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안개의 숲]
절망의 묘지 근처는 원래 전부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유독 안개가 많이 낀 장소를 헌터들은 안개의 숲이라 불렀다.
‘……듀라한도 이곳을 배회하고 있겠지.’
듀라한은 서식지가 정해지지 않고 계속 숲을 배회하기 때문에 마주치기 힘든 보스였다.
거기다 듀라한은 격투 타입인 신유성에겐 최악의 상대나 다름없는 언데드 몬스터.
‘지금처럼 기록을 세울 때는 최악의 보스지.’
그러나 신유성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젊은 시절 권왕이 사용했던 옷. 흑룡포를 보상으로 받으려면 꼭 절망의 묘지를 공략해야 했다.
다행인 점은 보스인 듀라한이 돌아다니는 이상. 다른 데스나이트는 안개의 숲에 나타나지 않았다.
‘……거기다 안개의 숲에는 생명체가 살지 않아.’
지금 안개의 숲에 있는 건 신유성과 듀라한. 단 둘뿐이었다.
‘그러니 찾을 수 있어.’
신유성은 바닥에 손을 짚었다. 듀라한이 타고 다니는 해골마는 거대했지만 커다란 숲에서 말발굽의 진동을 느끼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신유성에게는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듀라한을 찾기 위해 신유성은 손끝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평소에는 수련의 버릇이 남아 특성인 [집중력 강화]를 자연스럽게 사용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감각을 최대한으로…….’
숲의 호흡.
손을 스치는 바람.
그리고 대지의 울림이 느껴졌다.
다그다- 다닥! 다그닥-
거대한 무언가가 바닥의 돌을 차고 부드러운 흙을 밟으며 걷는 미세한 진동. 신유성은 어딘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찾았다.’
* * *
아름답게 세공되어 언제까지 녹지 않는 얼음성. 아델라는 무감한 표정으로 앞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아델라가 지나간 자리에는 원래는 몬스터였던 존재들이 꽝꽝 얼려져 얼음 동상으로 변해 있었다.
[아스텔라 얼음성]
학원 도시에서 가장 관리를 꺼려하는 던전. 물론 등장하는 몬스터의 강함은 다른 던전과 비슷하지만 문제는 보스가 머무는 구조물이었다.
쿠웅- 끼익!
아델라가 얼음으로 이루어 진 문을 손끝으로 밀자. 곧 내부가 드러났다. 천장을 향해 끝없이 나선으로 이어진 계단. 무수한 트랩.
뻥 뚫린 천장에서는 얼음으로 이루어진 궁수들이 대형을 이뤄 아델라에게 활을 겨누고 있었다.
마치 요새와 같은 던전.
아델라는 느릿한 시선으로 계단과 궁수를 번갈아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 눈. 온몸이 얼음으로 이루어진 마녀보다도 아델라의 시선은 더욱 차가워보였다.
‘계단인가.’
아델라가 몸을 숙였다. 그녀는 던전이 만들어둔 길로 향하지 않았다. 그저 정신을 집중해 양쪽 다리에 마나를 부여했다.
쐐액!
얼음궁수가 쏜 화살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아델라는 자리를 박차고 도약했다.
탓!
천장까지 약 절반의 거리를 한 번의 점프로 도달한 아델라. 따로 몸을 단련한 적이 없는 아델라는 일반인과 신체능력이 거의 같았다.
지금 보여준 것은 순전히 아델라가 가진 마나의 힘이었다.
파파팟!
화살은 땅에 꽂혔고, 공중에 뜬 아델라의 발밑에 얼음으로 된 발판이 생겼다.
탁.
아델라는 당연한 듯 얼음 발판에 착지했다. 아래에는 아득한 풍경이 있었지만 아델라는 멈추지 않고 허공을 향해 발을 뻗었다.
타악. 저벅.
아델라가 느릿하게 걸을 때마다 발밑에는 얼음으로 된 계단이 생겨났다. 얼음 마녀에게 아델라는 지금껏 본 적 없는 상대였다.
“쏘아라! 당장 떨어트려!”
흰색 눈썹. 얼음으로 이루어진 몸.
얼음마녀의 날카로운 고성이 쩌렁하자. 얼음궁수들은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쐐애액!
쏟아지는 얼음화살들은 아델라의 걸음을 막지 못했다.
쩍! 쩌저저적!
아델라의 주변에 뿜어진 지독한 한기는 얼음조차 동결시켜버렸다. 날렵했던 화살은 돌덩이처럼 두꺼운 얼음으로 변했다.
그리고 아득한 아래로 얼음들이 떨어졌다.
“떨어져!”
얼음마녀가 소리쳤다. 아델라는 얼음마녀의 목소리가 시끄러웠는지 포켓의 번역 기능을 꺼버렸다.
“■■■!”
천장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얼음.
아델라는 퍼붓듯 쏟아지는 공격에도 상처 하나 생기지 않았다.
휙-
천장에 도착한 아델라가 손을 휘둘렀다. 마치 지휘자와 같은 몸짓. 아델라의 몸에서 뿜어진 마나는 푸르게 응고되더니. 10개체도 넘는 얼음궁수의 머리를 정확하게 박살냈다.
챙! 쩌억! 쨍그랑!
자신이 만든 얼음 궁수들이 단번에 박살이 나자. 얼음 마녀는 직접 지팡이를 들고 일어났다.
얼음마녀의 강함은 4급 보스 중에서도 상격. 거기다 마나를 사용해 까다로운 얼음 마법을 다중으로 시전 할 수 있었다.
“■■■■!”
정체불명의 언어와 함께 얼음 마녀의 주위에 냉기의 창이 만들어졌다.
쿵!
얼음 마녀가 지팡이로 바닥을 내려치자. 냉기의 창이 아델라에게 쏘아졌다.
쐐애애액!
헌터로 치면 필살기에 해당하는 스킬. 아델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했다.
‘이번에도 역시…….’
아델라는 던전의 공략도, 아카데미의 대련도 무엇 하나 흥미롭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말해주었던 헌터의 세계와 아델라가 겪는 경험은 달랐다. 그녀는 너무 강했으니까.
팟! 파파파팟!
아델라가 손을 뻗자 냉기의 창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
얼음마녀가 알 수 없는 언어로 소리쳤다. 말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델라는 얼음 마녀의 기분을 알 수 있었다. 마녀의 얼굴에 서린 두려움과 절망. 짙게 서린 패배의 기색은 아델라와 싸웠던 상대들이 보여주는 공통점이었다.
결국 아델라는 오늘도 뜨거워지지 못했다.
“……È troppo facile(시시해)”
주위를 얼린 냉기보다도 더욱 차가운 목소리. 아델라는 뻗었던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 투명할 정도로 하얀 손가락에서 흩어지는 푸른빛의 마나.
팡!
모였던 마나가 아델라의 손에서 퍼져 나오자. 거대한 얼음송곳이 파도처럼 전방을 휩쓸었다.
* * *
지이잉!
클리어를 마치고 아델라가 돌아오자. 협회에 있던 기자들은 무수한 플래시 세례를 쏟아냈다.
찰칵! 찰칵!
“국가 대항전에 참여할 생각이 있습니까? 만약 있으시면 국적은 한국인지 이탈리아인지…….”
“유학 학생 최초로 가온에서 학년 랭킹 1위를 달성하셨는데! 비결이 있다면?”
“2등 소감 부탁드립니다!”
“중국 팀에 대한 견해를…….”
마이크를 들이밀며 파도처럼 기자들이 달려들자. 아델라는 대답 없이 전광판을 바라봤다.
[1등 - 류진 (마천루 아카데미)]
[2등 - 아델라 (가온 아카데미)]
[3등 - 미정]
전광판에는 통과한 파티장과 아카데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신유성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다.
‘없어…….’
권왕의 제자.
가파른 성장세로 아델라는 신유성이 분명 자신과 동등한 실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지이잉!
옆에 있던 포탈이 작동하자. 아델라가 슥- 고개를 돌렸다.
‘……신유성?’
그러나 포탈에서 나오는 건 아델라가 생각했던 파티가 아니었다.
-3위는 쵸텐 아카데미! 세이지입니다!
안내요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포탈에서 일본팀의 학생들이 걸어 나왔다.
굳은 표정의 쿠로키 세이지.
기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상냥하게 웃어주는 하나사키 사쿠라.
허리에 찬 검을 만지작거리는 키리시마 잇신.
“3위를 하신 소감을…….”
대기하던 기자들은 일본팀에게도 마이크를 들이밀었지만 세이지는 전광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또 패배인가.”
가온 아카데미.
이번에도 한국의 헌터가 2위였다. 사쿠라는 자책하고 있는 세이지를 위로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 그래도 한 팀은 꺾었잖아?.”
신유성에 관한 이야기.
신유성은 아직 순위에 들어오지 못한 상태였다.
“음, 그런가.”
세이지의 담담한 대답.
그때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모니터를 지켜보던 관계자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시작됐다.
“듀, 듀라한을 처치하고 다시 돌아간다고? 설마 더블 공략인가?”
“시험에서 보스 두 개를? 그건 미친 짓 아냐? 보나마나 순위에도 못 들고 탈락 할 텐데…….”
관계자들의 믿기 힘든 이야기에 모든 파티장들의 시선이 모였다. 그 중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건 류진이었다.
‘……더블 공략을?’
던전 공략 대회에서 두 개의 보스를 노리다니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무리한 도전으로 입상을 놓치면 협회의 보상인 아티팩트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협회의 역사상 최초의 시도.
모니터를 지켜보던 아델라의 무표정한 얼굴에 남들은 알아채지 못할 변화가 생겼다.
‘……역시 흥미로워.’
남들과는 생각부터 다른 남자였다.
물론 시도에서 끝난다면 의미가 없었다. 지금의 시도가 성공적으로 끝을 맺으려면 4등에 안착할 수 있어야했다. 아델라는 은은한 기대를 품고 신유성 팀의 모니터를 지켜봤다.
* * *
안개의 숲.
신유성의 앞에는 박살이 난 갑옷의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역시 언데드는 나랑 상성이 나빠.’
일단 언데드는 신체에 약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치명타라는 개념이 없었고, 듀라한의 경우도 갑옷으로 보호 중인 원동력을 부숴야했다.
평범한 학생이라면 불가능한 일.
권왕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신유성은 그걸 성공시켰다.
투신류 폭룡암쇄장(暴龍巖碎掌)
기술의 파괴력을 증명 하듯 듀라한은 형태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신유성에게 남은 일은 ‘불사자’를 잡고 협회로 복귀하는 것.
발걸음을 재촉하는 신유성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스미레가 잘해주고 있어야 할 텐데.’
이제 다음은 신유성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 스미레의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