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15화. 어려운 결정 (5) >
제115화. 어려운 결정 (5)
경기를 본 이강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바라 케일러스, 우승!
스폰서 입장에선 좋은 결과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면 마냥 좋은 결과는 아니네.’
소예민이 하드 캐리 하는 장면을 이강진이 두 눈으로 직접 봤다.
게임에 특출한 재능이 없어도, 발전 가능성은 충분했다.
첫 방송 경기 데뷔 무대에서 이렇게 좋은 모습을 보여 줬으니, 계속 도전해 볼 법도 하다.
그건 다시 말하자면······.
‘내 쪽으로 올 일은 없다는 뜻이겠지.’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소예민의 새로운 꿈을 응원해 주는 것.
이것이 이강진이 해야 할 일이다.
‘두석이한테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호언장담을 하지 않았을 텐데.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경기장을 떠나려고 하던 찰나였다.
오종한이 이강진을 찾았다.
“강진아! 우리 회식하러 갈 건데, 같이 안 갈래?”
“괜찮아. 할 일도 있고.”
“회사 업무?”
“어, 회사 들어가는 건 아니고 이 근처에 오픈 예정인 우리 가게가 있거든. 거기 가서 준비 잘되고 있나 한번 확인해 보게.”
기왕 여기까지 나온 거, 회사 대표로서 해야 할 일은 하는 게 좋지 않겠나.
나두석에게 업무를 떠맡기고 온 것도 미안하고 말이다.
“그래? 그러면······ 잠깐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조용히 자리를 옮기는 두 사람.
오종한이 이강진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무슨 일인데? 문제라도 있어?”
“문제라. 어찌 보면 그렇기도 하지.”
오종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기도 이겼고 기뻐해야 하는 날에 왜 갑자기 한숨을?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예민이, 프로 게이머 관두겠다고 하더라.”
“엥?”
전혀 예상 못 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오늘 경기도 잘 풀렸고 게임 팬들에게 소예민이라는 이름 세 글자도 확실하게 각인시킬 수 있었다.
이대로만 계속 나가면 분명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터인데 왜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하는지, 이강진은 솔직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왜?”
“그게 말이다.”
오종한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방송 무대가 자신이 생각한 것하고 많이 달랐대. 한번 방송 무대에 서 보니까, 앞으로 계속 방송 경기를 가져도 오늘 느낀 감정 이상을 느낄 거 같지 않대나 뭐래나.”
“오늘 하드 캐리 했잖아?”
“그렇긴 하지. 근데 그건 소예민이라는 게이머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어. 보통 우리를 상대하는 팀은 우리 선수가 어떤 성향을 지녔는지, 이런 걸 다 분석하고 오거든. 그런데 예민이가 오늘이 첫 데뷔 무대였으니까 그런 정보가 없었던 거지. 그래서 상대 팀이 예민이한테 한 방 먹은 거야. 나중에 두세 번 더 경기 치르다 보면, 오늘처럼 예민
이 하드 캐리 하는 장면은 잘 안 나올 수도 있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예민이 본인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 여기까지가 딱 자신의 한계라고. 벽을 느꼈나 봐.”
인생을 살다 보면 자신을 가로막는 벽이 등장하곤 한다.
그 벽을 반드시 부술 필요는 없다.
다른 길을 찾아서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소예민은 후자를 택한 셈이었다.
“그리고 본인은 아직 젊으니까 좀 더 다양한 일을 해 보고 싶다고 하더라.”
“설마 에베레스트 등반이라든지, 사하라사막 횡단이라든지 이런 건 아니겠지?”
“어?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이전에도 소예민은 다양한 도전들을 하고 싶어 했다.
그 성향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형, 오늘 회식한다고 했지?”
“어.”
“회식, 몇 시까지 할 거 같아?”
“글쎄. 왜, 너도 참가하게?”
“아니, 일 끝나면 숙소에 가서 예민 씨랑 이야기 좀 해 보게.”
이것은 절호의 기회다.
기회가 찾아왔으면 그것을 움켜쥐는 게 당연한 법.
이강진은 그날이 바로 오늘이라고 직감했다.
* * *
저녁 11시 반.
이강진은 늦은 시간에 바라 케일러스 숙소를 찾았다.
오종한에게 미리 말을 전해 들었는지 소예민은 이강진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으로 그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미안해요. 피곤하실 텐데 저 때문에 잠도 못 주무시고 기다리게 해서······.”
“괜찮아요. 저, 야행성이거든요.”
지금 시간이면 한창 깨어 있을 때다.
이강진은 그녀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티날레 분점으로 향했다.
본점은 늦은 저녁에 문을 닫지만, 모두가 다 본점처럼 영업시간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었다. 몇몇은 24시간 동안 운영하는 곳도 있었다.
그중 한 곳이 바로 이곳, 바라 케일러스 숙소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바라 케일러스 선수들에게는 직원가로 커피 가격이 측정되기 때문에 소예민도 이곳을 자주 찾았다.
싸고, 여기에 맛까지 좋다면 당연히 단골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카운터를 지키던 점장은 이강진을 보자마자 바로 그를 알아봤다.
“대,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늦은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강진의 등장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한 후에 이들은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거의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대라 그런지 매장 내에 손님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강진은 막 나온 따스한 아메리카노를 음미했다.
그런 뒤, 바로 본론을 꺼냈다.
“오종한 감독한테 들었습니다. 은퇴를 생각하고 계시다고요?”
“네.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그래도 많은 걸 배웠어요. 그리고 방송 무대에 서고 싶다는 제 인생 버킷리스트 하나도 달성했고요.”
“버킷리스트가 많은가 보군요.”
“에베레스트산에도 가고 싶고, 사하라사막도 횡단하고 싶고, 남극 투어도 계획 중이에요.”
도전 정신이 어마어마했다.
예전의 소예민도 이런 성격이었다.
휴가를 내면, 집에서 쉬기보다는 그 시간 내에 무언가에 도전하려고 했다.
5일 동안 휴가를 내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전거 투어에 도전했던 건 회사 내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 소예민이 맞긴 한가 보네.’
절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에베레스트도 가고 사하라사막도 가고 그러려면 역시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소예민의 집안이 금수저도 아니고.
여행 자금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요즘 시대에는 도전을 하려고 해도 돈이 필요했다.
소예민도 이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네. 그래서 당분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좀 모아 볼까 생각 중이에요.”
‘알바’라는 말을 들은 순간, 이강진의 눈이 반짝였다.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러면 우리 회사에서 일해 보지 않겠습니까? 알바 말고 정직원으로요.”
“회사라면······ 바라 코리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좋은 이야기인 하지만, 소예민은 어리둥절했다.
서류 전형을 통과한 것도 아니고 면접을 본 것도 아닌데 갑자기 와서 일을 하라고 하다니.
“저의 어떤 일면을 보고 이런 제안을 하시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예민 씨의 가장 큰 장점이 있지 않습니까.”
예전부터 자주 언급했던 소예민의 강점.
“도전 정신. 저나 예민 씨 같은 젊은 사람에게는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예민 씨의 도전 정신이 어떤지 검증은 다 끝났습니다. 그래서 예민 씨를 우리 회사로 데려오고 싶은 겁니다.”
도전이라고 하면 바라 코리아, 바라 코리아라고 하면 도전의 대명사다.
각종 요식업 관련 분야에 뛰어들면서 점점 영역을 넓혀 가고 있는 바라 코리아.
가파른 성장세에 필요한 건 바로 실패라는 두려움을 떨쳐 내 버릴 강한 도전 정신이다.
소예민은 그것을 이미 가지고 있다.
“우리 바라 코리아의 사내 복지나 근무 환경 같은 것은 이미 유명하니까 굳이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연봉 같은 경우도 원하신다면 미리 밝혀 드릴 수 있습니다만.”
나두석보다는 약간 낮춘 연봉을 제시하고 싶었다.
두 사람의 연봉을 벌써부터 동일하게 맞추면 안 된다. 그러면 나두석이 뭐가 되겠나.
약간 다운그레이드해서 측정한다고 해도 다른 회사에 비하면 월등히 잘 주는 편이다.
소예민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알았어요. 대표님 밑에서 일해 볼게요.”
어차피 프로 게이머를 은퇴하면, 지금 당장은 할 일이 없다.
시의적절하게 소예민에게 좋은 제안을 한 이강진.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다.
* * *
회사로 출근하자마자 이강진은 나두석을 사무실로 불렀다.
“저번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하도 많아서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네 부사수 구해 주겠다는 거.”
“아······!”
나두석의 얼굴에 기대감이 번졌다.
“눈여겨보는 사람이 한 명 있다고 했던 거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어제저녁에 만났는데, 이야기 잘 풀렸다. 이번 주 안으로 출근할 거야. 이름은 소예민. 나이는 너보다 연상이고, 일 잘하고 근성 있고 승부욕 넘치는 사람이니까, 무슨 일을 시키든 다 잘할 거야.”
“저처럼 올라운더네요.”
“그렇지.”
매치 오브 레전드에서는 미드 라인에 섰던 플레이어지만, 경영 면에서는 올라운더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강진은 어떻게든 소예민을 자신의 밑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나두석 그리고 소예민.
투톱 카드를 모두 확보한 이강진은 마음이 든든해졌다.
하지만 아직 구해야 할 카드가 하나 더 남았다.
“그리고 사람을 한 명 더 뽑을까 하는데.”
“또 구해 주시게요?”
“네 부사수가 아니고, 내 매니저 한 명 뽑으려고.”
요즘 방송 일이 계속 늘어나다 보니 이강진 혼자서는 통제가 안 될 정도였다.
안 그래도 회사 일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일정 체크하랴 촬영 장소까지 운전하랴 죽을 맛이었다.
이강진은 로봇이 아니다. 사람이다. 그가 아무리 완벽에 가까워도 지치게 마련이다.
“나 쓰러지기 전에 어떻게든 한 명 구해야겠어. 혹시 주변에 매니저 일 하다가 쉬고 있는 사람 없어?”
“글쎄요. 제 주변에는 없습니다만. 꼭 매니저 출신이어야 하나요?”
“굳이 안 그래도 되긴 하는데······. 일 잘하면 아니어도 상관없어. 인수인계는 내가 직접 하면 되니까. 대신 싹싹하고, 운전 좀 할 줄 알고, 성격 좋고, 사회 경험 좀 있고, 나랑 대화도 잘 통하고. 그러면 좋겠는데.”
은근히 조건이 까다로웠다.
그 이야기를 듣던 나두석이 어느 한 인물을 거론했다.
“한 명이 떠오르긴 하네요.”
“있어?”
“네. 싹싹하고, 운전면허 있다고 들었고, 성격 좋아 보이고, 형님처럼 노가다, 알바 경험이 많아서 사회 경험도 제법 있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대화가 잘 통한다.’라는 것도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을 겁니다. 형님도 잘 아는 사람이거든요.”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지인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나?
이강진의 머릿속에 당장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누군데?”
“얼마 전에 형님한테 추천받고 이력서 보내온 사람입니다. 허인강 씨라고 하는데, 아시죠?”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그가 전역하기 전에 이강진은 허인강을 찾아가서 할 거 없으면 우리 회사에 지원하라는 말을 남기고 왔었다.
“허인강, 허인강이라······.”
그의 이름을 되새기던 이강진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인강이한테 연락해서 내일 오후 2시에 내 사무실로 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군대에서 다진 인맥의 힘을 다시 꺼내기로 했다.
< 제115화. 어려운 결정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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