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1화. 새 출발 (4) >
제101화. 새 출발 (4)
이강진은 그녀의 용기에 솔직하게 대답해 주기로 했다.
그의 진심을 담은 고백에 한지윤의 첫 반응은 단계별로 나뉘 었다.
1단계. 멍한 표정을 지었다.
2단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모양인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3단계. 고개를 푹 숙였다.
귀까지 빨개진 한지윤의 모습에 이강진 또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살면서 이런 고백은 처음이네.'
설마 한지윤에게 고백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회귀해서 재입대를 하게 된 것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 믿기지 않았다.
티비 속에서만 보던 이강진의 짝사랑.
닿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랑의 종착지에 마침내 다다른 듯한 기 분이 들었다.
이강진이 할 일은 여기까지다.
이제 이들의 만남이 계속 이어질지, 아니면 이곳에서 끝을 맞 이할지.
이것은 한지윤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갑자기 한지윤이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아…… 어쩌면 좋아……!"
혼잣말을 내뱉으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반응을 보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솔직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꺼냈다.
"죄, 죄송해요. 살면서 처음으로 고백받아 봐서…… 어떻게 반 응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드라마나 영화에선 이런 경우, 많이 접해 보시지 않았나요?"
"그건…… 진짜가 아니잖아요."
어디까지나 연기, 즉가짜다.
한지윤이 먼저 운을 떼긴 했지만, 설마 이 자리에서 이강진에게 고백까지 들을 줄은 몰랐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된 그녀.
손이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던 이강진이 슬쩍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아 줬다.
흠칫 어깨를 들썩이는 한지윤.
그러나 이내, 이강진의 따스한 온기에 점점 마음의 안정을 찾아 갔다.
이강진은 특별히 그녀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잡아 줬을 뿐.
한지윤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고마워요, 강진 씨."
심호흡을 한 뒤, 한지윤은 겨우 힘을 짜내 미소를 유지했다.
이렇게 행복한 순간, 한지윤은 웃고 싶었다.
그건 이강진도 마찬가지 였다.
마주 미소를 지어 주는 이강진의 상냥함에 한지윤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기로 했다.
이건 연기가 아니다.
솔직하게.
"……저도 강진 씨 좋아해요."
이강진이 회귀한 이후 들은 말 중 가장 기쁜 말이었다.
* * *
군대에서 한지윤을 알게 되고 그녀와 만나면서 이강진은 새 로운 소원이 하나 생겼다.
전역하고 나면, 새 출발을 한지윤과 같이하고 싶다고.
그의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정식으로 연인이 된 이강진과 한지윤.
하나 사람들에게는 아직 공표하지 않기로 했다.
한창 촬영 일정이 잡혀 있는데, 도중에 한지윤이 이강진과 사 귀게 되었다는 기사가퍼지기라도 하면 출연하기로 예정되어 있 는 영화, 드라마에 영향을 줄지 몰랐기 때문이다.
공개 연애를 하더라도 타이밍을 봐서 하는 게 좋다.
이강진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찬성했다. 아니, 오히려 이강진 이 그렇게 말을 하려고 했었다.
그때까지 두 사람이 사귄다는 걸 최대한 비밀로 하기로 그렇게 입을 맞췄다.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출발하기로 한 이강진은 정태성을 따로 찾았다.
"이번에도 태성 씨 덕분에 재미있게 놀다 갑니다."
"나중에 또 스키 타고 싶어지면 언제든 놀러 오세요. 제가 성 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받기만 하면 영 그러니까요."
이강진은 새로 바뀐 자신의 명함을 정태성에게 건네줬다.
"2월 중에 제가 운영하는 요식업 브랜드들이 강남역에서 오 픈할 겁니다. 근처에 오실 일 있으면, 직원에게 이 명함 주시고 성함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직원들이 알아서 태성 씨를 잘 대 접해 줄 겁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꼭 들를게요."
이강진은 받기 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받은 만큼 그에 따른 보답을 해 주고 싶었다.
'내 고백이 성공한 것에 대한 지분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만약 정태성이 직원들만 이용하는 휴게실을 이용할 수 있게 해 주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고백할 수 있는 타이밍이 없었을지 도 모른다.
덕분에 미녀 여배우를 여자 친구로 두게 되었으니…….
'그만한 보답을 해 줘야지.'
한지윤의 집 근처까지 바래다준 이강진.
먼저 차에서 내린 그녀가 이강진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조심해서 내려가요. 도착하면 꼭 전화 주시는 거, 잊지 말고
"네. 지윤 씨도 슬슬 들어가세요."
"강진 씨 가는 거 보고 들어갈게요."
그녀의 시선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강진은 어쩔 수 없이 먼저 차를 돌려야만 했다.
마지막까지 이강진은 추운 날씨 속에도 불구하고 창문을 열 고서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보냈다.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서울로 상경하기까지 앞으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그동안 이강진은 직장과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이사 준비를 서둘렀다.
이강진뿐만이 아니었다.
바라 코리아 직원들, 그리고 오호만을 비롯해서 바라 식당에 서 일하던 몇몇 직원들도 서울로 올라갈 준비를 해야만 했다.
청주의 두 번째 바라 식당은 한발 먼저 오픈해서 지금 현재 정상적으로 운영 중이다.
가게 두 곳을 책임지게 된 황민수는 정신이 없었다.
이 와중에 그는 또 다른 일을 추진해야만 했다.
"웃차!"
이강진과 그의 어머니가 사는 집에 다수의 짐을 가지고 온 황 민수.
곧 서울로 올라갈 이강진의 짐을 나르는 게 아니었다.
황민수의 짐을 이강진 모자의 집으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강진도 황민수의 개인 짐 나르기를 도왔다.
다음 주부터 황민수가 이강진을 대신해서 이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즉, 이강진의 어머니와 정식으로 살림을 합치게 된 것이다.
"아저씨, 이 책장은 그냥 버리시는 게 좋지 않아요? 엄청 낡았 는데요."
"안 돼. 그거, 내가 예전에 목공 일 배우면서 처음으로 만들었 던 책장이라고. 아직 쓸 만하니까 놔둬라."
남들에게는 쓰레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황민수에게는 추억 이었다.
추억을 버리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어쩔 수 없이 이강진이 이해해 주기로 했다.
두 사람이 한창 짐을 나르고 있는데, 이강진의 어머니가 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 왔으니까 먹고들 해요."
이사엔 역시 중국집이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짜장면과 볶음밥, 짬뽕, 그리고 군만두와 탕수육까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한가득이 었다.
"잘 먹겠습니다!"
볶음밥을 시킨 이강진은 그것을 크게 한 숟가락 떠서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우적우적.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황민수도 자신이 시킨 짜장면이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단숨 에 면발을 흡입했다.
두 사람을 보던 이강진의 어머니는 쓴웃음을 흘렸다.
"천천히 먹어요. 그러다가 체하면 어떻게 하려고."
"이 정도는 괜찮아요, 엄마. 군대에 있을 때에는 이것보다 더 빨리 먹었는데요, 뭘."
빨리 밥 먹고 막사로 돌아가서 쉬는 게 먼저였기에 식사는 무 조건 빠르게 했다.
황민수는 그런 이강진의 말을 들으면서 크게 웃었다.
"하하하! 전역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틈만 나면 군대 이야기네."
"아차."
순간 이강진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니까 자꾸 재입대 꿈을 꾸는 거다.
"아직 군대 물 빠지려면 한참 멀었네요."
"나도 그랬어. 나 때는 말이다. 지금의 너희보다 훨씬 더 길게 군대를 갔다 왔거든. 그때 어땠냐면……."
군대 이야기가 나오자, 황민수는 신이 난 모양인지 젓가락을 내려놓고 주저리주저리 말을 이어 갔다.
너무 길다 싶었는지 이강진의 어머니가 황민수의 어깨를 찰 싹 때렸다.
"어휴, 그만하고 조용히 밥 먹어요. 듣는 사람이 얹힐 거 같아요."
"미, 미안해요. 어흠!"
민망한지 황민수는 헛기침을 했다.
어머니에게 벌써부터 꼼짝 못 하고 잡혀 사는 황민수의 모습 에 이강진은 속으로 몰래 웃음을 삼켰다.
황민수 덕분에 이강진은 안심하고 서울로 올라갈 수 있게 되 었다.
문득 이강진의 머릿속을 스치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아버지."
순간 황민수가 콜록거리며 기침을 했다.
겨우 숨을 진정시킨 황민수는 부끄러운 모양인지 머리를 긁 적였다.
"그 '아버지'라는 말이 왜 이리도 낯설게 느껴지는지 모르겠 네."
"왜요. 그럼 '아빠'라고 불러 드릴까요? 이러면 좀 더 친근감 있게 느껴지지 않나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에이, 난 모르겠다! 그냥 너 편한 대로 불러라!"
그의 모습에 이강진과 어머니는 크게 한바탕 웃었다.
어쩌면 이것이 이강진이 원했던 가족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서울로 떠나기 하루 전.
이강진은 어머니와 황민수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하는 회식 자 리에 참가했다.
결혼식을 따로 가지지 않고 바라 식당에서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파티를 벌이기로 했다.
초대받은 이들이 하나둘씩 입장했다.
이들은 두 사람의 새 출발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 소소하게 선 물을 준비했다.
오호만이 그 선물을 들고 두 사람 앞에 섰다.
"스승님! 이거, 저희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황금으로 만든 작은 원앙 한 쌍.
황민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진짜 황금이여?"
뒤이어 이강진의 어머니가 부담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런 비싼 건 필요 없는데……."
"괜찮아요, 어머님. 이거, 거의 대부분은 강진이가 부담했어 요. 아들의 효도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으세요."
아들이 애써 준비한 선물을 거절하는 것 또한 매너가 아니다.
어머니는 이강진을 보면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아들."
"행복하셔야 해요, 엄마."
"우리 아들을 위해서라도 꼭 행복할게."
이전보다 자주 얼굴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니, 이강진은 오늘 사랑하는 엄마의 모습을 실컷 눈에 담아 두기로 했다.
서울로 이사하는 날.
"집이 넓어서 좋긴 한데."
30평이 넘는 집에 혼자 있으니 너무 휑한 느낌이 들었다.
"룸메이트라도 들여야 하나?"
이강진의 집에 들어와서 살 만한 사람이 딱히 없었다.
대충 짐을 푼 뒤에 그는 사무실로 향했다.
바라 코리아 사무실 내부 또한 이사 준비로 한창이었다.
나두석이 이강진을 찾았다.
"오셨어요, 형 님?"
그는 이강진보다 한발 먼저 서울에 와서 사무실 이사를 책임 지고 있었다.
이강진의 집만큼이나 사무실도 약간 휑해 보였다.
"사람을 더 뽑아야겠네."
"인터넷에 채용 공고는 올렸습니다. 오늘부터 이력서 들어올 거예요."
"마감되면 정리해서 나한테 보내 줘."
"형 님이…… 아니, 대표님이 직접 확인하시게요?"
"그래야지."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능력 있고 성실한 사람들 위주로 뽑아 야 한다.
이강진은 스스로 사람 보는 눈??좋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자부심을 활용할 때가 온 것이다.
"가게 오픈은 다음 주부터지?"
"예, 호만이 형님 지금쯤 정신이 하나도 없을 겁니다. 한번 가 보실 건가요?"
"그래야지."
새로??출발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졌다.
나두석과 같이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 터에 몸을 실은 이강진.
도중에 나두석이 기습적으로 질문을 꺼냈다.
"근데 대표님, 지윤 씨하곤 어떻게 됐습니까? 스키장 다녀오신 이후로 전혀 말씀을 안 하시던데. 잘되신 겁니까? 아니면 혹시 안 좋게 된 건 아니죠?"
"몰라도 돼, 인마."
더 이상의 간섭은 사양하고 싶었다.
< 제101화. 새 출??(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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