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7화 (17/434)

제17화

한국 헌터협회의 정기회의.

한국에서 내놓으라하는 정상급 헌터들이 모이는 회의실은 스카이 타운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두꺼운 유리 너머 아래에 펼쳐진 아득한 풍경. 강유찬은 백발의 노인이지만 협회장의 자리를 증명하듯 흉흉한 마나를 온몸에서 뿜어내며 중얼거렸다.

“유원학…….”

회의장에 모인 헌터들은 현역 중에서도 꽤나 이름을 날린 헌터들이지만 강유찬의 마나에 몸이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하지만 이 분위기를 만들어낸 문제의 주인공. 권왕 유원학은 크허허- 하고 소리를 내며 웃기만 했다.

그러자 협회장인 강유찬은 고개를 유원학에게 돌리며 쩌렁하게 호통을 쳤다.

“유원학 이놈아! 생사고락을 함께한 나를! 십여 년을 넘게 기다리도록 만들어?”

항상 차분했던 강유찬의 호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헌터들. 하지만 강유찬의 호통에는 분노가 아닌 친근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하, 미안하다! 중간 중간에 나도 얼굴 좀 비춰볼까 했는데! 우리 유성이 키우는 재미가 너무 쏠쏠하지 뭐냐?”

“그걸 나에게 변명이라고! 이놈!”

강유찬은 툴툴거리는 말과 달리 얼굴에 스며든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헌터계의 두 거인(巨人)이 서로를 보며 호탕하게 웃자. 회의장의 헌터들은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사실 이번 회의의 목적은 협회가 개최하는 [아카데미 던전 공략 대회] 이벤트 때문이었다.

헌터들은 이번 회의를 통해 신청자들 중 눈여겨 본 학생을 각자 추천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선수를 뺏은 건 유원학이었다.

“유찬아. 오랜 친구에게 내가 부탁 좀 해도 되냐?”

유원학의 한 마디에 협회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하지만 감히 유원학에게 반기를 드는 용감한 헌터는 없었다. 무엇보다 협회장의 정점인 강유찬은 유원학의 둘도 없는 벗이었다.

“껄껄…… 그래! 다 말해보아라! 내가 협회장인데 안 될 일이 대체 무엇이 있어?”

일개 헌터가 협회장인 강유찬에게 대드는 건 그야말로 자살 행위. 유원학은 스윽- 앉아 있는 헌터들을 시선으로 훑더니 입을 열었다.

“이번에 열리는 공략 대회……. 던전마다 어떤 아티팩트들을 숨겨 놨는지 좀 미리 알아야겠다.”

“그건 역시 네 제자 때문이냐?”

“그래. 흑룡포는 내가 헌터협회에 기증한 아티팩트인데 우리 유성이가  좀 가져가도 문제는 없지 않겠냐?”

유원학의 말에 강유찬은 점점 호기심이 생겼다.

“첫 제자라 그런지 너답지 않게 아주 애지중지하는구나.”

“어때 이제야 좀 관심이 생기냐?”

장난 섞인 유원학의 말.

하지만 곧 이어 강유찬이 뱉어낸 대답에 헌터들은 모두 굳고 말았다.

“그래. 네가 그렇게 아끼는 제자라니 내가 직접 보러가야겠구나.”

현역들의 행사에서도 보기 힘든 강유찬이 아카데미에 직접 행차한다는 건, 보통 뉴스가 아니었다.

결국 학교도시 지부의 관리자인 메이린은 조심스럽게 강유찬을 말리려고 했다.

“하, 하지만 협회장님…… 기껏해야 학생입니다! 협회장님께서 자리하시면 분명 소란이…….”

하지만 강유찬은 메이린의 충고를 가볍게 넘겨버렸다.

“껄껄! 그냥 친구의 제자를 보러가는 건데 호들갑이 심하군! 금방 다녀 올 테니. 너무 걱정들 마시게!”

권왕 유원학.

협회장 강유찬.

대한민국의 두 정점들이 한 학생에게 관심을 가지자. 회의장에 모인 헌터들은 모두 생각에 빠졌다.

‘그렇게 싹수가 좋단 말이지?’

‘친해지기만 하면 권왕님과 인맥을 틀 수 있겠군.’

‘스카우터에게 접촉 좀 시켜봐?’

1학년에 불과한 신유성의 이름이 최상위 헌터들의 머릿속에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     *      *

평화로운 K채널의 스튜디오.

신유성의 방송으로 연달아 시청률 대박을 터트린 유한나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즈릇즈르쟈쟈~”

그 증거로 유한나는 묘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더니 빨대를 쥬읍- 빨아 당겨 생과일주스를 가득 입에 머금었다. 하지만 그때.

쾅!

“속보! 속보!”

담당피디가 대기실문을 열며 거칠게 들어오자. 놀란 유한나는 푸하악! 하고 쥬스를 뿜어냈다.

“칵, 케엑! 켁! 아니, 콜록! 피디님! 아니, 대체 뭐에요 갑자기? ”

유한나는 한참을 콜록거리더니. 휴지로 코를 닦으며 도끼눈을 떴다.

“……아나 스읍! 딸기 씨가 코로 나왔네.”

완전히 짜증으로 물든 유한나의 표정. 그러나 담당피디는 유한나를 무시하고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16593768344887.jpg

“아니! 지금! 딸기 씨가 문제가 아니야!”

“……진짜 별일 아니면 이 코 닦은 휴지를 피디님 입에 넣어 줄 생각이에요. 유 언더스텐?”

유한나가 휴지를 흔들며 위협을 하자. 담당피디는 한발 뒤로 물러나며 속사포처럼 말을 뱉었다.

“권왕 유원학! 그리고 협회장 강유찬! 헌터계의 최고의 거물들이 지금 가온 아카데미로 가고 있다니까?”

“헐, really?”

충격을 받은 유한나가 멍한 얼굴로 묻자. 담당피디는 진지한 얼굴로 되받았다.

“Really!"

회의에 참석한 헌터들 중 한명이 언질을 준 것이다. 물론 그들이 아카데미에 참석하는 이유까진 담당피디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유한나는 눈치가 아주 빨랐다.

“……유원학과 강유찬이 가온 아카데미로? 이거 조합이 딱 봐도 신유성 보러 가는 거 아니야? 맞네! 유원학의 제자니까!”

흥분한 유한나가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자. 담당피디는 검지로 휴지를 가리켰다. 그 모습에 유한나는 분한 표정으로 휴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쳇, 그래도 이건 인정!”

담당피디는 유한나를 보며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뭐해, 지금 당장 팀 꾸려서 출발 안 하고?”

담당피디의 말에 따라 대박을 찍기 위해 장비를 챙기고 출동하는 유한나와 방송국의 최정예들. 그러나 그들도 유원학과 강유찬도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오늘은 신유성과 박수현.

둘의 대련이 예정된 날이었다.

*     *      *

SP(SchoolPoint)가 무려 150이나 걸린 공식 대련. 박수현은 김은아의 앞에선 F등급이라 신유성을 깔봤지만 정작 대련을 치르게 되자 만반의 준비를 했다.

“내가 말한 대로 세팅은 전부 끝내뒀겠죠?”

까닥.

검지로 안경을 추켜올리며 박수현이 물었다. 그러자 하수인으로 보이는 정장차림의 남자가 재빠르게 품 안에서 잘 포장된 손목 밴드를 꺼냈다.

“네! 도련님! 이 물건입니다!”

박수현은 대답 대신 손목에 검은색 밴드를 둘렀다.

착.

박수현이 주문한 검은색 밴드는 평범해 보이지만 효과가 뛰어났다.

[충전용 간이 실드]

밴드에는 무려 현역들이 사용하는 실드 배리어가 내장되어 있었다.

마나가 허용한다면 괴수의 일격도 어느 정도 막아줄 수 있는 제품.

‘대련에서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건 금지지만. 헌팅용품은 조항에 없단 말이지.’

씨익.

박수현이 손목의 밴드를 보며 웃었다. 지금까지 억을 호가하는 헌팅용품을 대련에 사용하기 위해 가져온 사람은 없었고, 박수현은 그 빈틈을 이용했다.

‘만약 실수로 거리를 주더라도. 간이 실드로 막아내면 그뿐이야.’

박수현은 거만하게 사무실 책상 위에 다리를 올리자. 마침 주머니에 넣어둔 전화기가 진동을 울렸다.

“아~ 교수님! 전화 받았습니다!”

박수현이 얼굴에 만연하게 미소를 띄운 채 대답을 하자. 전화기 너머에선 소심해 보이는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그래! 네…… 말대로 대련장을 골라놨단다. 입금은 약속대로 바로 해주겠지?

박수현이 피식하고 비웃음을 짓자. 손에 든 휴대폰이 진동을 울리며 메시지가 떠올랐다.

[대련 장소가 결정 됐습니다!]

[시간: 오후 1시]

[장소: 4번 대련장(오션돔)]

박수현은 미리 교수를 설득해 유리한 대련장을 고른 것이다. 원래는 형평성에 따라 무작위로 결정되지만 박수현은 돈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제 비서가 바로 입금해드릴 겁니다.”

박수현은 교수의 대답도 듣지 않고 휴대폰을 꺼버렸다. 그리곤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역시…….”

박수현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한 눈에도 미남으로 보이는 뚜렷한 이목구비. 박수현은 한쪽 입꼬리만 끌어올려 비열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람은 돈이랑 머리를 잘 써야한다니까?”

*     *      *

대련 시작 10분 전.

신유성은 투명한 물이 일렁이는 수영장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가온 아카데미에는 이런 거대한 대련장이 5개씩이나 존재하는구나?’

헌터들이 가진 특성은 개개인마다 달랐고, 그 중에는 특별한 힘을 가진 능력자들도 많았다.

가온 아카데미의 5가지 대련장은 그에 걸맞게 특색이 넘쳤다.

‘오늘 내가 박수현과 전투를 치르는 곳은…….’

4번 오션돔(Ocean Dome) 대련장.

범고래 쇼가 펼쳐져도 이상하지 않은 거대한 수영장에 노란색 부표가 띄워진 대련장이었다.

촤아아!

거기다 수영장은 주기적으로 몰려온 인공파도가 부표를 넘실거리게 만들었다.

‘너무 착지를 강하게 하면…… 빠질 수도 있겠군.’

오션돔 대련장은 몸을 이용한 격투로 승부하는 신유성에겐 너무 불리한 지형이었다.

‘힘을 많이 실을 수도 없겠고…….’

신유성이 시간을 살려 최대한 분석을 하고 있을 때, 대련장의 문이 벌컥 열렸다.

“방송국에서 취재 온다는 곳이 여기야 여기?”

“맞네. 난 솔직히 이런 걸 본다고 전력파악이 될까 싶지만…….”

보석섬에서 신유성에게 도움을 받았던 진민아와 성익현을 필두로 한 D반의 학생들.

“어! 유성이다!”

“시, 신유성 씨! ……저도 왔어요!”

그리고 방정맞게 손을 흔드는 이시우와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는 스미레가 F반의 학생들과 함께 대련장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학생들의 행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가온에서도 엘리트로 꼽히는 A반의 학생들이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자.

D반과 F반의 학생들은 절로 눈치를 살폈다.

“A반이다…….”

“박수현 때문에 온 건가?”

물론 A반의 무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중앙에서 짜증 섞인 얼굴로 팔짱을 낀 김은아였다.

“짜증나 여긴 너무 습하잖아? 물비린내도 나는 것 같고…….”

대한민국 최고의 아카데미라는 가온에서 무려 1학년 랭킹 2위. 거기다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이라는 신성그룹 회장의 손녀딸.

엘리트가 모인 A반의 무리에서도 김은아가 우두머리의 자리를 차지한 건 당연한 이치였다.

탁.

김은아는 관중석의 가장 상석에 다리를 꼬고 앉더니.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씩 웃었다.

“어디 3위 실력 좀 구경해볼까?”

그러나 이번 대회에 파란의 주인공은 한껏 폼을 잡고 있는 김은아가 아니었다.

쾅!

활짝 대련장 문이 열리며 유한나와 방송팀이 들이닥쳤다. 누군가를 향한 카메라와 쏟아지는 질문 세례.

권왕 유원학과 협회장 강유찬.

신유성을 보러온 진짜 거물들의 등장에 대련장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