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2화. 낯설지 않은 손님 (3) - 13권 완결 >
제102화. 낯설지 않은 손님 (3)
전철에서 내린 이용진은 지하상가를 가로질러 계단을 올랐다.
'강남역'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이쯤이라고 했는데."
어제 이강진과 통화를 마쳤던 이용진은 오늘, 이강진의 얼굴을 직접 보기 위해 이곳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바라 식당 서울 지점.
큰길을 따라 걷다 보니 '바라 식당'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적 힌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간판도 간판이지만, 이용진의 시선을 사로잡는 게 하나 더 있었다.
일렬로 길게 쭉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
그야말로 진풍경이 따로 없다.
'이 사람들이 전부 다 바라 식당을 찾아온 거겠지?'
아무리 봐도 그렇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직원으로 보이는 남성이 줄을 세우면서 번호표를 배 부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식사하러 오셨나요?"
"네? 아, 그게 말이죠. 저는……."
"일단 번호표부터 받으세요!"
남자 직원은 거의 강제로 이용진에게 번호표를 줬다.
대기 번호, 75번.
"웨이팅이 좀 깁니다. 한 50분 정도 걸릴 거 같은데, 괜찮으신 가요?"
괜찮을 리가 있겠나.
1분 1초라도 빨리 이강진과 만나서 이번 주 주말에 있을 방송 미팅을 가져야 하는데, 50분 동안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여유는 없다.
"저는 밥 먹으러 온 게 아니라……."
남자 직원에게 자초지좋을 들려주려고 하는 순간.
"용진이 형!"
저 멀리서 이강진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언제 오나 했더니만, 거기서 왜 줄을 서는 거야. 어서 들어와."
순간 남자 직원의 안색이 파랗게 되었다.
"대, 대표님하고 아시는 사이신가요?"
"예, 방송 촬영 때문에 오늘 저분하고 여기서 보기로 했습니다."
당황하는 남자 직원.
그러나 이용진은 괜찮다는 의미로 그의 어깨를 토닥여 줬다. 그의 잘못은 본업에 너무 중실했다는 것뿐이다. 이용진은 고 작 그거 가지고 젊은 직원을 탓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 * *
원래는 바라 식당에서 미팅을 가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렸기에 이들은 미팅 장소를 바라 식당 옆에 위치한 티날레로 옮기기로 했다.
덕분에 이용진은 오랜만에 김원홍과 만나게 되었다.
"원홍 씨! 이야, 가게 좋아졌네요!"
"엇? 용진 씨 아닙니까? 여긴 어쩐 일로……. 아! 이 대표님하고 미 팅 있으신가 보군요!"
이강진과 함께 나란히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김원홍은 이용 진이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 다.
오랜만에 김원홍의 가게를 찾은 이용진.
그는 메뉴판을 보자마자 10초도 안 돼서 바로 메뉴를 선정했다.
"에일 밀크티 한 잔 주세요."
이용진도 이강진처럼 오래전부터 김원홍의 에일 밀크티를 접 해 왔던 사람 중 한 명이다. 오래간만에 옛날 기억도 떠올릴 겸 해서 그는 새롭게 변한 에일 밀크티를 주문했다.
이강진도 뒤를 이어 음료를 골랐다.
"전 바닐라 라떼 부탁드릴게요."
이용진은 이강진의 메뉴 선정에 이해가 안 된다는 리액션을 취했다.
"엥? 넌 왜 에일 밀크티 안 마셔?"
마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사람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강진은 쓴 미소를 지었다.
"난지겹도록 마셨거든."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매번 먹으면 잘리기 마련이다.
이강진은 자신이 기억하는 에일 밀크티를 그대로 구현한다는 명목 때문에 김원홍이 만든 에일 밀크티를 많게는 하루에 일곱 잔도 넘게 마셨던 적이 있었다.
이쯤 되면 안 질리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자리를 잡고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김원홍이 직접 음 료를 들고 두 사람 앞에 등장했다.
"에일 밀크티, 바닐라 라떼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건 서비스 입니다."
초코 케이크까지 세팅해 뒀다.
이용진은 김원홍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서비스가 후한 건 변함없군요."
"자주 찾아 주세요. 그러면 서비스 더 많이 드리겠습니다."
예전과는 다르게 김원홍은 이제 능수능란하게 손님들을 상대 할 줄 알았다.
음료 연구를 하는 동안, 김원홍은 손님들을 어떻게 대하면 좋 을지에 관련된 공부와 연습도 거듭 반복했다.
그래서인지 한결 여유로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달라진 김원홍과 그의 카페에 이용진은 감회가 새로웠다.
김원홍이 자리를 비켜 준 뒤, 이용진은 솔직한 감상을 드러냈 다.
"전혀 다른 가게 같아. 확실히 네가 코치해 주니까 느낌이 확 달라졌네."
"그렇다고 백 퍼센트 내 덕분은 아니고, 그만큼 원홍 씨가 많 이 노력한 덕분이지."
"그래도 옆에서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얼마나 큰데. 널 보면 백두원 선생님이 떠오른단 말이지."
다양한 요식업으로 성공 신화를 이어 가고 있는 요리 연구가, 백두원.
이강진은 개인적으로 백두원을 높게 평가했다. 하나 자기 자 신을 백두원과 동일선상에 놓고 싶어 하진 않았다.
애초에 두 사람은 크나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난 백두원 선생님만큼 요리에 대한 열정이 크지 않으니까. 어디까지나 난 사업가지, 선생님만큼 열정적인 요리 연구가는 아니야."
"사업가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디야. 주변에 잘 살펴봐 봐 아무리 음식을 맛있게 만들면 뭐 해, 홍보가 전혀 안 되 니까 사람들은 그런 맛집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잖아. 상업적 으로 흥행시킬 수 있는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재능이야, 재 I- U =이용진의 말이 옳았다.
요리를 잘하는 것과 그 요리를 가지고 많은 돈을 버는 것은 별개의 영역이다.
언제까지 사람들이 자신의 실력을 알아주기만을 기다릴 텐가. 본인이 스스로의 실력을 영업해야 한다.
이강진은 그 '영업'이라는 역할을 충실하게 소화했다. 그 덕분 에 바라 식당과 티날레를 대한민국 요식업계에 떠오르고 있는 신성으로 만들어 냈다.
"안 그래도 너한테 이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이용진이 갑작스러운 제안을 꺼냈다.
"우리, 1화 때 호만 씨가 식당 운영할 출연진한테 요리 전수 해 주는 모습 촬영하기로 했잖아."
"그렇지."
"선배님이 그러시던데, 괜찮다면 너도 같이 출연해 줄 수 있 냐고 물어 보라고 하시 더 라."
"내가?"
이전 미팅을 진행할 때만 하더라도 이런 이야기는 전혀 없었 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이강진은 당황스러웠다.
"난 요리를 그렇게까지 잘하는 건 아닌데."
"아까도 말했지만 너한테 요리를 알려 달라고 부탁하는 건 아니야. 어떻게 식당을 운영하면 되는지, 사업가의 시선에서 노하 우를 전수해 달라, 이 말이지."
이용진이 연출을 맡을 '플래나 레스토랑'에 출연하는 연예인 들 중에서 실제로 가게를 운영해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가게뿐이랴, 사업을 해 본 경험조차 전무하다.
'플래나 레스토랑'은 하나부터 열까지 출연진이 직접 식당을 운영하는 모습을 촬영할 예정이다.
가게 운영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에 대한 조언을 해 주는 역할을 이강진이 맡으면 딱이지 않을까.
이것이 이용진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대중은 아직도 너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국민 영웅의 인지도 효과를 좀 보고 싶었다.
이용진은 이것까지도 솔직하게 말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이강진.
자신까지 출연할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제안이긴 한데.'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바라 코리아 대표인 이강진이 직접 얼굴을 비치면, 그 만큼 회사 홍보에도 도움이 될 터.
이강진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알았어, 나도 나갈게."
큰 결심을 내렸다.
* * *
드디어 플래나 레스토랑 첫 촬영 당일.
오호만은 난생처음 샵이라는 곳에 들렀다.
그는 옆에 나란히 앉은 채 같이 헤어 스타일링을 받고 있는 이강진을 슬쩍 쳐다봤다.
안절부절못하는 오호만과 다르게 이강진은 익숙한 듯 잡지를 쭉 정독하는 모습을 보였다.
회귀 이전에 이강진은 대외적인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런 식 으로 샵에 들러서 머리를 다듬고 갔었다.
예전의 습관이 회귀 이후에도 고스란히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강진은 한결 여유로운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오호만은 달랐다.
"……강진아, 이강진."
미용사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오호만이 아주 작은 목소 리로 이강진을 불렀다.
"어, 왜? 어디 불편해?"
"그게 아니라. 머리를 무슨 1시간 넘게 만지고 있냐? 아니, 그 냥 가위로 슥삭슥삭하면, 10분이면 끝나잖아."
"그건 동네 미용실에서나 그렇게 하는 거고, 여기는 다르지."
"거참……."
오히려 오호만은 동네 미용실이 더 편했다. 심지어 이곳 샵은 비용도 비쌌다.
"이 가격이면 치킨이 몇 마리야."
그 말을 듣자마자 이강진은 피식 웃었다.
"하긴, 치느님은 인정이지."
"근데 넌 왜 그렇게 여유가 넘치냐? 여기 몇 번 와 본 사람처럼."
"실제로 와 본 적이 있었으니까."
잡지를 잠시 덮어 놓은 이강진은 오호만에게 도움이 될지 어 떨지 모르는 말을 건넸다.
"익숙해지면 편해져. 그러니까 노력해 보r
"글쎄다……."
평소의 오호만은 이강진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봤다.
그러나.
이번은 영 믿음이 안 갔다.
출연진이 오호만한테 요리 수업을 받는 장면은 별도의 스튜 디오에서 촬영할 예정이었다.
이강진과 오호만이 촬영장에 합류했을 때에는 이미 녹화가한 창 진행 중이었다.
이용진이 반가운 표정으로 이들을 반겼다.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호만 씨하고 강진이가 등장하는 파트가 나오려면 한 30분은 더 걸릴 거 같으니까, 저쪽 의자에 가셔서 앉아 있으면 됩니다."
두 사람은 이용진의 말에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낯선 현장에선 전문가의 말대로 따르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 법이다.
이강진은 의자에 앉아 출연진이 토크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때.
한지윤과 딱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카메라가 자신을 비추지 않는 틈을 노려서 이강진에게 살짝 윙크를 선보였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이강진은 작은 미소로 화답했다.
한지윤뿐만 아니라 이전에 인사를 나눴던 보이 그룹 KGE의 멤버, 지왕도 보였다.
지왕이 이곳에 있다는 건…….
"강진 씨!"
KGE의 매니저, 최창우가 이강진을 격하게 반겼다.
마음 같아선 좀 더 격 렬하게 이강진과의 재회를 축하하고 싶 었지만, 한창 녹화가 진행되고 있던 터라 그럴 수가 없는 게 아쉬웠다.
"이야! 전역하시더니 더 잘생겨지셨네요! 뒤에서 봤을 때 '녹 화 때 남배우가 게스트로 나오기로 했나?' 하고 한참을 생각했었습니 다, 하하하!"
"에이, 그 정도는 아닙 니다."
오랜만에 보는 최창우는 그때나 지금이나 유쾌한 사람이었다. 죄창우와 이강진의 공통점은 역시 성태강이다.
"태강이는 요즘 잘 지내나요?"
최근 연락할 일이 별로 없었기에 이강진은 성태강의 근황을 몰랐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최창우.
"네, 얼마 전에 무박 3일 끝났다고 엄청 피곤하다고 그러더라 고요."
무박 3일 훈련.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강진은 몸을 부르르 떨 었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태강이하고 애들 보러 가긴 해야 하는데.'
슬슬 백우호, 김철과 같이 면회 일자를 잡을 때가 되었다. 언제가 좋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스태프가 이강진을 찾았다.
"강진 씨, 곧 호만 씨하고 같이 등장하실 차례니까 준비해 주 세요."
"예, 알겠습니다."
일단은 촬영부터 먼저 끝내고 생각하기로 했다.
< 제102화. 낯설지 않은 손님 (3) - 13권 완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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