된다니. 무신산에서 살아온 신유성의 상식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연히 이상하지! 엄청 이상하다고! 어, 어떻게 여자랑…… 남자가 가, 같은 곳에서 자!?”
“……하지만. 습격에 대비해서 모여 있는 편이 전술적으로 유리해.”
“몰라 그딴 거!”
“대체 왜 그렇게까지 같이 자는 걸. 싫어하는 거야?”
신유성의 순수한 질문에 죽일 듯 노려보던 김은아의 얼굴은 점점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 그건 당연히……. 네, 네가 이, 이상한 짓을 할 수도…….”
고개를 숙인 김은아가 창피함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자. 옆에 있던 스미레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에요! 시, 신유성 씨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하실 분이 아니에요!”
모처럼 용기를 내어 스미레가 큰소리를 치자. 김은아는 스미레를 향해 인상을 썼다.
“……뭐?”
“히, 히익!”
스미레의 짧은 반항은 그걸로 끝.
김은아는 못 미덥다는 시선으로 텐트안의 신유성을 훑어보았다.
‘아무리 여자를 모른다지만…….’
물론 스미레의 말처럼 김은아도 어느 정도는 신유성을 믿었다.
‘뭐…… 그런 짓을 할 녀석은 아니지만도…….’
하지만 이런 쪽으로 김은아의 가치관은 제법 가드가 단단했다. 텐트는 밀폐된 공간. 작은 숨소리도 공유되는 좁은 장소에서 만약 몸이라도 닿는다면?
‘미, 미친!’
김은아는 생각만으로 또 다시 귀가 달아올랐다.
“여,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난 인정 못해!”
김은아의 단호함에 신유성은 곤란한 듯 고민에 빠지더니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가 밖에서 자도록 할게.”
신유성이 담담하게 일어나자. 김은아는 어어- 하고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야! 그, 그건 아니고. 좀 기다려봐! 방법이…….”
“괜찮아. 밖에서 지내는 건 익숙하거든.”
신유성의 대답에 스미레는 나름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 흐으…… 그, 그렇지만 이건 신유성 씨가 가져온 텐트고…….”
울상이 된 얼굴로 김은아를 바로보는 스미레. 순식간에 죄인이 된 김은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내가 그냥 잔다! 자!”
김은아는 신유성을 경계하며 텐트 안으로 들어오더니 주춤주춤 물건들을 꺼내놓았다.
그러던 김은아는 뭔가 미심쩍다는 얼굴로 스미레와 신유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자 타고난 특유의 촉이 김은아에게 무언가 위험하다는 걸 일러주었다.
“……잠깐. 자리는 내가 중간으로 할래.”
김은아는 신유성과 스미레를 붙여두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번에도 순전히 촉. 이유는 없었다.
“좋아.”
흔쾌히 답한 신유성이 구석으로 짐을 옮길 동안. 스미레는 데스나이트를 소환해 캠프 밖에 보초를 세워두었다.
“데, 데스나이트 씨! 오늘도 잘 부탁드릴게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주, 인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김은아는 스미레에게 맹세하는 데스나이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쯧, 아까도 죽더니.”
준비는 마쳤지만 잠에 들기엔 이른 시각. 신유성은 텐트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며 둘에게 말했다.
“그럼 준비도 마쳤으니.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네, 넷!”
힘차게 답한 스미레는 신유성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다.
‘……수련하시러 가시는구나.’
스미레는 멀어지는 신유성을 보며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테마파크에서 본 결과 신유성은 이 시간이 되면 밖을 나가 수련을 했다.
이미 신유성에게 수련은 삶의 일부분. 스미레는 신유성이 그 과정까지 얼마나 괴로웠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여, 역시 신유성 씨는…… 정말. 정말로 대단하셔.’
흐뭇한 얼굴의 스미레와 달리. 김은아는 살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 잘됐네.”
그 말과 함께 갑자기 외투를 옆에 놓고, 티셔츠까지 벗어재끼는 김은아. 스미레는 눈이 커졌다.
“……으, 은아 씨?”
“뭘 그렇게 놀라? 옷 갈아입는 거 처음 봐?”
김은아가 꺼낸 건 범고래가 그려진 귀여운 잠옷. 김은아는 보기보다 섬세했다. 매일 즐기는 6시의 티타임과 잠들기 전 잠옷으로 갈아입는 일은 어지간하면 어기지 않을 정도.
‘……귀, 귀엽다.’
스미레는 차마 입 밖으로 뱉진 못했지만 잠옷을 입은 김은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글쎄 뭘 그렇게 빤히 보냐니까?”
“네? 아, 아뇨! 너무 잘 어울리셔서요.”
스미레도 해골이 그려진 잠옷을 꺼내 갈아입자. 김은아는 어슬렁거리며 텐트의 입구로 다가갔다.
턱.
김은아는 양반다리로 입구에 앉더니 멍하니 달을 바라봤다.
“참 공기 좋네.”
김은아의 뜬금없는 이야기에 스미레는 옆으로 다가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네요. 달도 참 밝아요.”
갑자기 피식 웃는 김은아.
턱.
손을 뒤로 뻗어 땅을 지탱하더니 김은아는 달을 바라본 채 스미레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넌 어쩌다가 일본에서 여기까지 오게 됐냐?”
“아. 그, 그건…….”
말을 하려던 스미레가 입을 다물자. 김은아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하아암. 됐어. 걍 물어본 거니까. 대답하기 불편하면 하지 마.”
“그…… 제, 제 실수로 반 전체가 다쳤거든요.”
“너 때문에?”
김은아가 의외라는 듯 되묻자. 스미레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 전체가 견학을 갔는데. 던전에서…… 제 능력이 폭주했어요.”
한국에 오기 1년 전.
스미레에겐 씁쓸한 사고였다. 스킬로 언데드를 컨트롤 하던 도중 스미레는 능력이 폭주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스미레가 능력의 범주를 벗어나 욕심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스미레의 주 무대인 언데드 던전에서 자신도 남들에게 활약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스미레의 능력은 던전 전체의 언데드를 불러 모았으나, 스미레는 언데드를 통제하지 못했다.
결국 현역 헌터들이 도착 했을 때 멀쩡했던 사람은 오직 스미레뿐.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언데드들은 정신을 잃은 스미레를 소중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결국 지도 교사를 비롯한 30명의 부상. 다행이도 사망자는 없었지만 그날 이후 스미레는 급격히 어두워져갔다.
없었던 말수는 더욱 줄었고, 학교의 인원들은 스미레를 두려워하거나 꺼려했다.
“다, 다들…… 저를 피하더라고요. 이, 이해해요. 누구나 자신을 다치게 만든 상대는 싫으니까…….”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계속 일본에서 버티는 건 유약한 스미레의 성격상 불가능했다.
“……결국 도망친 거죠.”
관계를 회복할 용기가 없으니 도망쳤다. 그 사실을 말하며 스미레가 씁쓸하게 웃자. 김은아는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냐.”
스미레는 그런 김은아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눈이 커졌다.
“저, 으, 은아 씨?”
고개를 돌려 스미레를 바라보는 김은아. 스미레는 김은아의 어깨를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 어깨에 지네가…….”
자신의 어깨를 확인한 김은아는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끄야아악!!”
울먹이며 도망치는 김은아.
웃으며 지네를 치워주는 스미레.
둘의 사이는 알게 모르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어두운 숲.
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신유성은 자세를 잡았다. 몸 안 깊은 곳에서 시작되어 계속해서 퍼져나가는 마나의 운용.
사아악!
숲에 불어온 한 줄기 바람은 나무를 흔들고 풀들을 춤추게 만들었다.
신유성은 정갈한 호흡을 유지하며 천천히 기다렸다.
‘지금이다.’
그리고 필요한 순간 터트렸다.
츠츠츳!
몸 밖으로 퍼져가는 푸른빛.
마나로 정제된 강기가 신유성을 지키기 위해 뿜어져 나왔다.
츠으읏
투신류 4장 흑룡강신(黑龍强身)
신유성의 몸에서 나온 강기가 검게 물들며 몸을 휘감았다. 지금까지 신유성이 한 번도 닿을 수 없었던 단계였다. 그야말로 엄청난 성장.
‘마나의 감각에 집중해야 해…….’
하지만 아직 신유성은 흑룡강신을 자유롭게 유지하진 못했다.
팟!
몸을 감았던 검은색 기운이 흩어지고 흑룡강신이 해제되자. 신유성은 숨을 고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문제는 시간인가.’
분한 듯 주먹을 쥐는 신유성.
이대로 수련에 매진하면 4장을 충분히 익힐 수 있었지만 선발전까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신유성은 다급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파티원과 함께하며 신유성은 깨달았다.
권왕이 강조했던 여유로움과 휴식의 중요함.
그건 늘 마음에 조급함과 다급함을 가지고 있던 신유성을 위한 최고의 충고였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
그 덕분인지 미소를 지은 신유성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