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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53/434)

제53화

깔끔하게 정돈된 스미레의 방.

에이미는 가볍게 주변을 훑어보더니 흐응- 하고 소리를 냈다.

“세븐넘버의 방인데 단출한걸? 모처럼 넓은 방인데~ 이것저것 가져오는 게 좋았을 텐데.”

스미레는 에이미의 말에 세차게 손을 저었다.

“아, 아뇨……. 이 정도면 정말 충분해요! TV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정수기에선 얼음도 나오고…….”

어린 시절 스미레의 가난했던 생활에 비교하면 가온의 시설은 천국이었다.

“아, 그리고 온수도 나와요! 생각해보면…… 어릴 때는 겨울에 하는 목욕이 제일 무서웠는데……. 정말 잘된 일이에요.”

음산한 기운을 풍기며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스미레. 비교적 부유하게 살아온 에이미는 스미레가 겪은 경험이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오, 온수? 대, 대체…… 무슨 삶을 살아온 거야.”

스미레가 가진 [수도세를 3개월 미납해 물이 끊겼을 땐 고무 대야에 빗물을 받아둔다.] [폐지는 비 오는 날에 팔아야 값을 더 받는다.] 같은 생활의 지혜는 아마 에이미에겐 평생 알 수 없는 정보.

“아, 그, 그래도 정말 괜찮아요! 어차피 엄청 어렸을 때 일이고 일본에서도……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선 밥 굶는 일은 없었어요.”

“어어……. 그, 그랬구나.”

긍정적인 에이미의 분위기로도 당해낼 수 없는 스미레의 부정적인 오오라.

“그러고 보니…… 오키나와에 살 땐 집이 바다 근처라. 방학 때는 물고기도 잡아서 좋았어요. 물론 낚시하다가 물에 빠지고, 친구들이 비린내가 난다고 놀리긴 했지만…….”

계속해서 중얼중얼 이어지는 스미레의 혼잣말. 에이미는 자신도 모르게 동정 어린 시선으로 스미레를 바라봤다.

‘……이, 이거 뭐지. 뭐라도 해주고 싶은 이 기분?’

측은한 에이미의 눈빛에 스미레는 그제야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그래도! 이, 이젠 괜찮아요! 세븐 넘버가 되어서 지, 지원금도 나오고! 덕분에 가족들한테도 생활비를 보내주고 있으니까요! ……정말 다행이에요.”

“……그, 그래? 그렇구나. 그건 참 다행이네.”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는 에이미.

어쩐지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에이미는 다시 텐션을 올렸다.

“아! 맞다! 1박 2일 스케줄은 처음이라고 했지? 햐~ 내가 이런 건 또 전문이지!”

에이미는 스미레가 준비해둔 물건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마나로 작동하는 조리기구.

칫솔과 같은 위생용품에서 식재료와 간식에 이르기까지 스미레는 잔뜩 물건을 챙겨놓은 상태였다.

“오, 제법인데? 사실 맨몸으로 가는 사람도 있으니까! 이 정도면 충분해!”

“아,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스미레.

에이미는 싱글싱글 웃으며 스미레의 배를 애교스럽게 콕 찔렀다.

“에이~ 파티원끼리 이 정도로 무슨. 아, 근데 너 설마…….”

말을 하던 에이미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의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또 그때 입었던 낡은 원피스로 가려는 건 아니지? 내가 있는 이상 그건 절대 안 돼! 요새는 헌터들도 이미지 메이킹이 중요하다고!”

“네, 네!? 아, 그 원피스……. 확실히 낡긴 했죠? 어머니께서 입으시던…… 옷이라.”

스미레가 부끄럽다는 듯 멋쩍게 웃자. 에이미는 스미레의 시선을 피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으, 으응!? 내가 나, 낡았다고 했나? 고, 고풍스럽다는 걸 잘못 말했나본데!?”

“……아, 아니에요. 옷에 관해선 관심도 없었고. 그렇게 억지로…… 말씀해주시지 않아도…….”

스미레가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시도했지만 점점 꼬여가는 상황. 에이미는 멋쩍게 웃었다.

“아, 아하하……. 마, 맞아! 그, 그럼 어때!? 옷 같은 거야 내가 골라주면 되잖아. 안 그래!?”

“……에, 에이미 씨가 직접요? 그, 그래도 딱히 옷에는……. 저는 꾸며봤자 에이미 씨처럼 별로 예쁘지도 않고…….”

중얼중얼.

평소처럼 땅을 파고 들어가는 스미레. 에이미는 안 되겠다는 듯 스미레의 손을 잡았다.

“아이! 됐어! 자! 얼른 따라와! 내가 사줄 테니까!”

“……에, 에이미 씨?”

에이미가 덜컥 손을 잡자. 잡힌 손을 보며 볼이 붉어지는 스미레.

“부담 가지지 마~ 나도 입어보고 싶었는데. 전부 너 정도는 나와야. 어울리는 옷이야!”

지금 에이미가 하는 말에 담긴 뜻을 스미레는 아직 알지 못했다.

*     *      *

헌터 협회 학원도시 지부.

최첨단의 기술로 이루어진 시설 앞에 기다란 리무진이 멈춰 섰다. 신유성은 이제 눈에 익었는지 리무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왔군.’

아니나 다를까 운전기사가 정중하게 문을 열어주자. 리무진에선 김은아가 걸어 나왔다.

“……흠.”

멀리서 신유성을 바라보는 김은아. 입구까지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도 경호원들은 양산까지 씌워주며 김은아를 극빈하게 모셨다.

마치 공주님과 같은 대접.

건물의 입구에 도착하자 김은아는 손동작 하나로 경호원을 물러나게 했다.

“야, 이번엔 안 늦었다?”

피식 웃더니 선글라스를 내리며 말을 거는 김은아. 스미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 신유성 씨? 저, 저분은 ……A반의?”

갑작스러운 김은아의 출현. 당황한 스미레에게 신유성은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놀랐지 스미레? 내가 말한 새로운 파티원이야.”

“A반의…….”

절로 압도되는 A반 반장의 위용.

버릇이 든 스미레는 자신도 모르게 신유성의 옷을 붙잡고 있었지만. 정작 김은아는 스미레 따윈 안중에도 없어보였다.

“쯧, 이렇게 좋은 날. 던전 공략이라니…….”

스미레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김은아. 스미레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자. 김은아는 그런 스미레를 못 마땅하게 바라봤다.

“……근데 얘는 옷차림이 왜 이러냐? 뭐 어디 소풍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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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엔 스미레가 입지 않는 도전적인 옷차림. 스미레는 김은아의 말에 풀이 죽었다.

“그, 그렇죠? 역시…… 저한테 이런 옷은 어울리지 않죠? 그래서 저도 거절했는데…….”

기가 죽은 스미레가 점점 어두운 기운을 풍겨내자. 김은아는 어쩐 일인지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아, 아니 그런 말은 아니고…….”

김은아는 유독 밝은 에이미의 페이스에 말린 전적이 있었다. 스미레는 그런 에이미의 정반대 포지션. 땅을 파는 스미레의 모습에 김은아는 신유성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얘 좀 처리해!’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 신유성은 스미레를 칭찬했다.

“아니 스미레. 충분히 잘 어울려.”

화악-

얼굴이 붉어지며 조용해진 스미레.

‘시, 신유성 씨가. 나에게 귀, 귀엽다고…….’

스미레가 없는 사실까지 붙여가며 망상을 하고 있을 때, 차이나 드레스를 입은 메이린이 고고한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안내를 맡게 된 메이린입니다.”

메이린의 단조로운 인사.

“이 사람…… 관리자잖아?”

김은아는 메이린과 안면이 있는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은아의 생각처럼 지부의 관리자인 메이린이 직접 안내를 맡는 건 이례적이었다. 메이린은 김은아를 보며 무뚝뚝한 얼굴로 답했다.

“신유성 학생은 협회장님께서 안내를 부탁하셨습니다.”

협회장 강유찬.

그의 이름에 김은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할아버지 친구잖아? 하긴, 그 정도 급이 부탁했으면 관리자가 직접 나와야지.”

시시각각 굳어가는 메이린의 표정.

헌터 중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의 메이린이 17살 학생에게 이런 취급을 받은 건 김은아가 처음이었다.

‘……참 건방진 꼬맹이군.’

하지만 신유성은 강유찬이 부탁한 손님이었고, 김은아는 신성그룹 회장의 외손녀. 메이린은 평소처럼 표정을 숨겼다.

“맞습니다. 그럼 바로 포탈룸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비용은 전액 무료입니다.”

메이린은 일행의 앞에서 모델 같은 워킹으로 안내를 시작했다.

“장소는 A-32로 지정해. 왕복이니까 휴대용 좌표기도 준비해.”

관계자들을 지나치며 자연스럽게 오더를 내리는 메이린.

고오오-

웅장한 소리를 내는 푸른빛의 포탈 앞에서 메이린은 여울룡에 관한 설명을 시작했다.

“목표물인 여울룡은 에버라인 산의 가장 큰 호수에 있습니다. 수중에서 호흡이 가능해. 대부분의 시간을 잠수한 채로 지내죠.”

신유성은 메이린의 설명을 도중에 막았다.

“하지만 해가 뜨는 시각에는 꼭 물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까?”

메이린은 신유성의 답변에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맞습니다. 역시 보스에 대해서 박식하시군요. 그럼 물 밖으로 나온 여울룡이 어디로 향하는 지도 알고 계시겠군요?”

“……그건 호수에서 가장 가까운 바위 아닌가요?”

신유성의 즉답은 정답이었다.

여울룡은 해가 뜨면 거대한 바위에 몸을 눕힌다. 그건 여울룡의 비늘이 태양열을 에너지로 바꾸는 특이한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무신산에서 배운 건가? 그래도 학생이 그것까지 알다니. 재미있군.’

메이린은 굳었던 표정을 풀고 은은하게 웃었다.

“……놀랍군요. 워낙 희귀한 개체라 정보도 없었을 텐데.”

신유성은 이미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마쳤다. 어울룡의 처치를 위해 헌터 용품으로 덫까지 준비한 상황.

“좋습니다. 그럼 바로 전송을 시작하도록 하죠. 명심해주세요. 이틀이 지나면 처치에 실패하시더라도 복귀하셔야 합니다.”

메이린의 말투는 여전히 딱딱하지만 표정에는 아주 약간의 호감이 서려 있었다. 관리자의 준비성이 좋은 헌터는 언제나 플러스 요소였다.

“그럼 A-32로 전송을 시작하겠습니다. ……모쪼록 공략이 성공하시길 기도하죠.”

메이린의 말과 함께 포탈이 작동을 시작했다. 파도처럼 일렁거리는 푸른 빛.

‘……내가 강해졌다는 걸. 보여 드릴 거야!’

스미레는 각오를 불태우며 다짐했고, 김은아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뭐, 물 속성 4급 보스야. 껌이지.”

파티장인 신유성은 담담했다.

이건 협회장인 강유찬이 처음으로 신유성에게 직접 내려준 임무. 실패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공략을 끝낸다.’

각자의 다짐을 마친 일행은 여울룡 퇴치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포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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