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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54/434)

제54화

산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득한 높이의 정상. 스미레는 녹색으로 물든 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여, 여긴…….”

“위치를 파악하란 건가? 뭐, 시작 장소로는 괜찮네.”

김은아의 말처럼 정상으로 도착지를 정한 이유는 지형을 파악하라는 메이린의 배려였다.

에버라인 산에서 보이는 호수는 총 3개. 모두 크기가 거대했고 깊이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근데 호수가 3개나 되는데 여울룡이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아?”

김은아의 질문.

신유성은 각각의 호수를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제일 처음은 여울룡의 서식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해.”

“흐, 흩어져야 하는 거군요?”

스미레는 신유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스미레의 솔직한 마음으로는 신유성과 함께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시간제한이 걸린 실전. 스미레는 주먹을 꽉- 쥐며 다짐했다.

‘하, 할 수 있어!’

김은아는 그런 스미레를 실눈으로 흘기더니 귀찮다는 얼굴로 말했다.

“난 걍 저기 같은데? 중간에 있는 호수.”

김은아는 뭔가 촉이 온 모양.

스미레는 남은 왼쪽을 택했다.

“그, 그럼 제가 왼쪽을…….”

이제 남은 곳은 오른쪽의 호수.

신유성은 고개를 끄덕이곤 3개의 호수가 만나는 지점을 야영지로 선택했다.

“미리 장소를 정해둬야 길을 잃지 않을 거야. ……그리고 포켓으로 좌표를 공유하고 연락도 할 수 있으니까. 여울룡을 발견하면 즉시 팀원에게 보고해줘.”

신유성의 설명에 스미레는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그럼! 야영지까진 같이 걸어가도 되는 거네요?”

“그렇지.”

어쩐지 기뻐 보이는 스미레.

신유성과 스미레가 야영지까지 앞장을 서자. 김은아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뒤를 따라 걸었다.

‘……산이라 그런지 엄청 습하네.’

물론 공기는 좋았지만 김은아는 에버라인 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도 늘 리무진을 타고, 공주 같은 대접을 받은 김은아에게 야생은 거리가 멀었다.

‘……쟤는 산에서 12년을 살았다니. 대체 어떻게 버틴 거야?’

김은아는 걸어가는 신유성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반면 김은아에겐 관심을 주지 않고 스미레와 대화를 하는 신유성.

“스미레. 포켓에 뭘 가져 온 거야? 검사를 엄청 오래하던데?”

“아! 그, 조리 기구랑 식재료들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배가 고프실 테니까…….”

스미레가 부끄러운 듯 웃으며 말을 하자. 김은아는 흠- 하고 둘을 바라봤다.

‘엄청 친해 보이네. ……뭐, 나랑은 상관없지만.’

김은아가 고개를 돌린 사이.

신유성은 진지한 얼굴로 스미레의 포켓을 주시하며 생각했다.

‘야생 동물은 안 잡아도 되겠군.’

금욕의 식생활을 해온 신유성에게 맛있는 음식의 가치는 컸다.

신유성의 조리 솜씨는 야생동물이나 버섯을 구워먹는 정도. 이번 숙영에는 스미레가 함께해서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다.’

요리에는 재능이 없는 신유성에게 스미레는 든든한 멤버. 그렇게 신유성과 스미레가 훈훈한 분위기를 풍기며 걷고 있을 때, 김은아가 몸을 움찔거렸다.

‘……왜 이렇게 몸이 간지럽지?’

일부러 옷을 두껍게 입었는데도 느껴지는 이질감. 어깨 쪽을 쓸어내리던 김은아는 하얀 손을 자신의 목으로 가져갔다.

터억.

“……어?”

김은아의 손에 닿은 건 갑각류의 몸처럼 단단한 외피. 심지어 정체모를 무언가는 김은아의 손을 벗어나려고 여러 개의 발을 꼼지락거렸다.

“히아악!!”

질겁한 김은아가 손을 뿌리쳤다. 김은아의 손에 머물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노란색의 왕지네.

“지, 지네! 지네! 지네! 야!! 여기 지네에에!!”

놀란 김은아는 울먹이듯 소리치며 땅에 떨어진 지네에게 전기를 난사했다.

파지직! 콰아앙!

갑자기 펼쳐진 혼돈의 상황.

스미레는 다급하게 정신이 나간 김은아를 말렸다.

“히, 히익! 은아 씨! 잠깐만요!”

“윽! 지, 지네가! 내 목에서 파스슷! 흐익!”

기괴한 김은아의 언어.

김은아는 소름 끼친다는 듯 몸을 떨었다. 평소의 김은아는 4급 보스도 무서워하지 않았지만 지네는 예외였다. 발이 많은 곤충은 김은아에게 공포였다.

팟- 파스스스!!

위험을 느끼고 도망치는 왕지네.

스미레는 놀란 김은아를 안정시키려 다독였다.

“지, 진정하세요! 그냥, 평범한 지네에요!”

“야! 어떻게 진정해!? 넌 저게 안 징그러워?”

김은아는 좀처럼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하지만 스미레는 담담하게 답했다.

“지, 지네는 평소에도 자주 보지 않나요?”

의외로 멀쩡한 스미레.

이미 온갖 곤충을 보며 자란 스미레에게 지네 정도는 아무런 데미지도 없었다.

“뭐!? 뭔 소리야! 평소에 지네를 어디서 봐!”

반면 질색을 하는 김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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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반대의 인생을 살아온 김은아와 스미레에겐 서로 지네의 파급력이 많이 달랐다.

“……으으 그렇게 큰 벌레라니. 빨리 돌아가든가 해야지.”

김은아가 소름끼친다며 팔뚝을 문지르고 있을 때, 신유성은 걸음을 멈췄다.

“여기를 야영지로 정하자.”

사아아.

바람이 부는 평평한 땅.

신유성이 고른 야영지는 비교적 숙영에 적합해 보였다.

“그럼……. 준비는 제가!”

스미레는 포켓에서 소중하게 반지와 신유성의 머리카락을 꺼냈다. 아무래도 스미레는 언데드들에게 숙영의 준비를 시킬 모양.

김은아는 겉옷의 지퍼를 내려 벗더니. 겉옷을 야영지의 나무에 걸고 호수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난 바로 출발한다? 뭔가 지금 느낌이 좋아.”

그렇게 말한 김은아는 모처럼 의욕적인 얼굴로 호수를 향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     *      *

학원지부. 협회의 회의실.

관리자인 메이린은 중앙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앉아 세부사항을 보고 받고 있었다.

“관리자님. A-11 포탈은 전부 공략이 끝났습니다.”

“……5급 헌터를 보내길 잘했군요.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좋습니다. 다음.”

메이린은 일사천리로 회의를 진행했다. 메이린의 완벽한 일처리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그녀가 학원 도시를 맡게 된 이유였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관계자 중 한명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 확실하진 않지만 오늘 학생들이 들어간 A-32 건에 관해서 드릴 보고가 있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정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죠?”

무표정한 메이린의 눈이 가늘어지자. 관계자는 홀로그램으로 문서를 띄웠다.

“이건 에버라인의 토양을 조사한 결과입니다만…… 검사로 나온 비늘의 성분이 여울룡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땅에 떨어진 비늘을 채취했다면 당연히 오차 범위는 있기 마련 아닌가요?”

메이린의 질문에 관계자는 긴장한 듯 땀을 흘렸다.

“그, 그렇게 치부하기엔 너무 큰 차이라…… 제 생각에는…… 이번에 등장한 여울룡은 아종의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아종이라.”

메이린은 의견을 묻고 싶었는지 그 옆에 있는 연구원에게 눈을 흘겼다. 연구원은 자신의 안경을 만지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울룡의 아종이 등장할 확률은 약 0.03 퍼센트에 불과합니다. 이번에 조사로 나온 오차 범위를 생각하면 훨씬 낮은 수치죠.”

“그,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학생들이 공략에 들어갔는데…… 아종이 나오기라도 하면!”

연구원과 관계자의 대립.

메이린은 홀로그램을 유심하게 훑어보았다.A-32번 포탈에 들어간 건 신유성. 김은아. 스미레.

‘……아종이라.’

메이린은 신유성이 보여준 활약을 떠올리며 미약하게 웃었다.

“됐습니다. 공략은 그대로 진행하죠. 아종이 나오더라도 A-32에 투입된 전력은 충분합니다.”

메이린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 그녀의 진급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건 다름 아닌 눈썰미였다.

덕분에 메이린이 가장 자신 있는 일도 사람의 가치를 파악하는 일.

‘아종이든 뭐든. 절대 4급 보스 따위한테 질 학생이 아니야.’

학원지부의 관리자인 메이린은 신유성의 가치를 누구보다 높게 치고 있었다.

*     *      *

나무들이 울창한 에버라인의 숲.

햇빛이 나뭇잎을 거쳐 초록색으로 변한 몽환적인 풍경에 김은아는 감탄했다.

“……오, 쩌네. 진짜 뭔가 나오긴 나오나보다.”

호수를 향해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추워지는 기분. 김은아는 괜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여긴 뭐 이렇게 음산하냐?”

-게에에에!

그때 처음 듣는 울음소리가 호수에서 숲으로 울려 퍼졌다. 마치 고래 울음소리 같은 정체불명의 소리. 김은아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몸을 낮췄다.

‘……이, 이거 설마?’

소리의 진원지로 천천히 다가가는 김은아. 생각해보면 김은아의 감은 이상할 정도로 잘 맞았다.

빼꼼.

조심스럽게 수풀 너머로 고개를 내미는 김은아. 처음 보인 건 아까 보았던 거대한 호수였고, 그 근처에는 거대한 크기의 생물체가 정체불명의 고기를 뜯어 먹고 있었다.

“카작! 크자악!”

거대한 이빨.

노란색 비늘로 덮인 몸.

뱀과 도마뱀을 섞은 마치 용과 같은 형상.

‘여울룡이다!’

김은아는 단번에 괴수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뭔가 느낌이 오더라니까!?’

우연인지 운명인지는 모르지만 역시 오늘도 김은아의 감은 특별했다. 평소에는 육지에서 사냥을 하지 않는 여울룡이 물 밖에서 고기를 뜯는 건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

거기다 김은아는 몰랐지만 여울룡은 원래의 색깔인 푸른 빛 대신 노란 빛을 띠고 있었다. 즉 확률이 0.03%에 해당하는 아종이었다.

당황한 김은아는 오타도 무시하고 스미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KimSilverA: ㅅ ㅗㄱ보! 속보! ㄴㅐ 가 있는 곳에 여울룡!]

[すみれ: ʕ•̀ o •́ʔ !!]

[すみれ: ᕕ༼✿•̀︿•́༽ᕗ]

일본어와 이모티콘으로 이루어진 스미레의 메시지. 김은아는 이마에 손을 대고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오고 있는 거. 맞겠지?”

이제 다음은 신유성의 차례.

김은아는 다시 열중해서 메시지를 입력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크릉……. 그르…….”

귓가에서 들리는 소리에 메시지를 입력하던 김은아의 손이 멈췄다.

“크르르…….”

시야의 옆에서 새어나오는 무언가의 입김.

“……이건 어쩔 수 없네.”

김은아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손에 전기를 피웠다.

“혼자 잡아야지. 뭐 어쩌겠냐?”

파앗!

김은아가 몸을 돌리자.

여울룡은 이를 드러내고 대치했다.

“……크륵.”

에버라인 산의 지배자.

4급 보스인 여울룡의 아종.

그리고 가온 아카데미의 학년 랭킹 2위. 김은아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물 도마뱀 주제에. 어디 이를 드러내?”

이곳은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야생.

이제 둘에게 남은 것은 누가 더 강한지를 겨루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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